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노동 닫힌 희망 [2009.11.13 제785호]  

[표지이야기-노동OTL 제3부 마석 가구공장]
마석가구공단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한 한 달
짓누르는 합판, 목을 막는 먼지, 살을 파고드는 타카 핀보다 더 두려운 건 단속


▣ 전종휘  


» 노동OTL

열악한 작업 조건과 저임금 때문에 한국 노동자는 거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노동의 세계가 있다. 더 이상 이곳에서 꿈을 품지 않는다. 자욱한 먼지와 소음, 화공약품의 진한 내음 속에서 한국인 노동력을 대체하는 이들은 바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코리안드림’의 꿈을 키우며 하루하루 노동력을 파는 그들의 최대 고민은 산업재해도, 임금 체불도 아닌 한국 정부의 단속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실상 ‘감금 노동’을 사회적으로 강제당하고 있다. 고된 노동의 시간조차 빼앗길까 두려움에 떨며 일해야 하는 아이러니의 공간은 바로 경기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 ‘노동 OTL’ 기획의 세 번째 무대다. 이곳의 한 공장에 취업하자마자 기자는 근력의 한계에 고개를 떨궜다. 뒤이어 “이대로 노동하게 해달라”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 맺힌 절규에 ‘OTL’했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제1부 안산 난로공장

① 작업 라인의 노예
② 4천원의 삶과 행복
③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2부 서울 갈빗집과 인천 감자탕집

① 언제나 젖은 앞치마
② 몰락 가장의 부인과 올드미스
③ 사장님, 손님, 남편님


제3부 마석 가구공장

① 톱밥 더미에 감금된 꿈
② 콘테이너
③ 금의환향

    

» 갇힌 노동 닫힌 희망.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일하러 왔어요? 잘됐네. 한국 사람들은 여기 통 안 오려고 하는데…. 그런데 운전면허는 있수?”

“예.”

“그거 잘됐네.”

30대 중·후반의 공장장은 나를 처음 보고는 반가워했다. 그 반가움이 낯설었다. 한국 사람이라서 반갑고 쌔고 쌘 운전면허를 갖고 있다고 반가워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7일 저녁 무렵 찾은 경기 남양주시 마석가구공단의 한 가구공장. 조금 뒤 만난 사장에게 “나를 고용해달라”고 했다. 사장은 예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는지, 내일부터 일할 수 있는지 물어보더니 월급 130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공장을 둘러보니 한국인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가 섞여서 일하고 있다. 물건을 만들면 트럭에 싣고 배달도 나가야 하는데, 모두 미신고 신분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운전면허를 갖고 있을 리가 없다. 나머지 한국인 노동자들은 운반·배달 등 단순한 일에 투입하기엔 아까운 숙련공들이다. 낯선 반가움의 실체다.

우리 공장은 가구 중에서도 모텔이나 호텔, 여관 등 숙박업소에 들어가는 물건을 납품한다. 의자와 테이블, 장식장, 침대 밑받침 등을 주로 만든다. 외국인 노동자 4명과 한국인 8명가량이 함께 땀을 쏟는다. 다른 공장에 견주면 한국인 비율이 꽤 높은 편이다. 그 길로 달려가 공장 인근에 보증금 4만원에 16만원짜리 조그마한 방을 얻었다.


1. 굳게 닫힌 공장문


이상한 일이었다. 공장문은 내가 처음 두드렸을 때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심지어 잠겼다. 공장 안에 들어가보니 먼지가 자욱했다.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런데 공장 사람들은 아예 안에서 쇠빗장을 걸어놓았다. 바깥에서는 쇠문을 용접기로 떼어내지 않는 한 들어올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취직 전 일자리를 찾으러 이틀 정도 공단을 배회하던 때가 떠올랐다. 이 공단 대부분의 공장 문은 닫혀 있었다. 어떤 곳은 아예 밖에서 자물통을 채운 곳도 많다. 언뜻 보면, 폐업한 공장 분위기다.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구멍 검색대’


우리 공장에서는 바깥에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누군가 달려가 1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으로 신원을 확인한 뒤 문을 열어준다. 점심·저녁 밥을 배달하는 식당 아저씨도, 가구 재료를 배달하러 온 아저씨도 모두 ‘구멍 검색대’를 통과해야 공장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문 가까운 곳에서 일을 많이 한 나도 외부인 신원 확인 작업을 자주 해야 했다.

그 까닭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경찰과 함께 공단 입구를 포위한 채 공장들을 뒤져 110여 명을 마구잡이로 잡아간 적이 있다. 얼마 전에는 10월12일부터 두 달 동안 미등록 외국인을 집중 단속하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지난해 단속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기억하고 있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의 눈에는 이미 공포가 가득하다. 우리 공장 도장반에서 일하는 필리핀 출신 마리아(46) 누나와 방글라데시 출신 피우롱(35)은 물론 목수간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출롱(30)과 페드로(38)까지 4명 모두 ‘미등록’이다. 이들 모두 가명이다. 언제 단속반원들이 들이닥쳐 끌고 갈지 모르는데 실명을 쓸 수 없다. 단속당하면 ‘코리안드림’도 끝이다. 공장 안에서 일하면서도 마음의 절반은 공장 바깥 상황에 나가 있는 까닭이다.

