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자 대책 ‘거꾸로 가는 세계화’


2009 11/03   위클리경향 848호


ㆍ한국생활 18년 버마 출신 ‘미누’ 강제추방 위기… 다국적 노동자밴드 결성 문화운동


2008년 9월 ‘아시아가 함께하는 우리 생의 최고의 순간’ 문화축제에서 스탑크랙다운 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왼쪽부터 소모뚜, 미누, 소띠하.

“오늘은 나의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

다국적 노동자 밴드인 스탑크랙다운(Stop Crack-Down)의 ‘월급날’이란 노래의 가사다. 지난 2003년 4명의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밴드는 이주노동자의 인권, 특히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생존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밴드 이름도 강제추방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스탑크랙다운이라고 지었다. 그들은 노래를 통해 정부엔 강제추방 반대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주노동자들에겐 위로를 건넸다.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았다. 그러나 이제 도움을 주기보다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보컬리스트인 미누(37)가 표적 단속을 통해 잡혀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소띠하(35)는 귀화한국인이다. 그가 한국인이 되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1998년 12월 그는 다른 이주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고향인 버마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관광비자로 입국한 그가 취직할 수 있었던 곳은 플라스틱 사출공장밖에 없었다. 2년 동안 네 차례 이직을 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월급을 제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임금 체불은 물론 욕설과 구타도 당했다”면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가장 기본적이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정부 강경조치 부작용 속출
2003년에 정부가 고용허가제 도입을 결정하고 시행에 앞서 대대적으로 이주노동자 단속에 나섰다. 이에 항의하는 농성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소띠하도 서울 정동 성공회대성당에서 텐트 농성에 참여했다. 이곳에서의 농성은 소띠하에게 훗날 한국인이 되는 계기가 된다. 스탑크랙다운 멤버인 미누와 한국인 아내 우선주씨(26)를 만났기 때문이다.

무조건 구호만 외치는 투쟁이 아니라 노래로 의견을 표현하자는 미누의 제안에 스탑크랙다운이 결성됐다. 2주 만에 노래를 만들고 농성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아내 우씨는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여서 음악성은 떨어졌지만 그 마음과 메시지는 어느 노래보다 뛰어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4년에 소띠하는 우씨와 결혼했다. 그 순간부터 소띠하는 불법체류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결국 귀화에 이르렀다. 소띠하는 “미누는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잘 알고, 다른 이를 도왔다”면서 “그에게 부족한 것은 합법이라는 도장 하나뿐”이라고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소띠하의 말처럼 미누는 법적 근거만 없었을 뿐 다른 어떤 이주노동자보다 한국인에 가까웠다. 1992년 15일짜리 관광비자로 입국한 미누는 다른 이주노동자와는 달리 스스로 음지 밖으로 나왔다. 1999년 한국방송 외국인 예능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문화부장관 감사패를 받았다. 스탑크랙다운을 결성해 자신을 비롯한 20만명이 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인권콘서트, 각종 행사, 다큐멘터리 제작 등에 참여했다. 이주노동자방송(MWTV)의 공동대표로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사이의 정서적 간극을 좁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미누 자신을 겨눈 단속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10월7일 오전 집 앞에서 잠복하고 있던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에 의해 불법체류자(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단속돼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됐다. 법무부는 “미누가 불법체류자로 살면서 문화 활동을 했다지만 실정법 위반이 분명하다”고 정당성을 밝혔다. 그들에게 미누는 그저 한 명의 범법자일 뿐이었다.

법무부에 따르면 2009년 9월 현재 국내 거주 외국인은 114만9493명. 이 가운데 불법체류자는 18만280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5.4% 줄어든 수치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불법체류자는 한국에서 사라져 가는 추세다. 불법체류율은 낮아지고 강제퇴거 등 강경한 조치는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그 수치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경한 태도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이명박 대통령은 법무부 업무보고에서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즉시 ‘불법체류자 감소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대책단을 구성, 전국 16개 출입국관리소에 단속 인원을 할당하는 등 대대적인 단속을 펼쳤다. 또 국가경쟁력강화회의에서 법무부·경찰·노동부 등이 매년 상·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합동단속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한 방침은 3만여 명의 이주노동자를 강제 퇴거했고, 18년 차 반(半)한국인 미누까지 본국 추방으로 몰았다.

무차별 단속에 인권침해 논란
이처럼 강경한 정부의 태도로 인해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법무부가 노철래 국회의원(친박연대)에게 낸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올해 8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과정에서 3명이 숨지고 24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 발생뿐 아니라 이들에 대한 후속 치료도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예로 지난해 9월 부천에서 버마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포된 이후 가슴 통증을 호소했지만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아 구금된 지 13시간 만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정영섭 사무처장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악질 범죄자 다루듯 단속하고 비인권적으로 처우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소모뚜는 스탑크랙다운의 기타리스트다. 10월23일 가수 강산에의 인권콘서트에 초대받았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소모뚜의 삶에 가장 즐거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르다. 이번 무대는 미누 석방을 위한 투쟁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소모뚜는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마음이 무겁고 화가 난다”고 말했다. 소모뚜의 말에 따르면 미누는 돈보다는 한국 사회와 이주노동자들의 변화를 꿈꿨다. 미누는 월수입 200만원이 넘는 미싱 기술자였다. 그러나 노동시간이 길어 이주노동자를 위한 문화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정된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고 문화 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미누를 옆에서 지켜본 소모뚜에 따르면 미누는 언제나 희생을 자처했다. 소모뚜는 “미누는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현장에 달려가 싸웠고 그들의 친구가 됐다”면서 “대통령 앞에서든 이주노동자 앞에서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인권과 화합을 노래했다”고 말했다. 미누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친구’이자 한국사회로 통하는 ‘통로’였다. 소모뚜는 미누를 구급차에 비유하며 미누의 석방을 호소했다.
“구급차는 신호를 위반해도 되잖아요. 왜냐면 생명을 구하기 때문이죠. 미누 형도 마찬가집니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수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생명을 구해요. 그게 노래든 인권활동이든. 미누 형은 이주노동자들의 구급차입니다. 꼭 석방돼야 해요.”




<임석빈 인턴기자 zomby0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