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말 타파는 지폰에서 일한 지 7년이 됐다. 그는 이곳에서 이주노동 담당부서를 만들었다. 지폰 로고가 잘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그는 "제가 눈이 작아서"라고 한국식 겸손을 부렸다. 긴 세월 치열하게 운동을 해 와서 강하고 거친 사람일 줄 알았지만 부드럽고 밝은 성격이라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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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에 앉아서 단식농성을 하던 중에 네팔에 가서 어떻게 노동운동을 해야 할지 계속 생각했어요. '잡히면 무조건 추방을 당할 텐데 어차피 추방당해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잡힐 때까지 싸우자' 이렇게 생각을 했고요. 네팔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샤말 타파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2003년 고용허가제 통과 이후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앞 단식 농성을 이끌었고 연행됐다. 이후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도 계속해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어느 날 작전하듯 공항으로 이송되어 네팔로 추방당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일어난 일이다. "3년간 빡시게 일해서 돈 벌어 고향에 가려던" 그의 코리안 드림은 깨졌다. 10년간의 그의 한국생활은 이주노동이라기보다는 이주운동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노조활동을 하던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추방당하곤 한다. 그런데 '끝'이라는 느낌을 주는 '강제추방'이라는 말 때문인지 고국에 돌아간 후 그들의 삶은 곧 우리의 관심 밖으로 멀어진다. 하지만 샤말타파에게 강제추방은 끝이 아니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고 여러 가지 방향으로 그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속적으로 '한국', '이주노동', '노동자'라는 키워드로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샤말 타파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네팔노총 GEFONT(General Federation of Nepalese Trade Unions: 이하 지폰) 사무실에서 만났다. 12회 국제 이주노동자의 날인 12월 18일로부터 며칠 지난, 23일이었다.

강제추방, 새로운 시작

▲  지폰 사무실에서 긴 시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샤말 타파. 말투나 예의차리는 것이나 모두 한국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두세 시간가량 그와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데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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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외국인보호소에 있을 때 갑자기 새벽 2시에 깨우더니 화성보호소로 간다고 차에 태웠어요. 수원쯤 갔는데 직원이 전화를 받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는 거에요. 도착하고 봤더니 인천공항에 있는 수용소였어요. '추방되는구나' 했죠. 직원 세 명과 같이 비행기를 타고 네팔에 도착했어요. 가족들도 나와 있었는데 얼굴도 못 보고 다시 수용소로 들어갔어요. 여권도 못 챙겨온 게 문제가 됐죠. 한국에 있는 집도, 짐도 정리 못하고 왔어요. 돈도 없이 몸만 왔죠."

네팔의 수용소에 수감됐지만 한국에 있을 때부터 관계를 맺어온 네팔의 노총 지폰에서 정부를 압박을 해서 그는 보증금 5000루피(한화 약 7만5000원)를 내고 풀려났다. 몸도 좋지 않았던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우선은 쉬었다. 한 3개월쯤 쉬면서 고민한 그의 결론은 노동운동이었다. 한국에서부터 생각했던 조금 다른, 보다 넓고 지속적인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수도 카트만두로 올라왔다.

"당시 지폰엔 이주노동을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어요. 사실 네팔에는 제대로 된 노동자라는 개념이 별로 없어요. 경제가 너무 취약해서 정규직 노동자도 별로 없고 대부분 비정규직처럼 일하거나 농사짓거나 하죠.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외국에 대부분 있어요. 100개국으로 가서 일을 하고 있는 네팔의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운동이 필요하다고 설득했어요. 그때 그때 잠깐씩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게 저의 그 당시의 목적이었어요"

샤말을 비롯해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경험하고 온 세 사람이 지폰에서 지속적으로 이주노동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주노동 담당 부서를 만들었다. 이주노동자가 나가 있는 여러 나라들의 현지 노조와 네팔 이주노동자들과 관계를 맺어 현지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그 나라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각 나라별로 상황이 다르니 나라별로 초점을 맞춰서 다르게 접근했다. 많은 나라에 방문하기도 하면서 차례차례 일을 해나갔다. 2010년 바레인, 카타르, UAE, 이스라엘, 2011년엔 레바논, 쿠웨이트 등의 나라들에서 성과를 올렸다. 송출국 본국 노조와 연대를 통해 이주노동자 권리 개선 활동을 결심한 한국의 민주노총이 2010년 처음으로 연대협약을 맺은 곳도 바로 네팔의 지폰이다.

