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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틴툰 씨는 미얀마(버마) 사람이다.

미얀마는 1845년부터 1950년까지 약 100여 년간 영국·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50년 독립했으며, 그 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현재까지 미얀마의 정권은 군부가 잡은 상태다. 미얀마의 영토는 한국 보다 5배가량 넓고, 인구는 5천5백만 명 정도 된다. 인구의 90%는 불교도다. 우리에게 미얀마는 ‘아웅산 테러’ 또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감금된 나라 정도로 알려졌다.

1976년 아웅틴툰씨는 4남 5녀 총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12살이던 1988년 8월 8일 미얀마에서는 ‘군사정권 종식’을 기치로 한 큰 시위가 벌어졌다. 이른바 ‘8888’ 시위다. 대규모 시위 당시 아웅틴툰씨는 불과 12세의 나이로 총을 잡고 무장시위에 나섰다고 한다.

“지금 한국 12살이랑, 버마 12살이랑 느낌이 달라요. 버마에서는 17세면 '성인'이거든요. 대학교 1학년생이죠. 버마에서 12살이면 한국 분위기로는 17~18살 정도 되요. 또 당시 시위 분위기가 아주 높았어요. 그래서 저도 12살이었지만 총을 잡고 무장 시위에 나섰죠”

한국에서 나고 자란 기자가 들었을 때, 12세에 총을 잡고 무장 시위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역사책에서 읽은 “일제 강점기 시절 소년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내용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웅틴툰

"버마에선 사진 찍을 때 원래 웃지 않아요.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거죠. 그리고 남자들의 경우, '사진은 남자답게 찍어야 한다'고 어렸을 때 부터 부모님께 교육 받아요." ⓒ민중의소리



각설하고 88년 대규모 시위로 인해 90년 미얀마에서는 ‘직접선거’가 열린다. 선거는 공정하게 진행됐고 ‘아웅산 수치’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당이 82%를 득표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다. 하지만 군사정부는 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대학교 폐쇄, 아웅산수치 가택연금과 같은 강경 조치가 잇따랐다.

10대 청년 아웅틴툰씨는 대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대학교 자체가 모두 폐쇄됐기 때문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새로운 희망’을 생각하던 아웅틴툰씨는 1993년 대한민국 산업연수생 제도 포스터를 보게 되고, 한국으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웅틴툰씨는 한국을 '선진국'으로 느끼고 있었던 데다가 기술과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한국행을 결심한다. 그는 당시 미얀마에서 공부하던 한국대학생을 찾아가 ㄱ.ㄴ.ㄷ 등 기초적인 한글만 익힌 뒤, 곧바로 ‘산업 연수생’으로 한국으로 향했다.

인간노예 '산업연수생'···그러나 돌아갈 조국이 없다

93년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한 아웅틴툰씨는 모든 것이 절망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동남아시아’인을 보는 시각적 잣대는 “못 사는 애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일했다. 하루에 16시간. 한 달 동안 꼬박 일하고 받는 임금은 3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는 화물 나르는 일을 맡았다. 큰 선박 등에 사용되는 엔진 등을 공장에서 트럭으로 운반하는 일었다. 수백kg짜리 엔진 네 귀퉁이에 위치한 구멍에 철 밧줄을 끼워서 기계를 작동해 외부로 나르고 또 날랐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숙소에서 자고 있는 데 깨워서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일요일 등에 당직을 서는 한국인이 질병 등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을 때 이를 메꾸는 일도 ‘산업연수생’ 몫이었다. 일하다가 다치는 순간은 개중 최악이다. 병원비가 자기 부담이기 때문.

아웅틴툰

아웅틴툰씨 발에 난 수술자국 ⓒ민중의소리



그는 산업 연수생 계약 종료를 앞둔 어느 날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쇳덩어리 엔진을 나르던 기계에 말썽이 생겨 수백kg짜리 엔진이 그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 것. 그는 황급히 피했지만 끝내 오른쪽 발꿈치를 엔진에 찍혔고, 끝내 인대가 끊어졌다. 그가 힘들게 모은 전 재산과 ‘건강’이 모조리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업연수생 비자는 거의 만료가 됐다. 그는 고민했다. ‘미얀마로 돌아갈 것인가. 한국에서 견딜 것인가’ 그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미얀마에 남아 있었다. 그는 고민 끝에 결국 한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산업연수생 당시 고생하면서도 울지 않았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운 적도 없어요. 그런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지나가면 너무 서럽더라고요. 펑펑 울었습니다”

이밖에 미얀마 국내 정치 불안이 계속되는 점도 아웅틴툰씨의 귀국을 가로막았다. 그는 일단 미얀마가 ‘민주화’ 되기 전까지 미얀마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거듭했다.

고민을 마친 아웅틴툰씨는 죽을힘을 다해 한국에서 적응하기로 결심한다. 아웅틴툰씨는 먼저 ‘한글’과 ‘한국어’를 익히는 데 힘을 쏟는다.

