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쌍무회담 중심의 다자회담으로 바뀐 6자회담, 그 전환의 정치적 의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글을 시작하며
2.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킨 정치적 주도권
3. 미국 주도의 6자회담을 조미쌍무회담 중심의 다자회담으로
4. 제국주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려는 한(조선)민족의 정치투쟁
5. 글을 마치며



1. 글을 시작하며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정세에 새로운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그 밑그림은 2005년 7월26일부터 8월 7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세계정치계가 그 윤곽이 그려지는 현장에서 엿보이는 조그만 움직임도 놓칠세라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나, 6자회담의 당사자인 한(조선)민족의 눈과 귀가 그 회담에 집중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6자회담에 즉흥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회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제4차 6자회담의 진상을 파악할 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정치적 주도권의 문제다.
6자회담에서 정치적 주도권이란 회담의 성사배경과 회담의 진행과정, 그리고 회담의 결과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6자회담을 자기 나라 또는 자기 민족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쪽이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는 것이며 결국 전략적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6자회담에서 정치적 주도권이 행사되는 방향에 따라서, 한(조선)민족의 21세기 운명을 결정하고 동북아시아의 정세구도를 새롭게 개편하는 커다란 밑그림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윤곽이라는 다소 문학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제4차 6자회담의 결과가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정세를 바꾸는 최종적인 결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회담의 결과는 정세를 뒤바꾸는 방향전환의 계기가 되는 데, 바로 그것을 밑그림의 윤곽이 드러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6자회담에서 주도권 문제는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는 정치문제이며, 회담 참가국들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는 정치문제인 것이다.
한(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뒤바꾸는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는 문제를 놓고 6자회담 참가국들 사이에서는 겉으로 보아서는 조용한 듯하나 실제로는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였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볼 때, 6자회담의 정치적 주도권은 당연히 한(조선)민족이 틀어쥐어야 마땅하며, 그 회담이 한(조선)민족의 전략적 승리로 결말이 나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조선)민족이 6자회담의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는 문제를 논할 때, 회담의 성사배경, 회담의 진행과정, 그리고 회담의 결과라는 세 측면에서 한(조선)민족이 정치적 주도권을 어떻게 틀어쥐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제4차 6자회담을 바라보면, 한(조선)민족이 그 회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쥔 힘의 원천이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한(조선)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과 맞서 있는 한(조선)민족이 다자회담이라는 형식을 빌어 벌어진 정치투쟁에서 이기는 하나뿐인 방도는 민족주체역량을 결집하는 길, 곧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길이다.
통일전선운동이 아니고서 승리하는 다른 길은 한(조선)민족에게 보이지 않는다.

제4차 6자회담은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주체역량을 통일전선으로 결집시킴으로써 다자회담이라는 형식을 빌어 벌어진 정치투쟁에서 승리적 전환국면을 열어놓았음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제4차 6자회담에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여 전환국면을 열어놓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그 회담에서 한(조선)민족이 얻은 가장 커다란 정치적 승리다.
내 판단으로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이 6자회담에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바꿔놓으면서 6자회담의 결과를 하나의 지향점으로 이끌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지향점이란 한(조선)민족이 자기의 자주성을 완성하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전략적 승리를 뜻한다.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결집한 민족통일전선은,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싸움에서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에 맞선 각축전이 어지럽게 벌어지는 6자회담에서도 정세의 변화발전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족통일전선의 관점에서 제4차 6자회담의 성사배경, 진행과정, 결과를 분석한다.


2.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킨 정치적 주도권

1년이 넘도록 중단되었던, 그래서 다시 열릴 가망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던 6자회담은 어떻게 성사되었을까?
제4차 6자회담이 성사된 배경에는 지금까지 세상에 그 실체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정치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놀랍게도, 그 요인은 6.15 공동선언의 깃발 아래 펼쳐지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이다.
민족주체적 관점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6자회담과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제4차 6자회담이 성사된 정치적 배경에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강화발전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 돋보인다.
여기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강화발전을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킨 '새로운 정치적 요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1차부터 3차까지 6자회담이 성사된 배경에는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2005년 3월초 '6.15공동선언실천 남북(북남)해외공동행사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기 이전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은 아직 자기의 추진주체를 갖지 못했으므로 그 힘이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이전의 6자회담에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추진주체가 생겨난 뒤로 사정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6.15 공동선언 발표 다섯 돌을 맞아 평양에서 열린 6.15 민족통일대축전은, 한(조선)민족의 주체역량이 6.15 공동선언의 깃발 아래 결집되어 명실공히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정치회합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사시킨 대사변이었다.