"한국에서 만난 여러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각기 사정이 달랐어요. 필리핀 같은 경우는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어 려움을 겪으면 필리핀 정부에서 한국에 항의도 하고 그래요. 그런데 네팔정부는 그런 게 없죠. 한국에서 쿼터 줄일까봐 아무 소리도 못해요."

샤말은 네팔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외에서 일하는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도 제시하고 계속해서 네팔 정부를 압박하고 네팔에서 해외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홍보를 해야 한다고 한다.

최근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사업장 선택권 박탈'도 네팔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서 항의를 했다. 고용허가제는 어디까지나 한국정부와 네팔정부가 상호협정을 맺은 건데 한국정부가 멋대로 규칙을 바꿔서 네팔 노동자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면 네팔 정부가 항의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이 가 있는 국가에선 현지 노조와 연대를 하고 네팔에서는 네팔노총이 정부를 압박해 자국민들을 보호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고, 어느 정도 현실이 됐다.

"이제 지폰에서 이주노동은 메인 이슈 중 하나에요. 제가 빠져도 이주노동 관련 활동은 계속될 거에요. 한국 떠나오고 7년간 활동을 하면서 이거 하나는 제가 확실히 하나 해놨다 할 수 있는 거예요."

한국 떠난 이주노동자들, 어떻게 살까

▲  지난 12월 18일은 제12회 국제이주노동자의 날이었다. 국가 수입의 25% 이상을 이주노동자의 송금에 의존하는 네팔에선 이주노동자 문제가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이 날에 맞춰서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식의 행사가 있었다. 사진은 당일 오전 9시부터 도심지에서 있었던 행진. 행진에서 그는 연신 사람들을 독려하며 힘차게 걸었다. 한국에서 추방된 그가 이곳에서 밝고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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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폰은 월급 못 줘요. 생계는 제가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 처음에는 전화방(PC방처럼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가게)으로 먹고 살았어요. 한국에서 운동하느라 돈 벌어 온 것도 없어요. 한국에서 일하고 온 사람들이 여기서 정착해서 사는 게 의외로 힘들어요. 네팔 사정도 잘 모르고 적응을 잘 못해요."

한국을 다녀온 이주노동자들이 한 밑천 잡아서 잘사는 줄 알았다. 여행 중에 만났던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식당 사장으로, 버스 주인으로, 여행사 사장으로 살고 있는 것을 몇번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렇게 잘 정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 삼아 미국이나 유럽으로 다시 이주노동을 떠나는 경우도 많고, 뭘 할지 몰라서 방황하기도 한다.

여기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또 이주노동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이주노동자 연대센터, 영문 약자로 센미고(SCENEMIGWO, Solidarity CEnter of NEpalese MIGrant Workers)라고 한다. 거의 다 준비가 돼서 창립총회만 하면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 권리 보호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같이 운동했어요. 하지만 돌아와서는 서로 생각들이 조금씩 달라요. 저는 노조운동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죠. 지폰에서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지폰 밖에서 같이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어요."

지폰에서 하는 노조활동이 정책을 내고 정부를 압박하고 네팔과 해외의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활동을 하는 운동이라면 센미고는 이주노동을 가려는 사람과 갔다 온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재정착을 돕고 금전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공정여행과 같이 이주노동국과 연계돼서 할 수 있는 사업 등을 같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한국의 단체들과도 어느 정도 연결이 돼서 준비하고 있는 사업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삶이 안정되다 보면 이주노동자의 권리나 정책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겠냐는 게 샤말의 생각이다.

