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노동자, 위대한 승리 /오도엽

  
오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도 어려운 시절에 이주노동자와 함께 꽃피운 아름다운 연대를. 여전히 ‘노동자’로 불리기보다는 ‘노가다’로 천대받는 건설노동자들이 상처투성이 팔뚝으로 이룬 국적을 넘은 사랑을. 이들을 만나는 내내 참 따사로운 초여름 햇살이 주위에 가득했습니다.  




저는 월급을 받으면 ‘아, 좋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이걸 벌려고 죽도록 일해야 되는 구나’ 하는 한숨부터 나옵니다. 건설 현장은 한여름에는 땀을 서 말을 흘려야 합니다. 한겨울에 망치질을 하다 영하에 꽁꽁 언 손가락을 치기라도 하면 그 아픔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이 고통을 겪어야만 하루살이를 하는 구나’ 돈을 손에 쥐면 기쁨보다 눈물이 앞섭니다. - 건설노동자 황현수 씨




형님들이 그래요. 목수는 못대가리가 안 보일 때까지 망치질 한다고. 어둑어둑할 때까지 망치질을 해야 겨우 하루벌이를 한다는 말이죠. 웬 줄 아세요? 노동자들은 하청의 하청, 그 하청의 하청을 받아 일해요. 단계를 거칠 때마다 뜯길 대로 뜯긴 하도급 단가를 받아 일당을 맞추려면 몸을 혹사해야죠. 남들보다 노동 강도를 높이고, 남들보다 길게 일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 건설노동자 진춘환 씨




삶과 죽음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존재하는 곳이 건설현장입니다. 2008년 한 해 동안 건설 현장에서 재해를 입은 사람은 20,473명이고 이 가운데 숨진 노동자는 669명입니다. 전체 업종 가운데 건설업이 산업재해 사망률 1위입니다. 제조업 산업재해 빈도는 줄어들고 있는데, 건설 현장은 갈수록 늘어만 갑니다. 2007년 비해 건설 현장 산업재해는 7.5%, 사망자 수는 6.2%나 늘었습니다. 그야말로 건설 현장은 삶터가 아닌 죽음의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건설 현장은 매일 위험에 노출되어 일을 하거든요. 현장에 가면 ‘선 안전 후 시공’ 이렇게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선 시공 후 안전’ 이죠. 항상 그렇거든요. 어느 현장이나 가면 안전조회장이 있고 거기에 안전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요. 표지판에 안전보호 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근로자는 산안법 몇 조 몇 항에 의거 벌금 얼마 때린다고 적혀있어요. 근데 거기에 보면 ‘사용자가 노동자한테 안전 장구를 지급하지 않을 때에는 사용자가 처벌받는다’ 그런 말은 쏙 빼고 적어두죠. 지들이 해야 할 의무는 아예 빼버리고, 노동자한테만 알아서 하라며 협박하는 꼴이죠. 안전 장구를 지급하지 않는 회사가 거의 태반이에요. 지급 의무가 있는 회사에서는 주지 않고, 현장에서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만 하니, 노동자들은 ‘무조건 해야 되는 구나’ 생각하고, 어떻게든 옛날에 쓰던 안전모 가지고 나와서 쓰고 자기 돈으로 사서 신던 낡은 안전화 갖고 와서 신고, 뭐 이러는 거죠. 도급팀이나 작업자한테 안전화 안전모 값을 떠넘기는 경우도 있고요. 원래 따로 책정되어서 나오게 되어 있는데 말이죠. 이뿐 만이 아니에요. 제가 처음 건설 현장 일할 때만 해도 일할 때 쓰는 장갑은 회사에서 줬어요. 지금은 회사에서 안 줘요. 옛날에는 못 주머니랑 작업도구도 줬어요. 도급이 되면서 ‘니들 돈 버는데 회사가 왜 사주느냐’ 이런 식으로 나와요. 말이 도급이지 하루 일당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잖아요. - 황현수 씨




국토해양부나 주택공사에서 발주한 공사의 견적 내역에는 안전비용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주를 줄 때 기술보다 안전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점수를 매기는 추세입니다. 공사를 수주한 건설회사는 안전비용을 발주처에서 받아내지만, 목숨 걸고 일하는 당사자에게 이 비용이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건설회사는 다단계 도급 구조를 악용하여 노동자의 인건비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착취하는 셈입니다.