제4차 6자회담이 성사된 정치적 배경을 논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이 눈에 띈다.  

2-1) 6.15 민족통일대축전에서는 남북(북남) 정부대표단의 정치회담이 열렸고, 그에 따라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은 6.15 민족통일대축전의 정치적 의의를 한껏 고조시켰는데, 그 전술적 통일전선이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 민족통일전선운동에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눈여겨보는 것은, 남북(북남) 정부대표단의 정치회담에 의해서 형성된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이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킨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까지 있었던 세 차례의 6자회담이 성사된 정치적 배경과 제4차 6자회담이 성사된 정치적 배경을 뚜렷이 구분하는 특징이다.
통일전선운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미국 언론은 "핵문제 때문에 대립상태가 생겼는데도 남과 북의 협력은 계속되었다"고 지적하였으나(합동통신(Associated Press) 2005년 7월 10일자),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이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킨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6.15 민족통일대축전의 일환으로 열렸던 남북(북남) 정부대표단의 정치회담에 이어 2005년 6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남북장관급(북남상급)회담에서 채택발표한 공동보도문에서 입증되었다.
공동보도문에 따르면, "남과 북(북과 남)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최종목표로 하여 분위기가 마련되는데 따라 핵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한 실질적인 조치란 제4차 6자회담의 성사를 뜻한다.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은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킨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제4차 6자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8월 4일 조미쌍무회담(D.P.R.K.-U.S. bilateral meeting)에 남(한국) 정부대표가 참석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조미쌍무회담에 남(한국) 정부대표가 참석하는 것은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것은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이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북(북남) 정부당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6.15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형성한 전술적 통일전선은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키는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쥘 수 있었다.

2-2) 남북(북남) 정부당국이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전술적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측 정부대표단 접견에서 마련되었다.
2005년 6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 정부를 대표하여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정치회합에 참가한 통일부 장관이며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인 정동영을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접견한 자리에서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가 머물고 있었던 영빈관을 찾아가 2시간30분 동안이나 담화하였다.
2005년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던 미국 하버드대학교 행정대학원 국제관계센터 원자관리 프로젝트(Managing the Atom Project at the John F.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사무총장 짐 월시(Jim Walsh)는 남(한국)의 일간지와 대담하면서 자신이 평양에서 만났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말을 전했는데, 김계관 부상은 그에게 김정일 위원장이 조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과감한 전략적 결정(brave strategic decision)을 내렸으며, 북(조선)은 그 결정에 따라 6자회담에 복귀하였고, '핵문제'는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차원에서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화일보 2005년 7월 30일자)
2005년 7월 9일 북(조선)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가 중국을 방문하는 것과 때를 맞춰 중국 정부가 베이징에서 마련한 만찬에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R. Hill)을 만나 6자회담을 재개하려는 북(조선) 정부의 결정을 전달하였는데(로스앤젤레스타임스 2005년 7월 10일자), 그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를 통해 6자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에 따른 후속조치였던 셈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4차 6자회담 성사문제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를 통하여 세상에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요점으로 정리된다.
(1) 한(조선)반도 비핵화(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
(2) 남북(북남) 정부당국이 1992년 1월 20일에 채택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유효하다.
(3) 미국이 북(조선)을 대화상대로 존중한다면 북(조선)은 7월 안에라도 6자회담에 나설 수 있다.
(4) '핵문제'가 해결되면 북(조선)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할 것이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받으면서 철저한 검증을 받을 용의가 있다.
(5) 미국이 북(조선)과 수교한다면 일반적인 나라들이 보유하는 단거리 미사일을 제외하고 장거리 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폐기할 용의가 있다.
위의 다섯 가지 내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와 조미관계 정상화를 반드시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의미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김일성 주석의 유훈은 무조건적으로, 최우선적으로 실현하여야 하는 정치과업이다.
한(조선)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말은, 한(조선)반도 비핵화가 무조건적으로, 최우선적으로 실현하여야 하는 정치과업이라는 뜻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바로 이 사실을 민족통일전선의 정치회합에서 한(조선)민족 전체에게, 그리고 부시 정부에게 명확하게 밝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있어서, 1992년의 한(조선)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유효함을 다시 확인한 것, 7월 안에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것, '핵문제'가 해결되면 핵확산금지조약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받겠다는 것은, 결국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전술적 조치들인 것이다. 북(조선)은 그러한 전술적 조치들이 제4차 6자회담에서 실현방도를 찾게 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힘썼다.

