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인은 좋은 사람, 아시아인은 무서운 사람?"

[스탑 크랙다운] <5> 방글라데시 출신 '한국 노동자' 아진 씨 이야기

박진우 서울경인이주노동조합 사무차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7-26 오전 6:50:45

    

     

'스탑 크랙다운'이라는 밴드가 있었다. 서울역 앞 가설 무대에서 '스탑, 스탑, 스탑, 크랙다운'(단속 추방 중단)을 경쾌한 펑크 사운드에 실어 외치던 이 밴드의 멤버들은 모두 이주노동자들이었다. 밴드의 보컬로 '단속 추방 중단'을 외치며 인기를 끌었던 미누(미노드목탄) 씨는 자신의 노랫말과 정반대로 지난 2009년, 네팔로 단속 추방 당했다.

88올림픽 이후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각국의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이주노동자 역사는 얼추 25년이 됐다고들 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한국인들의 형, 누나, 부모는 과거에 이주노동자였다. 중국으로, 독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한국인들의 역사까지 합하면 한국의 이주노동 역사는 100년을 훌쩍 넘긴다.

그러나 2013년, 한국 내 이주노동자 현실은 처참하다. 2007년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사로 이주노동자 10명이 사망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지만, 그뿐이었다. 노동 환경은 통제돼 있고, 이를 악용한 '인종·인권 차별'은 전국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언론에 잘 등장하지 않을 뿐이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오히려 '강제 추방'을 실적화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미누'들이 말 못할 통제 속에서 인권 침해에 시달리다 해외로 추방되고 있다.

1993년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한 이후 편법 활용과 인권 침해 문제 등이 야기되면서 고용 허가제가 이를 대체했다. 고용 허가제가 시행된 지, 오는 8월 17일이면 9년이 된다. 연수생 신분으로 각종 불이익을 감내하던 이주노동자들의 신분은 다소 개선됐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파리 목숨이다. 회사를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고, 회사에서 잘리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다. 심지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회사 상황에 따라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현행 고용 허가제의 문제는 무엇이고, 대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과 <프레시안>은 고용 허가제 시행 9년을 되짚는 기획을 마련했다.

공동행동은 민주노총, 서울경인이주노조, 한국이주인권센터,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전국학생행진,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민변 노동위원회, 인권단체연석회의, 아시아의창, 아시아의친구들, 지구인의정류장 등 30여 개 이주, 노동, 사회 단체들이 함께하는 연대체다. <편집자>

고용 허가제 9년
 '일회용 인간'에게 강제 노동시키는 한국…언제까지?
② 이주노동자의 한탄 "노예시장에서 노예 고르듯…"
③ 사장은 "야!개X끼"라 부르고, 맞아도 직장 못 바꾸고
④ 두 캄보디아 여성은 왜 농장에서 도망쳤나

2013년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은 얼마나 될까?

바야흐로 다문화 글로벌 시대라고 불리는 2013년 한국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을까? 출입국관리사무소 6월 통계월보에 따르면 2013년 6월 한국에 있는 체류 이주민은 152만2554명에 달한다(6월 30일 기준). 2003년도에 68만 명에 불과했던 이주민 숫자가 10년 사이에 80만 명 넘게 증가한 것이다. 체류 이주민의 통계를 살펴보면 1순위는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미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순이다.

서울경인이주노동조합에는 주로 비전문취업(E-9) 비자를 가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 E-9 비자를 가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6월 현재 23만8271명에 달한다. 지금까지 기고한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E-9 비자로 들어온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작업장 내 차별과 폭력, 극히 어려운 사업장 변경 과정, 잦은 임금 체불과 퇴직금 미지급 등 다양한 노동권·인권 침해를 겪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들어온 조합원 아진 씨(가명)의 인터뷰를 통해서 실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찾아오는 과정과 한국에서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 그리고 앞으로 한국인에게 바라는 이야기까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 '이주노동자 차별 철폐와 인권 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 행동'이 이주노동자 단속 및 추방 중단,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뉴시스

방글라데시 출신 아진 씨는 어떻게 한국의 이주노동자가 되었나

처음에 가장 궁금했던 건 왜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한국에 일하러 오는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한국도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고 하지만 좀처럼 외국에 일하러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많은 아시아권 나라에서는 첫 취업을 외국에서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진우(서울경인이주노동조합 사무차장) :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뭔가요?