래미안來美安, 휴休, e-편한세상…….




대기업이 건설하는 아파트 브랜드 이름들 보세요. 좋은 것은 다 가져다 붙였어요. 이곳에 살면 삶이 참 안락하고 행복할 것 같잖아요. 하지만 이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은 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고통에 시달려요. - 진춘환 씨




건설노동자는 죽음의 문턱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딛고 서서 자신의 삶에 쉼 없이 못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공사를 수주한 건설회사와 이를 직접 시공하는 노동자 간에 너무도 많은 계단이 놓여 있기 때문이죠. 아파트 공사를 수주를 하면 시공사는 전문 건설회사로, 전문 건설회사는 그 밑에 더 작은 규모의 건설사로 몇 겹의 하청구조를 만들어 놓았어요. 실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일이십 명 규모로 도급팀을 꾸려 일당을 벌어먹고 있어요. 많게는 일곱 단계에서 적게는 다섯 단계를 거쳐야 실제 시공하는 노동자를 만날 수 있는 형편이죠. 단계를 거칠 때마다 인건비는 싹둑싹둑 잘려나가고. 안전 비용은 지들이 다 챙겨 오간데 없이 사라진 거죠.

다단계 하청으로 인건비가 깎일 대로 깎인 도급팀은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주어진 돈에 자신의 몸을 맡긴 꼴이 되었어요. 얼마나 죽도록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최소한의 일당을 건지느냐 못 건지느냐가 결정되는 거죠. 도급이 되는 순간 노동자가 아니에요. 근로기준법도 안전도 목숨도 모두 사라집니다. - 황현수 씨




하루에 열서너 시간 씩 일을 했는데 인건비도 못 건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파트는 번듯하게 세워지고, 높은 분양가에 다 팔려나갔는데도 말입니다.




건설에서 안전 문제를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 일 년에 칠백 명의 사망자가 나와요. 단일 업종으로 가장 높은 사망률이죠. 산업안전관리공단이나 이런데서 굉장히 많은 노력들을 해요. 그런데 죽어라 안전을 강조하고 감독해도 숫자가 안 줄어요. 저는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해요. 현장에 도급이 살아있는 한 줄어들지 않는다고. 도급 때문에 노동 강도가 쎄지고,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데 어떻게 줄겠어요. 도급이 없어지지 않으면 산재는 절대 안 줄어들거든요. 전문가들이도 제 생각과 같아요. 현장에서 만약에 도급을 안 하면 사망사고 당장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작업량에 맞춰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노동력에 맞춰 작업을 하면 중대 사고는 안 난다는 것이죠. 도급으로 인해 너무 센 노동강도에 시달리기 때문에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중대사고가 나는 거예요. 다단계 도급 문제가 일차적으로 해결 안 되면 백 번 노력해도 산재는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죠. 건설노동자는 목숨 걸고 일해야 된다는 말이죠. -진춘환 씨

  

이천구년 유월 첫째 날, 안산역 바로 옆 공영주차장 구석에서 건설노동자를 만났습니다. 검붉게 탄 얼굴을 본 순간, 이들의 밥이 되고 삶이 되는 노동의 고단함을 단박에 읽었습니다.