둘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미 국교수립을 추진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폐기할 용의가 있다는 말은, 미국 본토를 겨냥한 조선인민군 전략미사일부대의 핵무장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조미 국교수립과 핵무장 포기를 맞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말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개념에는 북(조선)이 핵무장을 포기하는 것과 미국이 북(조선)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을 연계해서 동반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2-3) 2005년 6월로 되돌아가 보면, 북(조선)의 맹렬한 압박공세를 받고 있던 부시 정부에게는 6자회담 재개문제에 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사를 방북한 남측 정부대표단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방북한 남측 정부대표단을 통하여 부시 정부에게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남측 정부대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의사를 전해들은 이튿날인 6월 18일 외교통상부 장관 반기문은 서울에 머물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접견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이며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을 만나는 한편 외교통상부 차관 이태식과 국가안보회의 행정관 박선원을 워싱턴으로 급파하였다. 같은 날 외교통상부는 정책기획관 김원수를 러시아에 급파하였으며, 6월 20일에는 외교통상부 차관보이며 6자회담 남(한국) 수석대표인 송민순을 베이징에 급파하였으며, 같은 날에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에게 설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의사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에 알려졌다.
1차부터 3차까지 6자회담이 성사된 과정을 살펴보면, 회담을 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정이 좌우하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자회담을 성사시키겠다고 결심하면 회담이 성사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회담이 중단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6자회담을 열지 못해서 안달이 난 부시 정부가 제아무리 북(조선)에게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면서 6자회담에 복귀하라고 소란을 피워도 북(조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지난 시기 경험이 말해주는 것처럼, 제국주의 미국이 '핵문제'를 걸고 시비를 벌이는 경우, 북(조선)은 그보다 몇 배나 드센 역공을 퍼부었다. 북(조선)의 '핵문제'에 대해서 부시 정부의 선택권(option)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부시 정부관리들도 인정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미국 편들기에 열중하는 미국 언론에 의해서도 밝혀진 바 있다. (뉴욕타임스 2005년 7월 10일자)