문이 잘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출롱과 페드로는 일하는 동안에도 수시로 쇠빗장에 눈을 흘긴다. 누군가 화장실을 다녀오다 깜빡 잠그는 걸 잊기라도 하면, 바삐 놀리던 손을 멈추고 잽싸게 달려가 문을 잠근다. 일하면서 지나가다가도 내게 “문단속 잘해, 형”이라는 부탁을 수시로 한다. 사나흘 간격으로 마석 시내는 물론 인근 월산리 등에서 단속이 벌어져 두세 명씩 잡혀갔다는 소식이 마리아 누나 등의 입을 통해 공장 안에 전해지곤 했다. 출롱은 “단속 걱정에 일에 집중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문 계속 봐야 하고 집에 가서도 불편하다”는 그는 “내일 또 어떡해야 하는지 그 생각만 난다”고 푸념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한국인 직원들도 적극 협조할 수밖에 없다.


양복 입은 사내 등장에 비상 걸린 공장    

» 굳게 닫힌 공장문. 일러스트레이션 마영신


법무부가 발표한 문제의 10월12일 오후였다. 공장 사람 모두가 긴장 속에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문 근처에서 조만간 출고할 창문 문짝에 창을 다는 일에 한창 몰두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구멍으로 내다보니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있었다. “양복 입은 사람이 바깥에 찾아왔어요”라는 내 속삭임에 같이 일하던 50대 남자 직원은 기다리라고 하더니 출롱과 페드로를 데리고 도장반 안쪽 깊숙한 곳으로 갔다. 도망을 위한 준비 조처였다. 알고 보니 그 양복쟁이는 업무 협의차 온 사람이었고, 출롱과 페드로는 다시 목수간으로 나와 일을 이어갔다. 2층에 있는 물건을 지상으로 내릴 때 쓰는 곤돌라 앞에서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전깃줄 사이로 거미집이 보인다. 거미가 먹이 포획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다. 서울보다 훨씬 찬 바람이 분다. 마음도 춥다.

다음날, 배달돼온 점심을 몇 분 만에 후다닥 먹어치운 뒤 50여 분 남은 휴식 시간을 즐기던 때다. 출롱이 말했다. “형, 그거 알아? 이명박 대통령 되기 전에 여기 마석에 왔었어. 그때 우리 불법 사람 문제 ‘휴머니즘’으로 푼다고 했어. 그런데 되고 나서는 안 그래. 다 거짓말이야.” 이후 만난 다른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들도 모두 이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가 집권한 이후 단속이 훨씬 강화됐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구가 만들어지기까지


가구 만드는 공정은 이렇다. 설계된 각 부분에 맞는 두께의 합판을 크기에 맞춰 자른 뒤 목공용 본드를 바른다. 그리고 압축공기를 이용해 얇은 못을 박는 ‘타카’로 고정한다. 이런 조립 과정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일부분을 하고 나면 가지런히 쌓아올려 그 무게를 이용해 비틀림을 막고 반나절쯤 뒤 추가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시간을 두고 대여섯 차례는 사람의 손길을 거친다. 여기까지가 내가 속한 ‘목수간’의 일이다. 이후 ‘도장반’에서 형태가 만들어진 가구에 도색을 한다. 도색도 한 번 칠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사포로 곱게 문지른 뒤 또 칠하고, 마르면 또 사포질을 한다. 대여섯 차례 해야 고운 색상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최종 조립을 거친다. 창문의 경우는 도색 작업 뒤 경첩과 문 닫을 때 쓰는 자석 등을 전동드릴로 제 위치에 고정하고 창틀에 고정한다.



2. 곶감보다 무서운 합판


공장에서 내가 맡은 일은 딱히 없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므로 나는 그때그때 다른 작업자가 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공정도 모르고 작업을 해본 경험도 없는 나는 그야말로 ‘시다바리’였다. 다른 사람 일하는 데 거치적거리지 않는 게 우선적인 임무다.

첫날부터 근력 부족에 ‘악’ 소리가 났다. 준비되지 않은 몸은 벅찬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나무로 만든 가구들은 엄청 무겁다. 그걸 만드는 과정에서 계속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야 한다. 특히 원재료에 해당하는 합판을 나를 때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합판이 아니라 MDF(Medium-density Fiberboard)라고 부르는 ‘중밀도 섬유판’이다. 합판은 나무를 결대로 얇게 자른 뒤 다시 접착제로 붙여 만든다. MDF는 아예 나무에서 섬유질만 뽑아낸 뒤 접착제와 섞어 높은 온도에서 압착해 만든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가구 대부분은 이 MDF로 만든다. 가격도 싸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어쨌건, 편의상 합판이라고 부른다. 우리 공장은 두께에 따라 2mm짜리부터 30mm짜리까지 대략 11가지 합판을 쓴다. 두께는 다르지만 면적은 똑같다. 가로·세로가 122cm·244cm다. 한 평(3.3㎡)에 조금 모자라는 2.97㎡ 크기다.


