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제노포비아 기승… 무역·금융이어 `노동장벽`까지

외국인 근로자 대상 범죄·고용반대 시위 급증
英·스페인·대만 등 '자국인 先고용' 정책 잇따라

  



글로벌 경기침체로 각국에서 무역과 금융 보호주의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지구촌 곳곳에서 이주 근로자들에 대한 '제노포비아(xenophobia · 외국인 혐오증)' 현상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실직 공포에 빠진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쏟아낼 대상으로 외국인 이민자들을 지목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져야 할 일자리와 이익을 빼앗아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킨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상원이 통과시킨 금융권 외국인 고용제한 조치 등 각국 정부의 '일자리 보호주의'도 결국 그 밑바닥엔 자국민들이 갖고 있는 제노포비아 심리를 무마시켜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외국인 대상 범죄 기승

유럽에선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지난해부터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작년에 독일에서 인종차별주의 극우단체들이 벌인 범죄 행위는 전년보다 30%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러시아의 경우 2008년 한햇동안 '스킨헤드족(머리를 완전히 밀고 다니며 극단적인 제노포비아를 드러내는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122명이 목숨을 잃고 부상자도 380여명에 달했다.

이탈리아에선 지난 1일 인도 출신의 30대 일용직 이주 근로자가 16세 소년을 비롯한 청년 3명에게 화염 테러를 당해 중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나라 안팎으로 제노포비아 논란에 휩싸였다.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4일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이같이 부끄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범죄가 다신 일어나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일부 극우 정치인들은 아예 대놓고 인종차별주의적인 발언을 던지며 대중들의 제노포비아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극우 정당인 '이스라엘 베이테누(우리의 조국 이스라엘)'의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당수가 대표적 인물이다. 리베르만은 "이스라엘 내 아랍 주민들은 결국 하마스와 한패"라며 "유대인 국가에 대한 충성서약을 하지 않으면 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파시즘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베이테누당이 10일 열릴 총선에서 제3당 자리에 오를 것으로 전망되면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높아지는 노동장벽


이 같은 제노포비아 심리를 등에 업고 세계 각국의 노동장벽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 은행들의 외국인 고용제한 법안을 발의했던 찰스 그래슬리 공화당 상원의원은 지난 2일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CEO)에게 서한을 보내 "MS가 비슷한 능력을 갖춘 미국인 직원 대신 외국인 파견근로자를 계속 고용할지 우려된다"며 "외국인부터 먼저 정리해고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2006년까지 10여년간 이어진 부동산 호황으로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을 건설 현장에 투입시켰던 스페인은 최근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자 이주 근로자들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꿔버렸다. 스페인 정부는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자국 근로자들의 요구로 지난해 9월부터 '앞으로 3년 안엔 스페인에 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이민 근로자들에게 일시불로 4만달러의 실업수당을 주고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지난달 30일부터 수천명의 에너지산업 근로자들이 외국인 고용에 반대하는 대규모 파업 시위를 벌여 곤욕을 치렀던 영국은 결국 정부가 시위대 요구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밝히면서 시위 발생 5일 만에 겨우 끝났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유럽연합(EU)의 외국인 근로자 관련 규정에서 혹시 고용주들에게 너무 편파적으로 유리한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영국은 앞서 지난해 12월 이주 근로자의 학력 나이 기술력 등을 점수화한 새로운 점수 이민제를 도입,외국인 이민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노동장벽 구축은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아예 일부 산업에서 외국인의 취업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최근 외국인 근로자를 대만 근로자로 교체하는 기업에 1인당 월 1만대만달러(39만원)를 보조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이주노동 분야 담당 연구원인 패트릭 타란은 "이주노동자들은 대개 가장 나중에 고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당한다"며 "이들이 경제위기의 희생양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린이푸 세계은행 부총재는 "선진국 노동시장 위축으로 이주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개발도상국의 주요 자금원인 대외송금이 크게 줄어 개도국 경제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