  
3. 미국 주도의 6자회담을 조미쌍무회담 중심의 다자회담으로

한(조선)반도의 '핵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대결은 다양한 외형을 띌 수 있으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조미 두 나라의 정치대결이 들어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까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해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클린턴 정부 시기에는 조미 정치대결을 피해보려고 4자회담을 벌려놓았으나 북(조선)으로부터 강한 정치적 압박을 견디다 못해 다시 조미 정치대결의 장으로 나와야했다.
그 뒤를 이은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기는커녕 집권한 첫날부터 조미 정치대결을 회피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그러한 계략을 꾸미던 부시 정부의 행동에 부채질을 한 것은 일본이었다.
조미 정치대결을 회피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는 미국 정부의 눈치를 살피던 일본의 외무성은 2003년 2월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당시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에게 조미쌍무회담 구도를 6자회담 구도로 바꾸어줄 것을 제안하였고, 미국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마치 자기의 제안인 것처럼 내놓았다. (아사히신붕 2005년 6월 18일자)
조미 정치대결을 회피하기 위한 적당한 구실을 찾고 있었던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가 채택하였던 조미 기본합의를 깨버리는 한편 고이즈미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6자회담을 벌여놓음으로써 조미 관계를 정상화하는 길을 고의적으로 가로막았으며, 덩달아 고이즈미 정부는 조일 평양선언을 내던지고 이른바 '납치문제'를 트집잡으면서 북(조선)을 자극하였다.
부시 정부와 고이즈미 정부가 손잡고 꾸며낸 계략과 책동은 조미 정치대결구도를 혼돈상태로 끌고 갔다. 그런 계략과 책동을 잘 알고 있는 북(조선)이 저들의 6자회담 개최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조선)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부시 정부와 고이즈미 정부가 손잡고 꾸며낸 계략과 책동을 파탄시키고 혼돈상태를 정리하여 조미 정치대결구도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
북(조선)이 혼돈상태에 빠진 조미 정치대결구도를 다시 살려내는 길은 6자회담의 막 뒤로 몸을 숨긴 부시 정부에게 맹공을 퍼부어 그들이 다시 조미 정치대결의 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전격적으로 선포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요원들을 추방하였으며, 불이 꺼져 있던 영변의 5천kw급 흑연감속로에 불을 당겨 다시 가동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봉인을 떼어버리고 폐연료봉을 꺼내어 재처리하는 공정에 들어가고, 중단되었던 영변의 5만kw급 원자로와 태천의 20만kw급 원자로 건설공사를 다시 시작하고, 마침내 핵무장을 선언하는 등 일련의 초강경한 대미압박공세가 이어졌다.
2005년 4월 5일부터 9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던 미국 국제정책연구소(Center for International Policy) 선임연구원 셀릭 해리슨(Selig S. Harrison)은 4월 16일 언론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북(조선)은 영변의 5천kw급 흑연감속로의 가동을 멈추고 폐연료봉 8천여 개를 꺼내는 작업을 4월 안에 시작하여 석 달 동안 계속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05년 4월 16일자)
미국 언론은 셀릭 해리슨이 북(조선)을 방문하기 약 열흘 전에 영변의 흑연감속로가 가동을 중단하였음을 보여주는 위성사진 판독결과를 보도하였다. (뉴욕타임스 2005년 4월 18일자)
1994년에 그 흑연감속로에서 꺼냈던 폐연료봉을 수조 속에서 보관해오다가 2002년 12월부터 재처리하였고 그로써 핵무기 6-8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만들었던 북(조선)이 이번에 또다시 흑연감속로에서 폐연료봉을 꺼내겠다고 밝힌 것이다.  
2005년 5월말 미국 에이비씨(ABC) 텔레비전방송 취재단이 평양에서 촬영하고 6월 8일 저녁보도시간에 방영한 대담녹화방송에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기에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고 하면서 지금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북(조선)이 치밀한 계산에 따라 취하는 초강경한 대미압박전술의 연속이었다. 핵문제를 놓고 미국과 대결하고 있는 이란의 대응공세와 북(조선)의 대미압박공세를 견주어보면, 북(조선)이 얼마나 초강경한 압박공세로 부시 정부를 타격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란은 미국과 유럽연합 세 나라(영국, 독일, 프랑스)의 압박공세를 받으면서도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고 국제원자력기구 요원을 추방하는 식의 강경한 대응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2005년 8월 8일 이란이 미국과 유럽연합 세 나라의 협박공갈과 굴욕적인 협상강요를 물리치고 이스파한의 우라늄 전환시설을 가동하기 시작한 이튿날, 이란 국방장관 알리 샴카니(Ali Shamkani)는 만일 이란의 핵시설이 공격을 받으면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하면서 자국의 핵시설이 대학 안에 있기 때문에 폭탄으로 파괴할 수 없고, 핵시설이 파괴되면 다른 곳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년 8월 9일자)
이것은 이란의 대응전술이 공세적이 아니라 매우 수세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북(조선)이 부시 정부를 초강경한 압박공세로 타격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인데도, 워싱턴의 제국주의전략가들과 그들의 견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언론들은 북(조선)이 이른바 '벼랑끝 전술(brinkmanship tactics)'에 매달려 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정세의 흐름과 국면의 뒤바뀜을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벼랑끝 전술에 매달려 있는 쪽은 치밀한 전략전술에 따라 압박공세를 가하는 북(조선)이 아니라, 북(조선)으로부터 연속적으로 초강경한 압박공세를 받고 갈팡질팡하는 부시 정부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북(조선)이 연속적인 대미압박전술로 부시 정부를 타격하는 한편, 워싱턴 정가에서는 조미쌍무회담을 거부하는 부시 정부의 대북(조선)정책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워싱턴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의 거물급 인사들이 비판여론을 들고 나왔다.
2005년 4월 28일 뉴욕주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은 상원 군사위원회 예산청문회에서 "우리의 동맹인 한국이 우리가 북한과 직접 대화를 갖기를 바라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우리 동맹이 우리에게 북한과 다자대화와 양자대화를 모두 갖기를 원하고, 다자대화와 양자대화 사이에는 모순이 없는데도 우리가 양자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년 4월 29일자)
5월 8일 에이비씨(ABC) 텔레비전방송에 출연한 미시건주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 칼 레빈(Carl M. Levin)과 씨비에스(CBS) 텔레비전방송에 출연한 델라웨어주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 조셉 바이든 2세(Joseph R. Biden, Jr.)도 부시 정부가 북(조선)과 직접 대화할 것을 촉구하였다.
같은 날 미국 텔레비전방송 씨엔엔(CNN)에 출연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민주당 상원의원 다이앤 페인스타인(Dianne Feinstein)은 한 술 더 떠서 콘돌리자 라이스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 부시가 북(조선)의 요구하는 조미쌍무회담을 거부함으로써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였다는 비판은 야당인 민주당에서만이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 일부인사들에게서도 나왔다. (뉴욕타임스 2005년 7월 10일자)
이처럼 밖에서는 북(조선)의 초강경한 압박공세가 계속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에서는 부시 반대파의 비난이 거세지면서 부시 정부는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2005년 4월 14일 미국 국무부에서 언론을 상대로 열린 정례설명회에서 국무부 대변인 스캇 매클렐런(Scott McClellan)은 부시 대통령이 북(조선)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확신한다"고 대답하고 부시 정부는 북(조선)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년 4월 15일자)