공장에는 하루에 한두 번씩 거래업체의 트럭이 합판을 잔뜩 싣고 온다. 얇은 건 서너 장씩, 두꺼운 건 한 장씩 공장 안쪽 벽까지 공장 직원들이 들어서 날라야 한다. 무게도 무게거니와 휘청거리는 합판을 나르기는 쉽지 않다. 이 단순한 일에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무게를 받치는 오른손으로 합판 가운데 아랫부분을 잘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걷는 도중 합판이 옆으로 돈다. 동시에 오른쪽 손목이 고통 속에 비틀린다. 영화 <싸움의 기술>의 한 대목이 머리를 스친다. “싸움에 쓰는 근육은 따로 있다”던 백윤식의 대사가 “일에 쓰는 근육은 따로 있다”는 환청으로 귀에 꽂혔다.

더구나 원재료인 합판은 다른 작업 도구나 가구에 부딪혀 흠집이 나면 안 된다. 그 부분은 못 쓴다. 무게를 버티기도 힘든데 주변까지 살피려니 죽을 맛이다. 어쩔 수 없이 합판을 들고 여기저기 부딪히는 신참에게 다른 직원들은 “조심하라”고 핀잔을 여러 차례 줬다. 며칠 뒤에는 4.2mm짜리 합판 3장을 한 번에 쥐고 나르다 급기야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합판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도장반 3명과 목수간의 40대 여성 한 명을 빼고는, 합판만 들어오면 모두가 동원됐다. 이 일에 이력이 났을 법한 출롱과 페드로도 “합판 나르는 게 가장 힘들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3. 합판보다 무서운 단속


“형, 우리 ‘불법 사람’ 일하기 힘들어. 그래도 괜찮아. 단속 걱정이 제일 커. 단속만 없으면 우리 괜찮아.” 우리 공장은 물론 내가 공장 인근에 얻은 자취방 주변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의 호소는 한결같다.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대략 600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70% 이상이 미등록 체류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공장의 피우롱이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99년 초여름께다. 여행비자로 왔다. 한 소파공장 도장반이 그의 첫 근무지였다. 2004년 지금의 공장에 오기 전 마석가구공단에 대규모 단속이 벌어졌다. 단속 때문에 출근을 미루고 집에 있는데 단속반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는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밖에서 ‘문 열어, 문 열어’ 그랬어. 무서워서 정신없었어. 나 뛰어내렸어.” 허리와 팔이 아팠다. 하지만 달렸다. 잡히면 끝장이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식구들한테 돈을 부쳐야 한다.


“아파도 병원에 못 가, ‘불법 사람’이잖아요”


그 뒤 병원에서 추락으로 다친 오른쪽 팔과 허리 수술을 받았다. 520만원의 치료비가 나왔다. 한국 직원들과 달리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닌 그에게 병원은 수술비와 입원비를 액면가대로 청구했다. 함께 공단에서 일하는 피우롱의 친형과 친구들이 도와줬다. 그 뒤로도 물건을 잡거나 상처 부위를 만지면 팔이 아팠다. 다시 수술을 받았다. 여전히 그의 팔은 성치 않다. 팔뚝을 만져보니 여전히 딱딱한 무언가가 잡힌다. 의사는 그에게 “시간 있을 때 와서 수술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 들어 단속이 강화된데다 토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연장근무를 하는 그는 병원에 갈 수 없다.

  

» 피우롱이 도장이 마른 침대 받침대 표면에 샌딩 작업을 하고 있다. 이때도 많은 페인트 먼지가 발생한다. 류우종 기자


“형, 생각해봐요. 아파도 낮에는 병원에 못 가. 우리 ‘불법 사람’이잖아요. 지금 날씨 추워요. 신발이랑 옷 사러 (시내에) 나가고 싶어도 못 가요. 잡혀가잖아요.”

더구나 한 달쯤 전에 신장결석을 앓던 피우롱의 친구는 남양주시 교문리에 있는 한 병원에 들른 뒤 공단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다 단속됐다. 그러고는 곧장 방글라데시행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졌다. 피우롱이 단속에 대해 갖는 공포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해도 마석 시내까지 나가야 국제우편을 부칠 수 있다. 단속이 없다면….

