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일 걸린 소피아의 국적 취득 분투기  


[115호] 2009년 12월 01일 (화) 10:05:26 강은나래 (자유 기고가)  



지난해 10월 말 <시사IN> 제58호에 ‘검은 대륙에 버려진 한국의 핏줄’이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가 실렸다. 라이베리아에 남겨진 한국계 아프리카 혼혈 아이들 이야기였다. 달릴라 마타이 씨(27·가명)는 그들 중 한 명인 소피아 양(3·가명)의 엄마로, 기사가 나갈 당시 아이의 친부를 찾아 한국에 와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2004년 스물두 살의 달릴라 씨는 아프리카 시장에 막 진출한 57세 한국인 사업가 김 아무개씨(가명)의 끈질긴 구애 끝에 그와 결혼을 전제로 연인 사이가 됐다. 김씨의 현지 사업을 도맡다시피 했고, 빚보증도 서줬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한 지 3개월이 됐을 때 김씨는 한국으로 떠나 소식을 끊었다. 그 이후로 3년을 기다렸다. “내가 한국에 온 이유는 그에게 죄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다.”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직접 후원 의사를 밝혀온 이도 있었다.

그로부터 14개월이 흐른 11월 중순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환한 얼굴로, 한국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시사IN>은 달릴라 씨의 동의를 얻어 딸 소피아 양의 한국 국적 취득 과정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필자는 그녀의 1년 2개월여 한국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강은나래
한국계 라이베리아 혼혈아 소피아(가운데)가 엄마(왼쪽), 할머니(오른쪽)와 함께 산책하고 있다.
달릴라는 한국에 오기 전에 겨울을 경험한 일이 없다. 사하라 사막 남서쪽, 대서양을 바라보고 앉은 라이베리아는 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다. 그녀는 코끝이 맵고 손등이 터지자 비로소 ‘아, 이게 겨울이구나’ 했다. 주전자에 물을 데우고, 6.6㎡짜리 반지하방에 보일러를 돌렸다. 얼마 후에 얼음이 녹자 봄이 왔고, 풀이 돋았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는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녀는 지난해 9월7일 혼자 한국에 왔다. 라이베리아에서 가나를 거쳐, 두바이를 지나 이틀 걸려 인천공항에 내렸다. 입국은 쉽지 않았다. 라이베리아는 한국과 90일 비자면제 협정을 맺고 있지만, 최근 아프리카 출신 불법 체류자가 늘어 심사가 까다롭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가나 남자 셋은 콘퍼런스 초청장을 보여주고도 입국을 못해 돌아갔다. 그녀는 다행히 공항에 마중 나온 한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이번 여행이 “단순한 여행임”을, “3개월 안에 꼭 돌아갈 것임”을 여러 번 확인한 후에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 ‘사생아인 내 딸이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몇 년이 걸리는 소송도 불사할 마음으로 왔다’는 절절한 설명보다 ‘달러 뭉치’를 한번 보여주는 방법이 입국 심사에는 더 유용했다.

도착하고 보니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아프리카 노동자를 돕는 경기도의 한 교회에서 머물기로 돼 있었으나, 막상 와보니 교회 사정도 썩 좋지 않았다. 한국인 친구가 사는 서울 신촌 고시원에서 며칠 같이 살다가, 대학로에 있는 값싼 게스트 하우스로 옮겼다. 그러다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알게 됐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 상처 물려주기 싫어”

센터에서 운영하는 쉼터에는 중국과 몽골에서 온 여성이 많았다. 달릴라는 “몇 년 공장에서 일하다 출국하고, 또 들어와 몇 년 일하다 나가는 부류가 있었고, 한국인 남편한테 맞아 상습적으로 피난 오는 젊은 여자들도 있었다”라고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그곳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아프리카 이주노동자가 주로 모여 사는 허름한 아파트의 자그마한 반지하방을 얻었다. 보증금 50만원, 월세가 18만원이었다. 닳아서 뚫린 현관문 아래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아파트 전 주민이 세탁기 하나를 공유하는 그런 곳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한 곳에 정착하고 나니, 벌써 10월이었다.

그때부터는 아이 친부인 김씨의 행방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라이베리아 현지에서 그와 알고 지낸 한국인들을 통해 수소문해보기도 하고, 그의 마지막 주소지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를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은 주인이 이미 두 번이나 바뀌어 있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다. 8개월 전 김씨가 사기 혐의로 구속돼 현재 교도소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새로운 아내도 맞이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결혼 경력이 이미 여러 번 있었고 장성한 아들도 있었다. 충격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 상처를 그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악착같이 한국에 왔는데…. 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엄마니까.”