궁지에 빠진 부시 정부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3-1) 첫째 반응은 북(조선)의 초강경한 압박공세에 맞서 일련의 대응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부시 정부가 취한 대응공세는 심리전 도발책동과 군사적 긴장 고조책동이었다.
부시 정부는 '익명의 고위관리'가 북(조선)에게 불리하게 조작된 정보를 미국 언론들에게 흘려주어 세상에 공개하는 상투적인 수법으로 심리전 도발책동을 저질렀는데, 북(조선)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지하핵폭발실험을 실시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그 경우에 속했다.
그런 헛소문은 2004년 9월 12일 『뉴욕타임스』 기사에서부터 2005년 5월 7일 『합동통신』 기사로 이어지면서 '핵문제'의 긴박감을 자극하였다.
미국 엔비씨(NBC) 텔레비전방송은 2005년 5월 6일 북(조선)이 핵폭발실험을 강행하는 경우, 미국군이 핵실험장을 선제공격하는 작전계획을 마련해놓았다고 보도하였고, 부시 정부관리들은 북(조선)의 '핵문제'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넘겨 강한 제재조치를 발동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와 더불어 2005년 1월 18일 북(조선)을 비롯한 반미국가들을 이른바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s of tyranny)'라고 부르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비난발언이 나왔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부시의 비난발언(워싱턴포스트 2005년 5월 1일자)이 그 뒤를 이었다.
미국 군부는 북(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작전계획 5026과 5029, 개념계획 5030을 이미 작성하였거나 수정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 언론에 알려주어 보도하게 하는 한편, 미군유해발굴단을 북(조선)에서 철수하고(연합뉴스 2005년 5월 26일자), 스텔스전폭기를 남(한국)의 미국군기지에 배치하는 것(뉴욕타임스 2005년 5월 30일자)으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또한 부시 정부는 북(조선) 경제의 목을 조르려는 생각에서 중국에게 북(조선)에 대한 석유공급을 끊으라고 요구하였다. (워싱턴포스트 2005년 5월 7일자)
그러나 부시 정부의 대응조치들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부시 정부가 제아무리 대응조치를 취한다해도 북(조선)의 초강경한 압박공세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며, 중국이 부시 정부의 석유공급 중단요구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3-2) 부시 정부의 둘째 반응은 궁지에서 벗어나는 출로를 찾는 것이었다.
그 출로는 조미쌍무회담을 갖자는 북(조선)의 정치적 요구를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부시 정부의 그러한 움직임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한 때는 2005년 5월초였다.
미국 국무부의 대북(조선)협상대사(Special Envoy for the six-party talks) 조셉 디트러니(Joseph E. Ditrani)는 2005년 5월 3일 프린스턴대학교의 우드로우 윌슨 사회 및 국제문제대학원(Woodrow Wilson School of Public and International Affairs)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가 그들의 목표다. 우리도 그쪽으로 갈 용의가 있다. 상호존중이라는 용어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북한은 주권국가다. 우리는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은 회담에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년 5월 4일자) 미국 국무부 대변인 리처드 바우처(Richard A. Boucher)는 2005년 5월 4일 국무부에서 언론을 상대로 열린 정례설명회에서 "우리는 이미 6자회담 맥락에서 양자 논의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해왔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년 5월 5일자) 그로부터 닷새 뒤인 5월 9일 국무부 공보국장 톰 케이시(Tom Casey)도 국무부에서 언론을 상대로 열린 설명회에서 "미국은 북한이 하나의 주권국가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6자회담의 맥락에서 북(조선)과 대화해왔다. 그것에 대해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년 5월 10일자) 같은 날, 부시를 수행하여 러시아를 찾아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씨엔엔(CNN)과 회견하면서 미국은 북(조선)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가 없으며, 북(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며,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조미쌍무회담이 가능하다는 점을 밝혔다.
이러한 발언들은 궁지에 빠진 부시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북(조선)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여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조미쌍무회담을 열자는 양보의사를 북(조선)에게 거듭 밝힌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조선)은 자기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시 정부의 전향적 태도를 반기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 기습적으로 초강경한 압박공세를 들이대었다. 궁지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일단 전향적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출로를 찾아보려던 부시 정부에게 기습적으로 최후의 결정타를 가한 것이다.
