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천만원 사기 당해도 신고 못해 ‘속앓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강제출국 될까 전전긍긍
법보호 못받는 규정 탓…좀도둑·범죄까지 늘어
황춘화 기자 노현웅 기자  

새해 첫날 오후 서울 구로3동의 한 찜질방에서 중국동포 신아무개(46)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의사를 꿈꾸며 중국에서 의과대학을 다니는 딸과,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게 소원이었던 아내를 남긴 채였다.

사망 원인은 협심증으로 인한 심근경색이었다. 하지만 신씨와 신씨의 가족을 ‘절망’으로 밀어넣은 사건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씨는 1997년 남들처럼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들어와 10년 동안 목욕탕과 찜질방에서 ‘때밀이’로 일했다. 고향에 생활비를 보내고도 한 달에 70여만원씩 꼬박꼬박 저축해 모은 돈이 8천만원이나 됐다. 조금만 더 일하면 곧 대학에 들어갈 딸의 학비도 해결하고 중국에서 기반을 잡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신씨의 꿈은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3년 전 “큰 목욕탕을 지을 계획인데, 투자를 하면 ‘때밀이’ 사업권을 보장하겠다”는 지인의 권유에 그간 모은 8천만원을 건넨 게 화근이었다. 그가 사라진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경찰서에 들어서는 순간, ‘불법체류자’인 신씨가 강제출국을 당하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일을 그만두고 그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맸고, 아내는 딸의 학비 마련을 위해 한국에 들어와 일을 했다. 이때 받은 충격과 오랜 거리생활로 신씨에겐 협심증이 생겼다. 그의 형(57)은 “경찰의 도움만 받을 수 있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진 않았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신씨가 사기를 당하고도 경찰의 도움을 받지 못한 이유는 출입국관리법 규정 때문이다. 출입국관리법 84조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인지한 모든 공무원에게 출입국사무소에 바로 통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셈이다.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 관계자는 “최근에는 이런 사정이 많이 알려져,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집단거주지에 좀도둑과 범죄가 늘고 있다”며 “강제 출국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이들을 2차 피해에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인권단체 등에서는 인권침해에 대한 구제절차가 진행 중일 경우 통보 의무를 유예하는 방안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 방침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임금체불 등 권리침해를 당한 경우 먼저 구제조처하고, 해결 뒤에 출입국사무소에 통보하는 노동부 지침이 지난해 6월 폐지됐다. 이 사이 이주노동자 임금체불은 갑절 늘었다. 2007년 8월 체불액은 1639명 48억여원에서 2008년 8월 3877명, 95억여원으로 각각 2배 가까이 늘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2월18일 “출입국관리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통보의무 조항 때문에 범죄행위, 인권침해행위를 당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권리구제가 어렵다”며 ‘선구제 후통보’ 원칙을 출입국관리법에 명시하는 등 통보의무제도를 개선할 것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이영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사무처장은 “실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내국인들에게 신체적·물질적인 피해를 당해도 신고조차 못하는 실정”이라며 “최소한의 법적 권리구제수단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인권적 요청”이라고 말했다.

황춘화 노현웅 기자 sflow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