달릴라의 목표는 더 분명해졌다. 첫째, 소피아를 김씨의 자녀로 당당하게 출생신고 하는 것. 둘째, 소피아의 한국인 국적을 인정받는 것.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달릴라는 “기본적으로 부계사회 성격이 강한 라이베리아에서 소피아가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더 나은 국적을 얻으면,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현재 한국과 무비자 협정이 체결돼 있는 나라는 144개국이다. 한국 국적을 가지면 반드시 한국이 아니더라도 미국 등 선진국에서 공부하고 정착할 기회를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김씨와 합의 하에 조용히 일을 진행하거나, 법정 분쟁으로 가거나. 일단 김씨를 만나려면 수감돼 있는 교도소가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다. 라이따이한 소송을 주로 대리한다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김씨의 주민등록번호를 주고 조회를 부탁했다. 그곳에서 흥신소를 통해 하루 만에 정확한 주소지와 근황을 파악했다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수임료 3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포기해야 했다.  

    
ⓒ강은나래
달릴라 씨와 두 돌 즈음의 소피아. 초상권 보호를 위해 사진 일부를 가렸다.
달릴라는 자신의 사연을 영어로 빼곡히 적은 A4용지 5장을 가방에 늘 넣고 다녔다.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기적처럼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도움을 준 곳은 한국이주노동재단이었다. “인지청구(認知請求) 소송을 실제로 하든 안 하든 일단 알고 있는 주소지로 소장을 접수하면 송달·­반송 과정을 거쳐, 피고인의 현 주소지에 대한 사실조회 신청을 법원에 할 수 있다.” 인지(認知)란 혼인 외에 출생한 자녀에 대하여 친아버지나 친어머니가 자기 자식임을 확인하는 일을 뜻하는 법률 용어다.

재단의 도움으로 무료로 소송을 대리해준다는 분을 소개받았다. 공익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렸고, 마침내 11월3일 소장을 접수했다.

하지만 소장을 접수한 지 넉 달이 지나도록 달릴라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은 원래 길고 지루하다.” 법원의 주소지 조회 결과를 기다리느라 지친 달릴라를 담당 변호사는 늘 다독여주었다.

다행히 법원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지인의 도움으로 김씨가 OO구치소에 수감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상보다 빨랐지만, 이미 해를 넘긴 2월 말이었다. 300만원이 있었다면 하루 만에 얻을 수도 있었던 정보를 이렇게 다섯 달 만에 겨우 얻었다.  

가뭄 해갈에 반가운 봄눈이 내리는 3월. 4년 만에 김씨를 다시 만났다. 달릴라가 한국에 온 지 여섯 달 만이었다.

철창 속에서 김씨는 꽤 놀란 모습이었다. 염색을 못해 백발 노인처럼 보였다. 김씨는 곧 차분한 말투로 “한국에 있는 사업을 마무리하고 라이베리아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동업자가 배신하면서 한국에 묶이게 됐다”라고 말했다. “교도소만 나가면 라이베리아로 다시 돌아가겠다”라고 했지만, 하늘색 수의를 입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달릴라는 물었다. “내 딸이 당신 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지만 말해달라.”  

5월18일, 서울 가정법원에서 달릴라와 김씨가 만났다. 그는 순순히 소피아가 자기 핏줄임을 인정했다. 김씨는 소송 없이 가족관계등록부에 딸의 출생신고를 하는 데 동의했고, 국적 취득과 관련된 추후 상황에도 협조하기로 했다.

    
ⓒ강은나래
11월17일 오후 달릴라 씨(위)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서류를 한없이 기다리고, 돈이 없어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이래라 저래라 매번 다른 것을 더 요구하는 한국 공무원들이었다.” 김씨와 합의가 이뤄진 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지만, 행정절차가 만만치 않았다. 인지(認知)신고를 위해서는 달릴라의 미혼 증명 서류와 아이의 현 국적 증명 서류, 부녀의 여권 원본에 대한 번역 공증 서류 등이 필요했다. 서류를 다 준비하는 데 2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서류를 다 갖춘 뒤에도 구청에서는 매번 다른 증거를 더 요구했다. 이례적인 사례라 꽤 꼼꼼히 다루는 듯했다.