건설노동자들은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겨울에는 난방이 되는 일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처럼 빨간 날 다 쉬면서 월급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남들보다 많은 임금을 달라하는 것도, 상여금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노동법에 나온, 다른 직장인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지금 당장 다 누리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 일을 시키는 회사에서 나를 고용해 달라는 겁니다. 건설현장의 다단계 하도급은 불법이니, 법대로 직접고용을 하라는 겁니다. 법에 보장된 건설노동자의 당연한 소망은 건설현장에서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작년(2008년) 겨울에 경기도 광명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 한 팀이 들어갔습니다. 물론 하도급이죠. 하도급 단가로 일을 해봤자 일당을 뽑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이 팀이 회사에 직접고용을 하라고 요구했죠. 해고되었고, 한 달 가량 출근투쟁을 해서 다음해 일월 이십사일에 직접 고용을 따냈어요. 다른 하도급 팀들이 직접 고용된 팀이 일하는 걸 보니 부럽거든요. 정말 신나게 일하고 사람대접 받으며 일하거든요. 그 현장에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팀이 있었어요. 이 팀도 ‘하도급 못하겠다. 일을 하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몸만 망가진다. 직접고용을 해 달라!’ 요구를 한 거죠. 그게 사월 칠일이에요. 저도 이주노동자 편에 서서 함께 싸웠죠. 사월 십오일에 출근을 하니까 ‘당신들은 해고’래요. 해고당한 날, 비가 억수로 왔어요. 이주노동자를 포함해 해고당한 사람끼리 어떻게 할 건가 이야기를 해서 다음 날 집회를 했어요.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이주노동자나 한국 노동자나 소나기에 옷 젖는 것은 마찬가지더라고요. - 황현수 씨




이주노동자가 팀으로 조합에 들어와서 투쟁한 건 이게 처음이에요. 며칠 못 버티고 이주노동자들은 포기하고 갈 줄 알았어요. 돈만 벌면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선입견이 있는 거죠. 실제로 같이 싸움을 해보니까 똑같은 목수고 똑같은 건설 노동자였어요. 사십일 넘게 투쟁을 하면서 진짜 그 친구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 친구들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싸울 줄 몰랐다고 이야기를 해요. 어떻든 서로 조합을 믿고 동료를 믿고 싸웠죠. 국적은 달라도 똑같은 노동자라는 믿음의 힘이 이길 수 있게 한 거지요. - 진춘환 씨




한 달이 지난 5월 16일, 처음으로 경기중서부지역 건설노동자들이 모여 연대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날도 첫 집회를 하던 날처럼 비가 왔습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비에 젖으며 집회를 한 건설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버렸습니다.




건설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없어진 게 이주노동자 때문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렇지는 않거든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건설현장에서 저단가로 일을 한다고 욕하잖아요. 이걸 만든 건 이주노동자들이 아니라 내국인들이에요. 하도급 팀들끼리 경쟁을 하여 단가를 낮춰서 물량을 따는 거죠. 단가가 낮아지니 인건비를 줄이려고 이주노동자를 팀에 끼어 넣어 일을 하고요. 이주노동자들이 하도급 팀에서 열서너 시간 씩 일하며 목수 일을 배운 거죠. 일을 좀 배우다 보니까 이주노동자도 팀장도 하고 팀을 만들어 일을 해요. 하도급 구조가 건설 현장에 이주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불러들인 거지, 이주노동자가 저임금을 받겠다고 건설 현장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주노동자 때문에 단가가 낮아진 게 아니라 경쟁을 부추기는 하도급 구조가 단가를 낮춘 거죠. 결국 노동자 임금을 낮춰 건설회사만 이윤을 챙기는 거죠. - 진춘환 씨  




이번에 함께 한 이주노동자 가운데 저보다 나이 어린친구가 네 명 있거든요. 네 명이서 따로 모여서 술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이주노동자들이 내국인한테 형이라는 소리 잘 안 해요. 돌아서면 욕하고 하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서로 욕하는 사이죠. ‘힘들고 그럴 때 우리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어요. 내가 지치면 형이 옆에서 잡아주세요.’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가슴이 찡했어요. ‘벌어 논 거는 없고, 싸우긴 싸워야 되는데…….’ 한숨을 내쉬며 내게 묻더라고요. ‘오월 삼십일 안에는 끝나겠죠?’ ‘어떻게든 그때 안에는 끝나게 하마.’ 내가 말했죠. 그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월 이십오일에 직접고용 합의서를 만들었으니까, 약속을 참 힘들게 지킨 거죠. 사실 마지막에 좀 흔들린 친구도 있었어요. 그래도 자기들 자리 잃지 않고 꾸준히 함께 싸웠어요. 함께 연대해서 싸우다보니 서로 가슴에 쌓였던 불신이 싹 사라졌어요. 이주노동자들한테 제가 배운 거죠. 노동자는 말이 다르고 피부 색깔이 달라도 하나라는 걸. - 황현수 씨