"한국에서 운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분들이 있어요.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해요. 한국 단체의 후원으로 네팔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고 가난한 여성들을 돕는 도움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냥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화방, 한국어 교육 등을 하던 그의 생업은 이제 협동조합운동이다. 빈곤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기술과 자본이 없어서 끊임없이 악순환을 겪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이 그렇다. 기술을 가르쳐주고 창업자본을 빌려주는 마이크로 크레딧, 에카타 세이빙 앤 크레딧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돈을 지원해주는 엔지오가 없었다. 네팔에서 그런 교육의 경험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때 한국에서 도움이 있었다. 한국에서 쌓은 운동 경험이 연대로 이어진 것이다. 몇몇 단체의 지원을 받는 재봉 교육이 이제 곧 첫 모임을 앞두고 있다.

노동자에서 운동가로... '차별' 때문에 시작한 운동

▲  이주노동자의 날 기념 행진에서 센미고도 배너를 만들어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 배너를 들고 앞에서 행진하는 데이빗씨도 한국에서 15년간 일을 하고 온 이주노동자다. 돌아온 지 오래 되지 않은 그는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경험했고, 네팔에 돌아와서도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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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로 간 한국에서 운동가가 돼 돌아온 샤말. 원래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 가족과의 갈등은 없는지, 어떻게 운동을 시작했는지 물어봤다.

"할아버지, 아버지 다 고르카 용병이셨어요. 근데 똑같은 군대인데 임금이나 연금 등 차별이 있었죠. 아버지가 그 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의 생각도 이해해주셨죠. 저도 원래 고르카에 들어가려고 2번이나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그때 한국으로 돈 벌러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가서 한 3년 '빡시게' 일해서 돈 많이 벌어오자고 생각하고 갔어요"

고르카는 영국이 네팔사람을 뽑아 구성하는 군대, 즉 용병이다. 용맹하기로 소문난 네팔사람들을 훈련시켜 식민지에서, 2차 대전에서, 전후 동남아시아 영국군에서 계속해서 사용한 것이다. 지금도 고르카는 네팔의 젊은 남성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같은 영국 군인임에도 불구하고 임금과 연금 등 차별이 있었고 아버지는 전역 후에 그 차별과 싸우는 활동을 했다. 샤말이 겪은 차별과 비슷한 것이었다.

"IMF가 되니까 일이 확 줄었어요. 집에서 노는 날이 많아져서 신문배달을 시작했어요. 새벽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배달을 하고 출근했는데 비가 많이 오던 날 트럭에 박았어요. 일을 더 할 수 없었고 치료받을 돈도 없는데 마침 한 이주노동자센터의 도움을 받게 됐어요. 거기서 쉬고 있는데 매일 여러 가지 문제를 겪는 이주노동자들이 센터로 찾아왔어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뭔가 해야겠다 싶었죠."

산업연수생 제도의 모순 때문에 불법체류자가 돼야 했던 샤말의 코리안 드림은 IMF와 사고를 겪으면서 무참히 깨졌다. 하지만 그때 만난 이주노동자 센터의 도움,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접하면서 그는 운동을 하게 됐다.

여러 사람들과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운동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그는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하는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이주노조의 전신인 평등노조 활동을 하고 2003년 고용허가제 통과 이후 농성투쟁을 하다가 강제추방을 당한 그의 한국 생활은 한국의 이주노동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 할 만하다.

돈 벌러 간 샤말은 운동가가 돼서 고향에 돌아왔다. 부푼 꿈을 안고서 찾은 한국은 그를 바꿔놓았다. 거의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가 인터뷰 내내 보여준 예의와 말투는 한국인의 그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배낭여행 한 달도 인생을 바꾼다는데 청춘의 10년을 한국에서 보낸 그의 인생은 오죽할까. 인권침해와 차별에서 시작한 그의 운동은 이주노동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노동자의 관점에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하는 운동으로 바뀌어갔다. 

강제추방은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다른 위치에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한국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노동이 국경을 넘었고 그의 삶은 운동이 됐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라'는 누군가의 강령은 아직 먼 얘기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몇 명의 노동자가 죽음을 택했다. 추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국경을 넘는 운동을 하고 있는 그의 삶이 절망의 시대에 하나의 사례가 됐으면 한다. 운동이 국경을 넘으려는 노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