한번은 김씨의 위임장과 소송대리인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도 신고서에 김씨의 친필 서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교도소로 서류를 다시 보냈고, 수정된 서류를 들고 다시 찾아갔을 때는 교도관의 서명까지 받아오라고 주문하며 또 서류를 돌려보냈다. 서울 종로구청과 관악구청에 문의를 했는데, 두 군데에서 요구하는 기준이 서로 달랐다. 또 한 달 동안 서류를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고 했다.

9월 중순 서울 목동 출입국관리소에 국적 취득 신청을 하러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감옥에 있는 김씨를 대신해 법정대리인이 동행했지만, 인지자인 아버지가 직접 와야 한다는 말만 듣고 도로 나와야 했다. “출소 후에 인지자가 도망을 치거나, 혹은 사망할 경우에는 국적 취득을 못하게 되는 건가?” 곁에 있던 한국인 친구가 물었다. “당연하다.” 담당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필자가 법무부 국적난민과에 직접 문의한 결과 ‘국적법 제3조에 의해 인지자가 직접 출석해 본인의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인지자가 수감 중에 있다면 위임장을 가지고 변호사가 대리 신청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또 친부가 사망했다 하더라도 가족관계등록부의 내용을 바탕으로 별도 절차를 거쳐 혼혈 아동의 국적 신청이 가능하다.

국적 취득 신청은 김씨가 출소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이루어졌다. 그리고 11월10일, 법무부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소피아의 한국 국적 취득을 공지하는 내용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달릴라는 한국에서 430일을 견뎠다. 국제전화로 가족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엎드려서 소리내 울었다.

매번 다른 것을 더 요구하는 한국 공무원들

달릴라는 그간의 일을 회상하면서 “딸이 그리워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적도 많았다”라고 털어놓았다. 한국 나이로 네 살인 소피아. 말을 배우면서부터 길거리를 지나는 중국 남자만 보면 “파파!(아빠!)”라고 불렀다. 소피아는 사진으로만 아빠를 봤다. 요즘도 전화하면 아빠를 찾는다. “마마 컴?(Mama come, 엄마 와?) 유 브링 파파?(You bring papa, 아빠도 데려와?)” 가슴이 아프지만, 그럴 때마다 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한국에서 가난한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사실 외국 여성이 한국에 와서 자녀의 인지청구 소송을 하는 경우 생활비가 큰 문제다. 달릴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항공사에서 근무했다. 모국어인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울엔 공장에 일이 없어. 한국에서 사는 건 너무 힘들어. 기다리는 일도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올 초 한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달릴라는 이렇게 적었다.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냉장고 부품 조립 공장에서 주 5일간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밤새워 일했다. 시간당 3800원에 야근 수당(1.5배)이 붙어 5700원을 받았다. 그렇게 받는 하루 일당 6만8400원 중 20%는 중개업자가 떼어갔다.

그나마 몇 달 전에 영어 과외 자리를 하나 얻어서 귀국행 비행기 삯을 댈 수 있었다. 흑인이라 구하기 힘들었는데 사정을 아는 한국 사람이 구해줬다. 그녀는 “한국인들은 미국 흑인의 유창한 영어보다 유럽 백인의 엉터리 영어에 더 감탄을 하더라”며 뼈있는 농담을 했다.

달릴라는 딸아이가 좀 크면 한국에 1~2년 정도 유학 보낼 생각이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다. 유학비도 만만치 않겠지만, 걱정은 따로 있다. “나는 한국 지하철에서 흑인 혼혈아를 단 한 번도 못 만났다. 분명히 있을 텐데 보이지 않는다. 아직 한국이 ‘특별한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10년 정도 후면 (그런 인식도) 많이 바뀌지 않겠느냐”라며 웃어 보였다.

11월17일 오후 6시, 출국을 앞둔 달릴라의 모습은 밝았다. 그녀는 “밤새 짐을 싸느라 잠을 못 자 무척 피곤하다”라면서도 “곧 딸을 만난다”라며 흥분했다.

달릴라는 말했다. “이곳에서 일만 하고 쫓겨나는 아프리카인도 많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좋은 한국인을 많이 만났고, 늘 도움을 받았다. 관심을 보내준 모든 이에게 고맙다. 딸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겠다.” 달릴라는 한국 시간으로 11월18일 오후 6시에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았다. 그녀의 딸 소피아는 앞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한국 이름을 가지고 살게 된다.

현재 라이베리아에는 한국계 혼혈 아동 10여 명이 살고 있다. 접경국인 가나의 경우 수도 아크라를 근거지로 80명 이상 한국계 혼혈아가 있다고 추정된다.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 전역에 얼마나 많은 한국계 혼혈 아동이 방치돼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