남달리 학구열이 강한 그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노동자들에게 한글을 열성적으로 배운 결과 그는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그를 찾는 이주노동자가 줄을 이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은 방글라데시, 네팔, 티벳, 파키스탄, 필리핀인은 줄잡아 20만 명. 이들은 저마다 임금체납, 여권만료, 취업비자, 한국인과의 소통의 어려움 등 다양한 고민거리를 싸안고 있다.

이들에게 아웅틴툰씨는 좋은 창구가 됐다. 그를 찾는 이주노동자들은 늘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상담자 역할을 맡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만들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들은 대체로 당면한 여권문제, 임금체납 문제 등을 우선적으로 고민한다.

그러나 아웅틴툰씨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에게 한국은 ‘임시거주지’ 또는 '적당히 돈벌기 위한 곳'이 아닌 ‘제2고향’이 됐다. 그래서 그는 한국 내의 이주노동자 복지·권리 향상 문제에 관심을 끌게 됐다.

이주노동자 영화제

2010년 제5회 이주노동자 영화제 포스터 ⓒ민중의소리



6년 동안 이주노동자 상담을 해온 그는 구조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에게 권리향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료들과 ‘이주노동자 언론’과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만들기로 뜻을 모은다.

그는 ‘이주노동자 언론’으로 MWTV(이주노동자의 방송)를 만들었다. 영화제는 친구들이 만들었다. 그는 하는 일이 너무 많았던 것. 이후 그는 영화제에 집중한다. 영화제 스텝을 거쳐(2~4회) 2010년과 2011년 영화제에서는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제 운영을 총괄했다.

외국인으로서, 더 정확하게 말해 동남아시아 인으로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준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은 무시와 차별’이 가장 힘들다고 밝혔다.

예를들어 그는 지난해 영화제 장소 대관에서 겪은 ‘설움’을 토로했다. 영화제 행사를 위해서는 ‘장소 대관’이 필수다. 그런데 영화제를 불과 이틀 앞두고 모 지역 시설관리담당이 갑자기 예약이 취소해 버렸다고 한다. 이유는 '갑자기 직원행사가 잡혔다'는 것.

“눈앞이 캄캄했어요. 정말 힘들었죠. 솔직히 조금 화가 나기도 했어요. 저희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렇게 못 했을 거예요. 저희는 한 달 전부터 예약한 거였는데 말이죠... 이런 면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서운해요. 솔직히 한국사람들이 미국·유럽 사람을 대하는 것과 우리(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이 밖에도 그는 다양한 이주노동자들를 상담하면서 수많은 부조리한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농촌에 시집온 베트남 여성들의 사연, 산업재해를 당한 사연, 사장님에게 심한 욕을 듣거나 폭행당한 사연 등이 다.

‘이주 영화제’는 이같은 이주노동자들의 설움에 더해 한국인과 이주노동자들의 공존을 모색한다. 2009년 출품한 영화 ‘반두비’의 경우 이주노동자 남성과 한국 여대생 간의 로맨스를 담았다.

영화제는 햇수를 거듭할수록 좋은 반응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엔 <민중의소리> <경향신문> <서울신문> <연합뉴스> <오마이뉴스> <한겨레> <한겨레21> <한국일보> 등 8개 언론사에서 이주노동자 영화제를 홍보하기도 했다.

꿈에도 그리운 말 ‘민주화’···그래도 한국이 부럽죠

근 20년째 한국 땅에서 ‘적응’을 위해 구슬땀을 흘린 결과 그는 적지 않게 한국생활에 적응했다. 무엇보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와 인터뷰하는 내내 ‘말이 정말 잘 통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 특유의 ‘선·후배 문화’ ‘존댓말 문화’도 자기 것으로 익혀버렸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 소식에 환호를 보내는 지지자들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 소식에 환호를 보내는 지지자들 ⓒNEWSIS=AP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 그이지만, 그의 최종 목표는 역시 “민주화된 미얀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화 역사’를 놓고 보면 한국은 정말 배울 점이 있는 나라예요. 군사정부를 민주화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우리나라도 군사정부만 아니면 자원도 많고, 사람들도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여서 정말 살기 좋은 나라인데...”

그의 말 속에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는 멋 훗날 미얀마로 돌아갈 경우, ‘언론’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을 버마에 가서 써먹어 보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나중에 버마로 돌아가서는 언론 분야나 영화 쪽에서 일하고 싶죠. 그런데 이런 상상이 가능해지려면 버마 민주화가 우선이예요. 민주화가 되지 않는 나라에서 ‘언론자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인터뷰를 마치며 사진을 한 장 찍자고 권했다.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이 남자다워 보였다.

(주:버마의 국호는 1992년 ‘미얀마’로 공식 바뀌었으나,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버마’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김만중 기자 kmj@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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