부시 정부에게 최후의 결정타를 가한 압박공세란, 북(조선)이 영변에 있는 흑연감속로에서 익을 대로 익은 폐연료봉 8천 여 개를 꺼내는 작업을 마친 것이었다. 폐연료봉을 꺼낸다는 것은 그것을 재처리하여 무기급 플루토늄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며, 무기급 플루토늄과 기폭장치가 결합하여 핵탄두로 만들어진 뒤에 핵무고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북(조선) 외무성 대변인이 영변의 흑연감속로에서 폐연료봉을 꺼내는 작업을 마쳤으며 "핵무기고를 늘이는 데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나가고 있다"고 발표한 때는 2005년 5월 11일이었다. 이 발표는 2005년 4월 5일부터 9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였던 미국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셀릭 해리슨에게 북(조선)은 영변에 있는 5천kw급 흑연감속로의 가동을 멈추고 폐연료봉 8천여 개를 꺼내는 작업을 4월 안에 시작하여 석 달 동안 계속하겠다고 말한 때로부터 불과 한 달이 지난 시점에 나온 것이었다.
북(조선)이 폐연료봉을 꺼내는 작업을 마쳤다는 충격적인 발표는, 북(조선)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나서 북(조선)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기다리던 부시 정부의 허를 찌른 결정타였다. 부시 정부가 얼마나 놀라고 다급했으면 그로부터 이틀 뒤에 국무부의 대북(조선)협상대사 조셉 디트러니와 국무부 코리아과장(Director of the State Department's Office of Korean Affairs) 제임스 포스터(James Foster)를 황급히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대표부에 보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5월 13일 조셉 디트러니와 제임스 포스터는 뉴욕에 있는 유엔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대표부를 찾아가 미국이 북(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한다는 것과 침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달하였다. (아사히신붕 2005년 5월 19일자)
그렇게 하고서도 위기감을 덜지 못한 부시 정부는 6자회담에 정통한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을 통하여 6자회담이 열리기 하루 또는 이틀 전에 조미쌍무회담을 가질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는 좀더 구체적인 의사를 일본 언론(산케이신붕 2005년 5월 26일자)에 흘려주었던 것이다.
궁지에 빠진 부시 정부의 허를 찌르는 결정타를 가하여 북(조선)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북(조선)의 기습적이며 강경한 압박전술이 이번에도 실효를 거두었던 것이다.
북(조선)의 초강경한 공세 앞에서 6자회담에 복귀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버티던 부시 정부는 결정타를 입고 휘청거리면서 6자회담 틀 안에서 쌍무회담(bilateral meeting in the context of the six-party talks)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으로 주저앉았고, 그러한 정치적 후퇴에 따라 13개월만에 6자회담이 다시 열렸으니 그것이 바로 제4차 6자회담이다.
2005년 7월 25일 제4차 6자회담 개최를 하루 앞둔 이날 베이징에서는 조미쌍무회담이 열렸다.
75분 동안 이어진 회담에서 양측 대표는 이번 회담에서 진전이 있을 때까지 회담을 계속한다고 합의하였다. (연합뉴스 2005년 7월 25일자)
이튿날인 7월 26일 오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6자회담 개막식에서 미국 정부대표 크리스토퍼 힐은 인사말을 하면서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한다.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의도를 전혀 갖지 않았으며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조선)과 쌍무회담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 2005년 7월 26일자)
제4차 6자회담은 부시 정부와 고이즈미 정부의 계략과 책동으로 한때 혼돈상태에 빠졌던 조미 정치대결구도를 다시 살려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뒤돌아보면, 지금까지 세 차례 열렸던 6자회담에 나왔던 북(조선) 정부대표단과 미국 정부대표단 사이에서는 외교적 대화가 전혀 없었고 날카로운 긴장감만 감돌았다.
두 나라 대표단은 2003년 8월에 열렸던 제1차 6자회담에서는 회의장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sofa)에서 잠깐 얼굴만 비치고 헤어졌고, 2004년 2월에 열렸던 제2차 6자회담에서는 의자와 탁자도 없는 방에서 선 채로 말 몇 마디 주고받다가 나가버렸으며, 뒤이어 6월에 열렸던 제3차 6자회담에서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뒤에 등을 돌렸다.
조미 두 나라 정부대표단이 만난 자리에서 그처럼 일상적인 외교관례에 맞지 않는 분위기가 감돌았던 까닭은, 미국이 북(조선)과 마주앉는 조미쌍무회담을 한사코 기피하려고 하였기 때문이고, 그에 대응하여 북(조선) 정부대표단도 미국 정부대표단과 잠깐 마주칠 적마다 강경한 압박발언으로 미국을 위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한 위협적 분위기는,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미 정치대결을 회피하기 위해서 조미쌍무회담을 고집스럽게 외면하였던 부시 정부는 태도를 180도로 바꾸어 조미 쌍무회담에 나왔으며 그 회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뭇 진지한 태도를 취하였다.
제4차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열린 조미 쌍무회담이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북(조선)이 부시 정부가 고의적으로 깨버렸던 조미 정치대결구도를 다시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얻었음을 뜻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의도가 6자회담에 관철되고 있음을 뜻한다.
명백하게도, 제4차 6자회담은 이전의 6자회담 형식과 완전히 다르게 조미쌍무회담을 중심에 두고 진행된 새로운 형식의 다자회담이었다. 남(한국) 정부관리는 "이번 회담의 특징을 정리하면 전체회의 한 두 번 하고 나머지는 전부 양자접촉이다. 이는 북한이 원하던 것으로 과거와는 180도 다른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연합뉴스 2005년 7월 29일자)
제국주의 미국이 주도해오던 6자회담을 조미쌍무회담 중심의 다자회담으로 바꾼 결정적인 요인은, 그 회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었던 북(조선)이었다.