필리핀 출신 마리아 누나도 단속 걱정에 가위눌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1991년 한국에 처음 와 서울의 가죽공장에서 일하다 1994년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늘 “나 단속당하면 어떡하지? 필리핀에 있는 애들한테 돈 보내줘야 하는데 어떡하지?”라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리아 누나는 이 공단에 온 뒤 단 한 번도 남양주시를 벗어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단속 걱정 때문이다. 그 기간이 무려 15년이다. 그는 사실상의 감금 상태에 놓여 있다.


내 옆방에 사는 몽골 친구는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등록 외국인이었는데 날마다 방문을 바깥에서 잠그고 출근했다. 단속 때문에 바깥 출입을 삼가는 미등록 신분의 부인을 방 안에 항상 가둔 채였다. 단속이 나오더라도 쉽게 방문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그러다 화재라도 나면 부인은 꼼짝없이 타죽을 테니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는 “어,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여긴 3층이라 창문으로 뛰어내려도 죽을 텐데…”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의 방문엔 자물통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일찌감치 인력 수입국이 된 선진국들은 일정 기간 이상 제 나라에 머문 미신고 외국인들을 사면해 영주권을 주기도 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73년부터 8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미신고 외국인들에게 사면을 실시했고, 독일도 5년 이상 체류한 미신고 외국인 가운데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판단되면 한정적 영주권을 줬다. 지금까지 20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인력 수입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사면을 한 적이 없다. 대신 신고하지 않아도 단속은 자발적으로 나온다. 가차 없다. 모진 나라다.

더구나 단속 자체가 선택적이라는 점에서는 반인간적인 악취까지 난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미등록 외국인 수가 조금 는다 싶으면 단속을 하고, 많이 줄었다 싶으면 그냥 놔둔다. ‘수요 관리’를 하는 셈이다. 경찰과 법무부가 마음먹으면 수색영장과 긴급보호서를 발급받아 마석가구공단은 물론 안산과 포천의 미등록 외국인 대부분을 잡아가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공단 사람들이 반발하고 국내 가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4. 톱밥 먼지가 사람을 호흡하다


일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놀란 건 공장 안이 ‘톱밥 먼지 구덩이’라는 점이다. 주재료인 합판을 자르면서 생긴 미세한 톱밥 먼지는 공장 여기저기 가득 쌓여 있다. 물건을 내려놓을 때마다 톱밥 먼지는 여기저기서 ‘훅’ 하고 피어오른다. 순간 숨이 컥컥 막힌다. 큰 환풍기가 계속 돌았지만, 전기톱에서 튀어나오는 톱밥 먼지의 일부만 밖으로 배출할 뿐이다. 전기톱 근처에서 작업하다 보면 사람이 먼지를 마시는 건지, 먼지가 사람을 호흡하는 건지 모를 정도다. 합판을 나르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라도 툭 건드리면, 그야말로 비처럼 톱밥 먼지가 쏟아져내린다.

도장반 사정은 더 심각하다. 도색이 마르면 사포질을 하는데, 일일이 손으로 밀기 힘드니 진동하는 기계에 사포를 매단 ‘샌딩기’로 문지른다. 굳은 페인트 가루가 사방에 튄다. 마리아 누나가 주로 하는 일이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사포질을 맡는다. 별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탓이다.


여기에 시너와 공업용 알코올까지 가세한다. 이 휘발성 강한 물질에 페인트를 섞은 뒤 공기압축기에 연결된 통에 넣고 스프레이처럼 분사한다. 작업을 할 때면 마치 안개가 낀 듯 실내가 뿌옇다. 도장반에 들어갈 때마다 페인트와 시너 냄새가 코를 찌른다. 분사 작업은 50대 한국인 도장반장의 몫이다. 피우롱은 도장반에서 사포질과 도장작업을 모두 한다. 한국에 온 지 10년 된 그는 이 공장에만 5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는 “샌더기 문지르다 보면 가슴과 팔이 가장 아프다”며 “도장반에 있으면 눈도 많이 따갑다”고 말했다.


안전장치는 약국에서 산 마스크가 전부


공장 사람들은 커피를 하루에 네댓 잔씩 마신다. 아침 8시30분에 일을 시작하기 전, 2시간 뒤 ‘커피타임’ 때, 점심 식사 뒤, 오후 3시30분께 ‘커피타임’ 때가 기본이다. 오후 6시에 끝나는 낮근무 뒤 야근하는 날이면 한두 잔 더 마신다. 톱밥 먼지와 화공약품 때문이다. 일하다 보면 톱밥 먼지에 목이 칼칼해지는데 커피를 진하게 타서 마시고 나면 한결 개운해진다. 공장에서 가장 어린 민성(25·가명)이가 설명해줬다. “돼지고기나 커피가 먼지 제거에 좋다고 해서 커피를 많이 마셔요. 일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단 게 많이 당기기도 하고요.” 공장 한쪽에 놓인 100개들이 인스턴트 커피 한 봉지가 이틀을 넘기기 힘들다.

