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잔의 5월

[한겨레 2005-05-30 19:33]  


[한겨레] 지난 5월13일에 우즈베키스탄의 안디잔이라는 -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이름도 모를 - 도시에서 일어났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일을 지켜보았을 때 필자의 눈앞에 두 그림이 겹쳐졌다. 하나는 1980년5월 광주의 모습이었고 또 하나는 1894년 초의 전라도 고부의 모습이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일은 한 나라 안에서도 드문데 하물며 서로 멀고 먼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에서 어찌 그리도 같은 일이 일어날까? 안디잔의 조병갑이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저수지 공사에 대중을 동원시켰는지 필자는 모르지만, 구한말의 조병갑들 못지 않게 죄과 없는 부민(富民)들에게 거액의 몸값을 바치지 않는 경우 하옥시키고 고문하여 반란죄까지 뒤집어씌운 것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확인될 수 있었다. 영어의 몸이 돼 사형을 기다렸던 지역사회의 인기 인물들을 구출하려고 안디잔의 감옥을 습격한 것이 바로 이번 봉기와 학살의 발단이 되었다.
여기에 차이가 하나 있기는 하다. 민심도 무력도 없었던 고종 정권이 전라도에서의 기의(起義)를 독자적으로 진압할 수 없음을 발견하자 청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청일전쟁까지 촉발시키게 되고 결국은 나라가 일본군에 정복당한 뒤에 일본군의 주도하에서 자기 나라의 농민들을 학살했지만, 우즈베크 대통령 카리모프로서는 미·러·중의 “이해”만 받으면 직접 자기 수하의 군대만으로도 민중을 충분히 학살할 수 있었다. 카리모프가 주변의 외세들이 학살에 동조하게 하고 학살을 변호하기 위해서 학살당한 민중들에게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딱지를 붙인 것은, 5월 광주의 “공산·용공 분자”들을 들먹였던 당시 살인마·방조자들을 연상시킨다. 반민중적 농정의 수정과 제도화된 뇌물 갈취의 종식, 그리고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총탄에 맞선 민중들이 “이슬람주의자”라고? “이슬람”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광분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통할 말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어서 국경을 넘어가 몸을 파는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이나 러시아에만 해도 약 3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우즈베키스탄 이주노동자들을 본 사람이라면 그 말을 들은 즉시 카리모프 정권의 실체를 알아차릴 것이다. 민중을 약탈하고 도륙한 것도 모자라 모독까지 하는 집권층을 과연 무어라고 해야 할까? 옛소련이 해체된 후에 스탈린주의 관료배들이 계속 권위주의적 통치를 한다는 차원에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이 친일부역자의 “독점 무대”인 남한과 구조적으로 상통되는 면도 있지만, 이미 목화나 가스·금 등의 자원의 공급자로서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자리를 굳힌 우즈베키스탄에서 “개발 없는 독재”가 전개되는 것은 한국과의 차이이다. 자원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통치자들의 해외계좌에 은닉되고 최소한의 시민권마저 완전히 박탈된 평민이 갈수록 피폐돼가는 것은 주변부 종속 경제·사회의 전형인 우즈베키스탄의 모습이다. 이미 카리모프 도당에 희망을 잃은 데다가 그의 사(私)조직 격인 국가로부터 1000여명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은 대량 학살까지 당한 사람들은 이제 과연 다음의 도살을 기다리면서 논밭과 광산의 노예 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5월의 광주가 끝나지 않은 해방 여정의 시초이었듯이, 2005년5월 안디잔의 붉은 원혼도 혹 우즈베키스탄의 새로운 민중 혁명의 시초는 아닐까. 그러나 카리모프 집단과 이웃의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먼 미국 등 외세의 관계를 보면 우즈베키스탄 국내만의 독자적 혁명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가 이해되기도 한다. 반자본주의적·반권위주의적 저항의 거센 물결이 먼저 이웃의 패권 국가들부터 강타해야 우즈베키스탄 등 주변부 민중들이 흡혈귀들의 멍에를 벗어나기가 쉬울 텐데 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 한겨레(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