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카는 없다…이주노동자가 만드는 방송

[일다 2005-07-12 03:30]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운동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주노동자들이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언론이나 매체 등에서 이들의 활동모습을 잘 비춰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매체 만들기’에 나선 이유가 이것이다. 시민방송 RTV의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Migrant Workers TV)가 만드는 <이주 노동자의 세상>에선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릴 제대로 보여주는 매체가 없었다”



MBC <느낌표>의 ‘아시아, 아시아’에서 이주노동자는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고자 한국 땅에 왔지만 자국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외국인 근로자”였다.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보며 이주노동자에 대해, 친절한 사장님과 종교재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고향이 그리워 눈물짓는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KBS2TV <폭소클럽>의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라는 개그 프로그램 속 블랑카 캐릭터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코너는 약자를 대변한 개그를 표방했지만, 스리랑카에서 온 이주노동자 블랑카는 한국사람들의 일상사를 낯설어 하는 어리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보다 잘 사는 서양의 한 국가의 TV에서 한국인을 그렇게 그린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에서 고생은 좀 하지만, 몇 년간 “바짝” 벌어 자국으로 돌아가면 호강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로 언론에 비춰지기도 했다. 공중파 매체가 보여주는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의 주체이자, 이 사회의 구성원이란 사실을 많은 부분 간과해왔다.


기존 매체에 대한 비평을 통해,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방송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MWTV 활동가 마붑(방글라데시)씨는 매체에 대한 고민의 출발 지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을 제대로 다루는 한국언론이 없었고, 언어와 생김새가 다른 이주노동자들과의 소통에 힘든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주노동자의 생존과 직결되는 고용허가제나 강제단속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국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이주노동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소식들을 알리는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주노동자의 실제 생활과 문화 담아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마붑씨는 명동성당 농성 때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그것이 이주노동자가 직접 발언하는 독립방송을 구상하게 된 계기였다. 2002년 11월엔 하자센터에서 열린 이주노동자의 토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진행됐다.



이어 작년 12월 18일, 시민방송 RTV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말하는 한국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주노동자들의 토론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했는데, 토론회 참가자는 모두 이주노동자이었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인 이병한씨가 제안하여 시민방송 RTV에서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시청자가 매체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으로 <이주노동자의 세상>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세상>이 처음으로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마붑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적적인” 일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의 생활은 단속을 피해야 하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고, 생활을 위해 직장을 다니면서도, 시간을 쪼개어 방송에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 자원활동가들의 도움을 받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넉 달 동안 준비 끝에 4월 16일 <이주 노동자의 세상> 첫 방송을 내보낸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한 달에 한 번,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이주노동자들의 문화공연, 이주노동조합의 상황,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연대한 반전집회 등을 보도했고 이주노동운동에 관한 토론을 진행했다.

마붑씨는 보도라는 형식에 대해 “농성을 계기로 다른 단체들이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많이 보이게 됐지만, 이주노동자의 실제 생활과 문화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하며, “시민들에게 이주노동자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알릴 수 있는 보도 형식으로 방송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 방송을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으로

MRTV는 벌써부터 많은 문제에 봉착해있다. 방송을 준비하던 주엘(방글라데시)씨와 문(방글라데시)씨가 첫 방송을 보지도 못한 채 강제 출국 당했고, 2회 방송이 끝난 뒤에는 유일한 여성 이주노동자였던 최춘화(중국)씨가, 3회 방송이 끝난 뒤인 현재는 사회자 헤미니(네팔)씨와 시디(네팔)씨가 출국을 앞두고 있다.

재정 문제도 만만치 않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시민방송 RTV로부터 1회당 1백만원(세금 포함)을 지원 받고 있지만 방송을 운영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회의비용과 촬영 비용, 편집 비용, 상근자의 생계비 등을 이 자금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마붑씨는 “특히 이주노동자들이 생계 때문에 방송에 전념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새롭게 합류하는 이주노동자들과,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시선들이 있기 때문에 <이주 노동자의 세상>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MWTV는 현재 단체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마붑씨는 “이주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하는 방송은 MWTV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방송도 있지만, 이 방송은 주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MWTV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인원은 총 12명으로, 이들은 앞으로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언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다국어 방송 <이주노동자 뉴스>(가제)로, 각 나라별로 10분씩 시간을 배당해 자국어로 국내 소식과 한국 소식을 전하겠다고 한다.


여성이주노동자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묻자, 마붑씨는 “여성 이주노동자는 남성 이주노동자에 비해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폭력, 구타, 성폭력 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출산휴가 등 복지는 꿈도 꾸지 못한다”며, 여성 이주노동자에 대한 고민을 프로그램으로 풀어낼 수 있도록 기획 중이란 말도 덧붙였다.


명동성당에서 1년 넘게 진행됐던 농성 이후에도 이주노동자들의 활동과 고민은 계속되고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세상>은 매체를 통해 이주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이들의 실제 생활을 적극적으로 알린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들의 어렵고 절박한 상황과 노력이,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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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정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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