    
» 환풍기는 늘 열심히 돌지만 공장의 톱밥 먼지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석의 공기가 상쾌하다고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그럼에도 안전장치는 일반 약국에서 살 수 있는 마스크가 전부다. 도장반은 조금 두툼한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데, 별 구실은 하지 못한다는 게 일치된 목소리다. 술을 한 잔도 하지 못하는 도장반장도 “하루 종일 술에 취한 것 같다”고 말한다. 대부분 지은 지 수십 년 된데다 무허가인 공단 안 공장들의 사정은 얼추 비슷하다고 한다.

소음까지 여기에 가세한다. 목수간은 늘 전기톱날 도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고음역의 합판 자르는 소리도 그렇지만 빈 톱날이 돌 때 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귀가 먹먹하다.



5. “야근만 안 해도 좀 살겠다”


우리 공장은 월요일을 빼고는 화·수·목·금요일에 밤 9시30분까지 야근을 한다. 근무가 오후 1시에 끝나는 토요일에도 5시까지 꼬박꼬박 연장근무를 한다. 계속 서서 일하며 무거운 가구를 날라야 하는 특성상 야근이 끝날 때가 되면 발바닥이 망치로 세게 후려친 듯 얼얼하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나서 라이터로 발바닥을 꾹꾹 눌러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발목도 많이 쑤신다. “야근만 안 해도 좀 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공장 안의 어느 누구도 “오늘 야근하려느냐”고 묻지 않는다. 평일엔 오후 6시께 저녁밥이 배달돼오면 “오늘도 야근하는구나” 했고, 토요일에도 낮 12시30분께 점심 밥상이 공장 작업대 위에 차려지면 “오늘도 연장근무구나” 생각했다. 공단에서 그런 거 물어보는 공장은 없다. 다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중요한 약속이 있거나 하면 얘기하고 일찍 들어가기도 한다.

야근이 몸에 밴데다 자기 표현에도 서투른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냥 공장장의 시책을 따를 뿐이다. 모두 공단 안에 숙소가 있는 그들은 아예 별다른 약속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페드로 형에게 “형, 야근 너무 많이 해서 힘들지 않아?”라고 물었더니 형은 “집에 가도 할 일이 없잖아. 차라리 돈 버는 게 나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친 그의 표정을 보고 조금 전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만든 가구를 모텔까지 싣고 가 방에 설치해주는 현장 일을 공장에서는 ‘현장 세팅’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나가게 되면 노동시간은 한정없이 길어지기도 한다. 10월16일에는 서울 서초동의 ㅇ호텔 현장 세팅에 나갔다. 이날 밤 11시가 돼서야 일이 끝났다. 마석의 숙소로 돌아가니 밤 12시 언저리였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 시간은 어김없이 아침 8시30분이다.

실제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의 임선일 연구위원이 지난 8월 마석 지역 외국인 노동자 15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노동실태 조사 결과도 그들은 장시간 노동을 보여준다. ‘일주일에 몇 시간을 노동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니, 평균 66.56시간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주일에 무려 110시간 일했다는 응답도 있었다. 일주일 평균 근무일수는 6.26일에 달했다. 4명 중에 1명은 일요일에도 일하고 있는 셈이다.


6. 동일노동 차별임금


10월22일 야근 시작 무렵 월급이 나왔다. 원래 월급일은 10일인데 12일 늦게 나왔다. 요즘 월급이 제 날짜에 안 나오는 때가 많다고 직원들은 불평했다. 하지만 다른 공장들이 툭하면 몇 달씩 월급을 못 주는 데 비하면 우리 공장은 양반이라고 했다. 어떤 공장의 사장은 돈이 생기면 한국인 직원에게는 밀린 월급을 주고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기다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모두 봉투에 담긴 현찰을 받았다. 본봉이 150만원인 방글라데시 노동자 3명은 모두 19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았다. 한 달의 절반 이상을 밤 9시30분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야근하며 육체를 혹사한 대가치고는 많은 게 아니다.


한국인과 20만~100만원 본봉 차이


특히 한국인 노동자들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비슷한 경력의 한국인은 그들보다 최소한 20만∼100만원 이상 본봉이 많다. 야근수당 단가도 본봉에 비례하므로 총액으로 따지면 차이는 훨씬 벌어진다. 같은 일을 14년째 하고 있는 마리아 누나의 본봉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신참인 나와 똑같은 130만원이라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공장일을 시작한 지 1년 된 민성이도 본봉이 140만원이다.

열악한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구조는 마석가구공단에 일반화한 현상이다. 인근 신발공장에서 플라스틱 사출 일을 4년째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출신 필로이(34·가명)는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30분까지 일하는 야근조를 1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그의 월급은 130만원이다. 한 소파공장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는 필리핀 출신 네이선(45)은 125만원의 본봉을 받고 있다.