아진 :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한국이 가장 돈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에서 한국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고 봅니다. 현대, 삼성, LG 공장 물건들이 방글라데시에 많이 있어서 "'메이드 인 코리아'면 비싸도 좋아", "기술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가서 한국 돈으로 200만 원 벌어도 물가가 비싸서 (일본에는) 잘 못(안) 갑니다.

박진우 :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어느 정도인가요? 한국과 비교하면 얼마나 받는 건가요?

아진 :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면 평균 한 달에 약 15만-20만 원을 받습니다. 한국에서 일할 때 잔업하고 야근, 특근을 하면 150만 원 정도 벌 수 있습니다.

박진우 : 방글라데시 경제 상황은 어떠한가요? 특히 실업률은 어떠한가요?

아진 : 방글라데시에 일이 많이 없고 사람이 많아서 한국으로 돈 벌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글라데시 실업률은 60%에 달한다고 들었습니다(정부 공식 통계는 4.3%이지만 세계은행은 20%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음 <편집자>). 대학 나온 젊은 사람들이 돈을 못 벌고 있습니다. 한국에 오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싶어 합니다. 우리 가족은 5명인데 제가 이렇게 외국에 와서 돈 벌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듭니다.

박진우 : 방글라데시에서 한국 말고 다른 나라로도 많이 일하러 가나요?

아진 : 순위를 매기자면 1번 사우디아라비아, 2번 중동, 3번 말레이시아, 4번 싱가포르, 5번 유럽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제일 많이 가는 이유는 한국에서보다 조금 벌지만 한국 들어가는 것보다 쉬워서 갑니다. 월급은 60만~70만 원 법니다. 말레이시아에는 공장이 많아서 일자리가 많습니다.

박진우 : 방글라데시에서 한국 들어오는 과정은 어떻습니까?

아진 : 방글라데시 정부에 가서 한국어 시험 신청을 합니다. 시험 신청할 때 한국 돈으로 40만 원 정도 들었습니다. 시험을 볼 때 보통 몇 천 명이 보는데, 한국에서 얼마나 뽑아가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시험 보고 바로 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합격한 사람들이 매우 많을 때는 추첨을 해서 다시 뽑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1000명 뽑는데 3000명이 추첨되면 그중에 한국어 시험을 다시 봐서 100점, 99점 등 점수 순서대로 제조업, 농업, 어업 순으로 갑니다. 추첨을 해서 뽑은 다음에 한국어 시험을 또 봐서 그중에 뽑힌 사람이 메디컬 체크 받고 갑니다. 메디컬 체크는 정부 병원에 가서 한국 돈으로 15만 원 정도 냅니다. 한국 들어와서 또 받습니다. 당뇨병이나 암이나 어떤 문제가 있으면 한국에 오지 못합니다.

박진우 : EPS(고용 허가제) 고용 계약서 서명할 때 제대로 정보를 들었나요?

아진 : 방글라데시말로 계약서가 되어 있어서 근로 조건을 다 확인해볼 수는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에 가서 계약서를 보고 'NO' 하면 다음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니 무조건 'YES' 해야 합니다.

방글라데시 아진 씨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가기

우여곡절 끝에 방글라데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아진 씨에게 가장 힘든 건 안 통하는 언어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해결은커녕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막막함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와 노동조합이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다쳤는데도 산재보험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노동조합에서 보험 처리를 도와줬다. 그는 현재까지도 노동조합의 열성적인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진우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아진 : 2006년도에 다카(방글라데시 수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들어올 때 제 비자는 D-3 비자(산업연수생)였고 이후에 E-9(고용 허가제) 비자로 바꿨습니다. 처음에 일한 곳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니켈 도금 공장이었습니다. 여기서 5개월 일하다가 몸이 아파서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4개월 동안 일이 없어서 먹고살기가 힘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힘든 걸 이때 처음 느꼈습니다. 수중에 1000원밖에 없어서 너무 슬펐습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돈이 없어서 한 시간 동안 그냥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생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방글라데시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2만 원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안산 시화공단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선반 일을 했는데 2008년도에 한국 경제가 많이 어려워서 회사 문을 닫아 어쩔 수 없이 나갔습니다. 세 번째로 간 곳은 김포의 공장인데 역시 선반 일을 했습니다. 여기서 3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고 손가락을 다쳐서 산재보험을 받고 인천으로 공장을 옮겼습니다.

