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은 신혼여행때를 포함하면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공항입구에서 반겨주는 야자수들은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연착한 관계로 헐레벌떡 들어선 유세장에는 제주도 당원들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아마 관찰자의 눈에는 긴장한 상태로 앉아계셨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이용대 선배님과 문성현 선배님, 그리고 이용길 선배님, 예의 그 부드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조승수 후보님, 모두 반가왔습니다. 늘 살가운 동지인 이해삼후보가 넉넉한 표정으로 저에게 옆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일반명부 후보들부터 유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다행스럽게도 5번째였습니다. 다른 분들의 유세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인지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해삼후보와 김정진후보의 유세는 그 주제가 명료했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합니다.

이해삼후보는 비정규직 철폐운동본부장인 만큼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삼 후보의 본부장 활동을 보면서 늘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기도 한데 이해삼 동지의 주장은 너무 무난합니다. 당이 비정규직 투쟁에서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결정적 시기에 결정적 역할, 확고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지난 1년간의 비정규직 투쟁을 돌이킬 때 축구에 비유하자면 골결정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패스와 드리볼은 잘하는데 골을 못넣으면 경기를 이기기는 힘들죠.

불파투쟁의 봉화가 올랐던 1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남선동지가 분신을 했습니다. 그 때 민주노동당은 불파투쟁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류기혁 열사때는 열사라는 칭호조차 당이 쓰질 못했습니다. 오늘 유세에서도 제가 민주노동당은 의인들의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만 당은 비정규직 운동에서 누구편에 서야할 지 망설였고, 비겁하게 일관했습니다. 정규직 집행부의 눈치를 보느라 호연지기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김정진후보는 부유세 입안에 참여했던 경험을 말하며 당이 생산해낸 정책적 자산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당의 정체성 혼란을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저는 부유세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실제 유세과정에서도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유세가 끝나고 젊지만 맘이 넉넉한 김정진 동지가 부유세가 사민주의 정책이라 사회주의자가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껄껄댔지만 사실 제가 부유세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많이 소유한 것도 사회정의에 어긋나기에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이 순수하게 노고와 희생을 통해 축적할 수 있는 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상의 부는 행운(특정한 시기 운 좋게 마땅한 역량을 갖고 있거나, 특정한 고급정보, 또는 말 그대로 투기적 행운)이거나 상속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부유세는 정당합니다.

문제는 당이 부유세와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연결시키는 태도입니다. 부유세를 통해 거두어드린 돈이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부유세를 통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현 체제에서 무상의료를 실현하려면 연간 17조 정도의 돈이 더 필요합니다. 현 체제에서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려면 50조 이상의 돈이 필요합니다. 부유세로 거두어들인 11조 가지고는 턱도 없는 액수입니다. 사적의료체제와 사학체제를 공적인 체제로 바꾸면 돈은 훨씬 적게 들겠지만 이마저도 부유세로 거두어들이는 돈 가지고는 어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부유세를 당간부들이 좋아했을까요? 그건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평등연대에서 주관한 총선후보 워크숍 토론회에서 확인됩니다. 그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제일 관심을 보인 시간은 재정학자이신 경기대 이재은교수님의 강의였습니다. 참가자들의 일부는 세금 몇%만 더 내면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해결된다 뭐 이런 구호 만들 수 없냐는 질의를 했습니다. 이재은 교수님은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1, 2%로 말하고 싶겠지만 50%이상 더 내야 한다.” 이건 당연한 결론입니다. 대한민국 조세부담율이 중앙정부 기준으로 19% 정도인데 OECD 가입국은 평균 35%이상입니다. 당연히 현행보다 세금을 50% 더 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에게 세금을 걷어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할 수 있다는 구호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사실은 진실이 아니지만 말이죠. 대중들에게 좋은 소리만 하려고 하는 “대중정치”의 산물이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요? 사민주의 사회에서 부유세는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제도이며 재정위기에 빠진 사회복지시스템을 보완하는 좋은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스웨덴에서 90년대 중반 재정위기를 이러한 방법으로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안전망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 이상으로 힘든 대한민국에서 부유세로 사회복지라는 논리는 과장이고 대중추수적인 구호입니다.

저는 우리 현실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대중들에게 선택을 요구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세금 적당히 내고, 비참하게 살건 지, 세금 더 내고 노후가 보장된 삶, 의료비 걱정, 교육비 걱정 없이 사는 삶을 선택할 건지 말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무상으로 기본생활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사회가 소유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민주의 정책도 진정성이 있어야 대중의 의식을 바꾸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유세에서는 부유세 이야기 말고도 민주노동당이 위기에 몰린 이유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시기에 당이 현실에 정직하게 답을 하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까발리는데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05년도에 가장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양극화인데, 당이 여기에 어떤 주장과 행동을 했는지 아무리 돌이켜 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자본주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그 때문에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데,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제대로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는 한 당은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대중에게 선택받으려 하지 않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는 주장으로 제 말을 끝냈습니다.

제주도도 무척 춥군요. 부산으로 가는 내일 아침에는 아름다운 제주시의 풍광을 잠깐이라도 즐기렵니다. 몸은 고단한데 눈이 호강하는 전국유세! 앞으로 14일이 남았습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회주의자 기호1번 김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