임선일 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마석가구공단 외국인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168만원가량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근무기간은 7.5년이었다. 임 연구위원은 “마석공단에 한국인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으면서 가구 제조 기술이 주로 이주노동자들에게 전수됐고 그렇게 기술을 익힌 숙련공들의 급여가 168만원”이라며 “비슷한 수준의 한국인 숙련공이라면 220만원가량은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차이만큼은 이들이 합법적 비자를 갖고 있지 않은 데 따라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이라고 봐야 할까?

월급이 적다고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이 한국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월급을 받은 다음날 야근을 마친 뒤 공장 직원들끼리 공단 밖 치킨가게로 몰려갔을 때의 일이다. 공장에서 남들보다 2배는 빨리 걷고 일을 빨리 해 나를 놀라게 한 공장장이 말했다. “예전 공장에서 출롱과 함께 일할 때만 해도 출롱이 가구틀 1개를 짤 때 나는 2개를 짰는데, 지금은 뒤바뀌었어. 이 외국인 친구들 없으면 일하기 힘들어.” 술김에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었다. 민성이도 언젠가 “출롱 형 정도 실력이면 다른 공장에 가서 공장장을 할 수도 있는데 외국인이라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7. 타카의 치명적 매력    

» 타카의 치명적 매력. 일러스트레이션 마영신

공정의 모든 과정이 사람 손으로 이뤄지는데다 공장에 위험한 도구가 널려 있다 보니 다치기 쉽다. 가장 위험한 게 전기톱인데, 이를 주로 다루는 재단사들에게는 대개 20만원 안팎의 위험수당까지 준다. 재단사들은 늘 합판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양쪽 손으로 합판을 누른 채 톱날 사이로 밀어 자른다. 까딱하다가는 손가락을 비롯한 신체에 부상을 입기 십상이다.

그 다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바로 ‘타카’다. 잘 모르는 이를 위해 쉽게 설명하자면, 공기압축기의 힘을 이용해 스테이플러를 박는 기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총신이 짧은 권총처럼 생긴 도구의 방아쇠를 당기면 핀이 발사된다. 물론 ㄷ자형으로 생긴 핀도 쓰지만, 대개 1자형을 많이 쓴다. 합판과 합판을 연결할 때 그 사이에 본드칠을 한 뒤 두세 번 핀을 박아주면 본드가 굳을 때까지 변형을 막아준다. 핀의 길이는 20∼30mm짜리를 주로 쓴다.


사건이 터진 건 10월20일이었다. 오전에는 조만간 출고할 물건 포장 작업을 했다. 하얀 발포지와 스카치테이프로 물건의 주요 부분을 감싸기만 하면 된다. 조금씩 일이 손에 붙는 느낌이 들던 때다. 처음엔 과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늘어지던 근육도 조금씩 팽팽해지고 있었다. 초반에는 민성이가 내가 공구를 잘 다룬다며 “공고 나오셨어요?”라고 물어 어깨가 우쭐한 적도 있었다.

오후 들어 모텔에 들어가는 침대 받침 조립 작업에 투입됐다. 길쭉한 합판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연결해 접합 부분에 본드칠을 한 뒤 타카로 고정하는 작업이다. 똑같이 생긴 걸 수십 개는 만들어야 한다. “타카가 없었다면 일일이 작은 못을 망치로 박아야 할 텐데, 간단하게 총구를 정확한 위치에 대고 방아쇠만 당기면 얇은 못이 박히다니…. 아마 20세기에 등장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며 새삼 속으로 감탄하고 있던 때다.


엄지 손가락에 파고든 타카 핀


왼손으로 타카를 바꿔잡고 작업을 하던 도중 총구가 살짝 비껴나면서 내 오른손을 향하던 찰나, 어리석은 왼손 검지가 ‘어머나’ 하면서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순간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망치로 때린 듯한 멍한 느낌이 들었다. 눈동자를 굴려 엄지손가락을 보니 손톱 옆에 타카 핀이 박혀 있었다. 길이 25mm짜리 핀 가운데 6∼7mm만 남기고 나머지 몸체는 신기하게도 내 엄지손가락 속으로 숨어버렸다. 함께 일하던 민성이가 소리쳤다. “공장장님, 이것 보세요.” 공장장이 니퍼를 들고 달려왔다. 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라고 했다. 그가 니퍼로 타카 핀을 쑥 뽑아냈다. 민성이가 “세균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며 상처 부위를 눌러 피를 계속 뽑아냈다. 그러고는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하나 붙여줬다. 그걸로 끝이었다.

몰려든 공장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나처럼 당했던 사례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누구는 길이 40mm짜리가 박힌 적도 있다고 했다. 누구는 또 박힌 타카 핀을 뽑으러 병원에 갔더니 의사도 결국 니퍼 들고 그걸 빼더라고 말했다. 가구공장에서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출롱이 슬며시 내게 다가와 자신도 대여섯 번은 당했다며 “형, 오늘 밤 아플 거야. 슈퍼 가서 타이레놀 사먹어”라고 말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그날 밤 결국 야근에서 빠졌다. 밤이 되자 엄지손가락은 퉁퉁 부어올랐다. 다음날 공장을 결근한 채 마석 시내 병원에 가서 파상풍 주사를 맞고 항생제를 타왔다.