4. 제국주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려는 한(조선)민족의 정치투쟁

제4차 6자회담이 이전의 6자회담과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인 것은, 그 회담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4차 6자회담에서 드러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는, 북(조선)의 요구에 따라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는 정치문제가 의제에 포함되었다는 데 있다.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는 문제가 제4차 6자회담에서 논의되었을 뿐 아니라, 의장국인 중국이 작성한 6개항으로 된 공동성명 4차 초안에는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는 문제를 별도의 회담에서 논의한다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6자회담에서 공동성명이 채택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 자체가 벌써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것인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성명에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기 위한 새로운 정치회담을 개최하자는 합의사항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조명록 특사의 워싱턴 방문으로 2000년 10월 12일에 채택발표되었으나 부시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일방적으로 무시해온 조미 공동선언을 되살려내려는 북(조선)의 외교적 승리다.
조미 공동선언은 조미 두 나라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강화하는 데 이롭게 두 나라 사이의 쌍무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들을 취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명시하였다.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는 새로운 정치회담이 열린다는 것은,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들씌운 제국주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는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제4차 6자회담에서 북(조선)이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문제를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nuclear disarmament)와 미국의 핵우산 철거(removal of nuclear umbrella)를 맞바꾸는 근본문제로 명확히 제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핵무장 포기 대 핵우산 철거의 상응구도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북(조선)이 말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란 북(조선)이 핵무장을 포기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들씌운 핵우산을 걷어치우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4-1) 한(조선)민족이 요구하고 진보적 인류가 지지하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는, 명백하게도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와 미국의 핵우산 철거라는 두 개의 동반적 관계에서 실현되는 정치과업이다.
북(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란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우기 위해서 자기의 핵무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북(조선)이 30여 년 동안 국가역량을 집중하여 추진해왔던 핵무장의 근본목적은,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 개발경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우기 위한 것이었음이 여기서 밝혀진다.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란 북(조선)이 핵무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에 상응하여 미국도 한(조선)반도에서 자기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는 것을 뜻한다.
북(조선)의 핵무장만 포기하고 미국의 핵우산은 그대로 놔두는 것은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입으로는 한(조선)반도 비핵화를 외우면서, 북(조선)의 핵무장만 포기하게 만들고 자기의 핵우산은 그대로 놔두려는 술책에 매달려왔다.
제4차 6자회담에서 핵무장 포기 대 핵우산 철거의 상응구도가 형성된 것은, 미국의 핵우산 철거를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에 상응하는 의제로 삼기 위한 정치투쟁을 벌여온 북(조선)이 이전까지 6자회담 의제를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에 한정하려는 술책에 매달려온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를 꺾어버리고 승리하였음을 뜻한다. 북(조선)이 제국주의 미국과 맞선 정치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제4차 6자회담의 의제는 북(조선)의 '핵문제'가 아니라 한(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새로운 문제로 바뀐 것이다.