박진우 : 처음 들어와서 직업 교육 받을 때 무슨 내용을 듣나요?

아진 : 제가 들어올 때 들었던 교육 내용에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90도로 인사해라", "한국 문화에 대해 배워라", "공장에서 일할 때 사장님에게는 존댓말 써라", "회사에서 일할 때 안전띠 있어야 되고 안전모 써야 되고 안전벨트 해야 된다" 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박진우 :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한국에 얼마나 들어와 있나요?

아진 :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EPS로 들어온 사람은 7000명 이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2013년 6월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EPS 방글라데시 합법 노동자의 숫자는 7062명, 미등록은 1814명이다 <편집자>). EPS 외에 다른 비자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2000명 정도 있습니다. 다 합치면 1만2000명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진우 : 일하면서 만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요?

아진 : 한국 사람 같이 일하다가 좋아졌어요. 한국 사람이 나쁜 말을 해도 저는 한국말 못하니(못 알아들으니) 괜찮았어요. 한국 사람 좋아요. 지금 나는 한국 친구 많아요. 토요일에 한국 친구랑 같이 만나서 맥주 마시고 치킨 먹어요. 정말 우리 한국 친구들 좋아요.

박진우 : 이주노조를 처음 만난 건 언제인가요?

아진 : 2008년에 김포에서 일하다가 손을 다쳤습니다. 우리 친구랑 같이 이주노조 왔습니다. 이주노조 노무사님 도움 받아서 우리 산재보험 금액 나왔습니다. 저는 계속 이주노조 왔다 갔다 하면서 조합원을 만나게 됐고, 외국인 사람들 문제 있을 때 이주노조에 알려줬습니다. 저는 5년 동안 이주노조에 같이 있었어요. 앞으로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한국에 있을 때까지 외국인 사람 누구라도 이주노조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아진 씨가 한국에 바라는 것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한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아진 씨는 현재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있다. 또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아진 씨에게 마지막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앞으로 본인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물어봤다.

박진우 : 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진 : 제 생각에는 한국에 어떤 사람이 와서 일을 하더라도 '경력 증명서'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한국 들어오기 전에 대학까지 다 나오고 자기 나라에 일이 없어서 한국에 오는 것이거든요. 5년 있다가 자기 나라에 되돌아가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일을 한 것에 대한 증명서가 있으면 돌아가서 경력으로 인정받아서 일할 수 있습니다.

박진우 :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아진 : 앞으로 저는 한국에 살고 싶습니다. 일도 계속 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 친구들 같이 만나서 무슨 일이라도 함께 즐겁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잘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비자에 문제가 생기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 집 돌아다니면서 자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정말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이주노조에서 함께 힘을 더 합칠 수 있을지 고민할 겁니다. 나 말고 다른 이주노동자들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진우 : 마지막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진 : 한국에서 저는 오랫동안 (한국 사람들을) 봤습니다. 외국인 사람 보고 무서워하는 사람 많이 봤습니다. 저는 버스에 타서 (한국 사람과) 같이 앉으려고 하는데, 한국 사람은 다른 데 앉으려고 합니다. 클럽 가도, 노래방에 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 사람도 외국인 사람도 같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외국인 사람 무서워하는 것, 없어졌으면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사람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오해가 사라질 때까지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은, 미국 사람, 유럽 사람들 한국에 와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 한국도 아시아 사람이고 방글라데시, 중국, 베트남, 다 아시아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미국 사람이나 유럽 사람은 좋다고 생각하고 다른 아시아 사람은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 사람도 아시아 사람인데 아시아 아무 (나라)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앞으로 3년, 5년 지나서 그런 생각들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 한국 사람은 좋은 사람 많습니다. 조금 나쁜 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들이 한국에 와서 돈 다 벌어서 가져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한국에 와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월급 받아서 그중에 얼마만 본국에 보내고 한국에서 먹고 자고 친구 만나서 술 한잔하고 다 씁니다. 오히려 "월급 다 나라로 보낸다"고 하면 친구들이 웃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사람 없으면 지금 한국 경제가 많이 힘듭니다. 힘든 일을 한국 젊은 사람들이 잘 안 하려고 하니까 우리 외국 사람들이 와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같은 노동자로 인정하고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방글라데시 친구보다 한국 친구가 더 많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정말 좋아요. 제가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있을 때까지 같이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