그 다음날 공장장은 “처음에는 핀이 잘 안 빠지다가 두 번째 힘껏 당기니 빠지더라”며 “핀이 뼈에 박혔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힘이 들어갈 때면 엄지가 아리다. 호된 신고식을 치르면서 나도 공장 사람이 돼간다는 뿌듯함도 가슴 한켠에선 일었다.

내 엄지손가락을 걱정하는 출롱에게 병원에서 진료비와 주사값으로 1만500원을 냈다고 하자 자신은 같은 경우에 2만5천원 이상 내야 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너네는 정말 아프면 안 되겠다”고 하자 그가 “형, 우리도 사람인데 어떻게 아프지 않아”라고 내게 물었다. 그의 말이 옳다.



8. 현장 세팅


공장에서 문을 잠그고 계속 일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구를 싣고 현장 세팅에 나갈 일이 생긴다. 처음에는 출롱이 현장 세팅에 나가는 걸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뒤 나도 세 번 정도 현장 세팅을 나갔다. 서초동 ㅇ호텔, 태릉 쪽 ㅌ모텔에 이어 마지막으로 건국대 근처 ㅈ여관 세팅을 나갔을 때다. 토요일이었다. 이날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4명의 직원이 침대 받침대와 작은 소파, 의자 등 수십 개를 3층에서 5층까지 좁은 계단을 통해 방까지 옮겼다. 엘리베이터도 없다. 가구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각종 애크러배틱한 자세로 움직여야 한다. 체력이 이미 바닥을 드러낼 때쯤 이번엔 다른 공장에서 사온 침대 매트리스를 날라야 했다. 두 명이 매트리스 한 개를 붙잡고 5층까지 나르는데, 반층은 들어 나르고, 계단 꺾이는 부분에서는 매트리스를 윗쪽 계단을 향해 밀어 넘어뜨리는 방식으로 옮겼다. 매트리스는 길고 넓어 좁은 모퉁이를 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팔도 허리도 너무 아파 같이 일한 동료에게 “이건 일이 아니라 형벌”이라고 절규했다. 차라리 공장에서 합판을 나르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울증인가, 이 느낌은


나중에 공장을 그만둔 뒤 하루는 밤 10시가 넘어 페드로 형에게 전화를 했다. 평상시 같으면 야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쉴 시간인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에 간식을 먹고 늦게 잔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페드로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미안해, 어제 세팅을 나갔는데 너무 힘들어서 집에 오자마자 잤어”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단속만 없으면 일할 만하다고 했다.


공장 생활 일주일 정도 뒤부터는 야근이 끝난 뒤 피곤에 전 내 몸을 질질 끌고 숙소로 돌아오면 소주 1병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살짝 우울증이 찾아오는 느낌도 들었다. 혼자 사는 탓인가 싶었다. 돌아보니, 불안과 공포를 잔뜩 머금은 ‘미등록’ 동료들의 눈망울이 내 동공에 꽂아놓은 병인 듯도 싶다.



국내 체류 외국인 노동자 실태

하루 11~12시간 노동, 1주 6일 잔업… 평균임금 130만원대


» 외국인 노동자 하루 평균 노동시간/ 일주일 평균 잔업 횟수

  
국내에 체류하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서는 근래 정확한 조사가 이뤄진 적이 거의 없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가 지난 8월 이주노동자 46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으나, 모두 고용허가제를 통해 입국한 등록 노동자들이었다. 법무부는 2008년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등록 외국인 노동자가 약 65만여 명, 미등록 노동자가 20만여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가 지난 4월 경남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들의 대체적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조사 대상에서 등록 대 미등록 외국인의 비율은 대략 6 대 4라는 게 상담소 쪽의 설명이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을 묻는 질문에 ‘11∼12시간 일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은 47%를 차지했다. 내가 일한 마석 가구공장도 평일 기준으로 따지면 노동시간은 11시간 남짓 된다. 상담소 조사에서 그 다음으로 많이 차지한 하루 노동시간은 9∼10시간(19.75%)이었다. 하루 13시간 이상 일한다는 노동자도 7.75%에 달했다.

일주일 평균 잔업 횟수를 묻는 질문에도 ‘6일’이라는 응답이 23%로 가장 많았다. 휴일인 일요일을 빼고는 항상 야근이나 연장근로를 1시간 이상 한다는 얘기다. 17.5%가 ‘5일’이라고 응답해 두 번째를 차지했는데, 월요일과 일요일을 빼고 5일 동안 야근을 하는 우리 공장이 이에 속한다.