  

경기도 광명시의 삼환까뮤 아파트 건설 현장의 이야기였습니다. 40일 넘게 이주노동자와 아름다운 연대를 한 끝에 이들은 직접고용이 되었습니다. 6월 4일, 도급팀이 아닌 직접고용 노동자로 첫 출근을 합니다. 그 동안 겪은 눈물겨운 숱한 이야기들은 굳이 옮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하루에 서 말씩 흘릴 땀방울이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질 테니까요.




황현수 씨는 군대를 다녀와 스물세 살 적부터 택시 기사를 하다가 스물아홉에 건설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올해 서른아홉의 황현수 씨. 이제 늦깎이 새신랑이 된지 일 년이라고 합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일했던 황현수 씨는 일자리를 찾아 안산으로 왔습니다. 이젠 일을 찾아 떠돌지 않고 아내와 함께 정착을 하고 싶답니다.




이제 소박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건설노동자의 소망을 들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사실 지방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단가를 주면 뭣 하러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겠습니까? 제대로 된 단가를 못 받으니까 떠돌죠. 현장에서 인간적 수모를 겪으면 현장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예이 더러워. 여기 아니면 일할 때가 없나’ 하며 외지로 돌아다니시는 분들도 있고요.

저희 건설노동자들만의 특별한 요구가 있어요. ‘지역주민 우선 고용’이라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다른 업종에 계신 분들은 이해를 못해요. 왜냐면 건설노동자들이 워낙 이동성이 심하잖아요. 자기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소원이에요. 자기 집근처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은 행복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잖아요. 어째든 건설물량은 없어지지 않고 많든 적든 일정물량은 있는 거잖아요. 안산 일은 서울 사람이 와서 하고, 안산 사람들은 용인 가서 하고, 도급 때문에 서로서로 빙빙 도는 거잖아요. 최소한 관급공사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을 일정하게 쓰면 자기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잖아요.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노동자 기술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지역에 있는 사람을 일정하게 사용을 해라! 사십 프로면 사십 프로, 오십 프로면 오십 프로 지역 사람이 고용될 수 있게 하자고 하는데, 다른 분들은 잘 이해를 못하시더라고요. 제한하는 거 아니냐고.

건설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처지 있잖아요. 일 찾아서 떠돌아 다녀야 하는 거. 정말 아픈 상처에요. 그래서 지역주민 우선 고용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정을 꾸렸으니 이제 떠돌고 싶지 않아요. - 황현수 씨




돈보다는 생명이잖아요. 만 원 더 벌려고 하다가 생명을 잃는 곳이 건설 현장이에요. 작년에 철근하시는 노동자가 바닥에 기름칠 된 거를 모르고 작업장을 넘다가 추락했어요. 떨어진 바닥에 철근이 꽂혀 세워져 있었는데 그대로 복부를 관통해서 돌아가셨어요. 철근을 세우면 끝에다 캡을 씌워야 되요. 캡이 씌워져 있으면 추락해도 최소한 복부를 관통해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앰뷸런스가 왔는데 차가 들어갈 공간이 없는 거예요. 타워크레인으로 그 분을 올렸어요. 사람이 짐짝이 되어 자재를 올리는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오는데…….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울대를 심하게 떨며 한참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이게 다 직접고용 되어 노동을 하는 구조가 되지 못하고 하도급을 받아 돈에 목숨을 걸며 일해야 하는 실정 때문입니다. - 황현수 씨  




이번에 함께한 이주노동자 가운데 자기 나라로 들어갈 친구들도 있어요. 안타깝죠. 3년 지나면 가야 되잖아요. 그 친구들이 오래오래 조합에 남아서 함께 일하면 좋을 텐데요. 이들이 다른 이주노동자들도 건설현장에 데려와서 내국인과 이주노동자가 차별 없이 함께 목수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오래도록이요. - 진춘환 씨 (2009.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