작업장 유해 요인 및 조건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내 주관적 경험과 거의 일치했다. 5점으로 갈수록 ‘매우 심각’에 가까운 1~5점 척도로 조사했는데, 5점에 가장 가까운 게 ‘분진’이었다. 평균 3.06점을 얻었다. 두번째가 ‘반복적으로 무거운 물건 들기’(2.80점)였고, ‘소음’이 2.78점으로 그 뒤를 이었다. ‘화학물질’과 ‘불편한 자세로 오랫동안 일하기’는 각각 2.58점이었다. 나는 처음엔 무거운 물건 들기가 가장 힘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적응이 된 반면, 분진은 공장을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평균 임금은 132만8천원이었다. 190만원대에 이르는 우리 공장의 10년차 방글라데시 외국인 노동자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이는 조사 대상의 60% 가량을 차지하는 고용허가제 입국 노동자들의 경우 오래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에 비해 숙련도가 낮고, 여성 노동자도 다수 포함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공장에서도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외국인들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월세 16만원에 구한 3평 옥탑방

옆방 부부 속삭임까지 다 들려


공장에 일자리를 얻은 다음에 꺼야 할 급한 불은 방을 구하는 일이었다. 공장 사람을 통해 소개받은 집주인은 2층에 있는 방 월세는 20만원, 3층 방은 16만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첫달엔 보증금조로 4만원을 더 내라”고 했다. 돈 4만원 아끼려 3층 방을 달라고 했다. 월급 130만원짜리 노동자에게 4만원은 큰돈이라고 생각했다.

주인이 안내한 3층 방은 옥상 위에 놓인 조립식 주택 안에 있었다. 3평 남짓 크기의 방 안을 들여다보니 ‘딱 16만원어치만큼만 구실을 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정면에는 개수대가 놓여 있고 그 옆에 기름보일러가 떡하니 위용을 자랑했다. 오른쪽 벽에는 손바닥만 한 화장실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그 앞에 작은 옷장과 서랍장이 벽에 붙어 있다. 보일러는 두 가지 이유로 샤워할 때 빼고는 가동하지 않았다. 틀면 매캐한 매연 냄새가 나는데다 “기름이 떨어지면 무조건 10만원어치씩 넣어야 한다”는 주인의 말도 안 되는 협박 때문이다.


먼지가 쌓인 개수대 위 창문틀에 바퀴벌레 한 마리가 죽어 붙어 있는 방을 가리키며 집주인은 “이래 봬도 청소하면 쓸 만하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중국 불법 체류자가 여기 살았는데 단속돼 사라져버렸다”는 집주인의 말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전 사용자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보일러 위에는 쓰던 전기밥통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걸레질을 두 번이나 한 뒤 드러눕자마자 화장실 벽에서 동그랗게 생긴 이상한 걸 발견했다. 자석이다. 사방의 벽에다 붙여봤다. 철썩 달라붙었다. 천장에 대니 역시 마찬가지다. 쇠로 지은 집이라니…, 당혹스러웠다. 여름엔 얼마나 햇볕에 달궈질지, 겨울엔 또 얼마나 찬공기를 방 안으로 전달할지 짐작이 된다.

벽은 어찌나 얇은지 옆방에 사는 중국 동포 부부의 얘기 소리가 다 들렸다. 심지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라는 휴대전화 알림음까지 또렷하게 전해진다. 애초부터 어느 정도 사생활은 접고 들어가야겠다는 판단이 든다. 방들의 구조는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5개씩 늘어선 형태다.

내 이웃은 물론 외국인들이었다.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다들 아침에는 8시나 8시30분까지 공장에 출근하고, 야근을 끝내고 밤에 돌아오니 당연한 일이다.


그 와중에도 한 이웃을 사귀는 데 성공했다.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한국에 돈 벌러온 지 13년 된 로미(34·가명)다. 그의 방은 내 방처럼 휑하지 않았다. 내 방에 있는 휴대용 버너와 코펠 대신 가스레인지와 식기가 놓여 있는가 하면 내 방 서랍장 위에 상온 보관 중인 술병들은 그의 집에선 시원한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텔레비전까지 쌩쌩하게 나왔다. 50만원을 주고 산 접시 안테나 덕에 그는 방글라데시 채널을 9개나 보고 있다. 술 마시러 몇 번 놀러갔는데 그 나라도 신종 플루가 유행인지 우리나라에서도 잘 팔리고 있는 손 씻는 세제 광고가 전파를 자주 탔다.

지난해 12월 마석 취재 때 한 공장 기숙사에서 만나 얘기를 들었던 몽골 친구가 내 옆의 옆 방에 산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사하라사막에서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의 방도 내 방과 똑같은 구조인데, 더블침대를 두는 바람에 방바닥에서 발 디딜 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함께 사는 부인 때문이다.

이곳 마석가구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집이 다 이렇다. 공장에 딸린 기숙사도 비슷하다. 단속에 대한 불안감을 감싸줄 편안한 집이 그들에게는 없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