4-2)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와 미국의 핵우산 철거가 동시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상응조치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002년 11월 북(조선)을 방문한 미국 존스합킨스대학교 교수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와 뉴욕의 코리아협회(Korea Society) 회장 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가 북(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백악관에 전달하였던 친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와 미국의 핵우산 철거를 동시적으로 상응하여 추진함으로써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공명정대한 정치적 의사를 밝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악관에 보낸 친서의 맨 마지막 문장은 "미국이 용단을 내리면 우리도 그에 맞게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고 되어있다.
조미쌍무회담 중심의 다자회담에서 핵무장 포기 대 핵우산 철거의 상응구도를 세우고 제국주의 미국이 한(조선)민족에게 들씌운 핵우산을 걷어치우려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이다.
2005년 4월 중국을 방문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중국 정부관리들에게 미국의 핵전쟁위협은 "남조선의 미군기지뿐만 아니라 주일미군도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나, 제4차 6자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미쌍무회담이 열린 자리에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일본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는 미국의 핵정책을 수정하라고 요구한 것(연합뉴스 2005년 8월 2일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략을 수행하는 북(조선) 정부의 정치적 노력인 것이다.

4-3) 미국 정부와 미국 언론들은 '방어적 핵우산(defensive nuclear umbrella)'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 말은 미국의 제국주의전략가들이 자기들의 침략적 의도를 감추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 우산이란 비가 몸에 젖지 않게 막아주는 물건이므로 핵우산이라는 말에는 미국의 핵무기로 동맹국들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뜻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뜻으로 쓰는 핵우산이라는 말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들씌운 핵우산이라는 개념에는 선제핵공격을 퍼부어 한(조선)민족 전체를 핵참화로 살육하는 핵전쟁도발책동을 계속하겠다는 제국주의적 침략의지가 들어있다.
미국이 한(조선)반도에 핵우산을 들씌우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적대정책의 핵심내용이다.
미국의 핵우산이 선제 핵공격전략에 따른 핵전쟁도발을 뜻한다는 사실은, 2005년 3월 15일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의장실이 작성한 '합동핵작전교리' 초안에서도 드러났다.
그 초안은 태평양군사령관을 비롯한 해외 각 지역 야전군사령관들이 이른바 '깡패국가'들과 테러집단들을 겨냥한 선제공격을 대안으로 삼고, 특히 동아시아와 중동의 제한적 핵전쟁시나리오를 마련해두고 있으며, 적대세력의 공격이 임박한 경우 대통령에게 선제핵공격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5년 5월 2일자)
또한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개념에는, 북(조선)을 항시적인 핵전쟁위협에 묶어둠으로써 사회주의체제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고 국가역량을 차츰 약화시켜 이른바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노리는 제국주의적 침략의지가 들어있다.
미국의 핵우산 제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북(조선)은 주한미국군기지들에 전술핵무기가 배치되기 시작하였던 1959년 4월부터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우고 한(조선)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북(조선)의 정치투쟁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4-4)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정치회합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을 방문한 남측 정부대표를 접견한 자리에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북(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제4자 6자회담에서 북(조선)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실현하기 위해서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 정치투쟁을 벌인 것이 되며, 그 회담 자체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실현하는 과제를 놓고 벌어진 정치회담이 되는 것이다.
2005년 10월 10일은 조선로동당 창건 60돌이 되는 날인데, 지금 북(조선)에서는 당창건 60돌을 맞이하여 각 부문에서 노력적 성과를 내기 위한 '100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북(조선)에서는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제국주의 미국에 맞서 싸우는 정치투쟁이야말로 '100일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라고 보고 있다. 븍(조선)에서 그 정치투쟁의 성과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관철하는 문제를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은 당창건 60돌을 맞이하여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에서 반드시 성과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북(조선)이 역량을 집중하여 제4차 6자회담을 밀고 나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4-5) 2000년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조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추세와 남북(북남) 정부당국 관계가 발전하는 추세가 맞물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제4차 6자회담에서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는 문제가 가닥이 잡히면서 조미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하는 경우,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방문과 북(조선) 국방위원회 고위급 인사의 워싱턴방문이 성사될 가능성이 한결 높아지게 되며, 그와 더불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방문과 남북(북남) 최고위급회담이 성사될 가능성도 높아지게 된다.

4-6) 제4차 6자회담에서 북(조선)의 요구대로 북(조선)의 핵무장 포기 대 미국의 핵우산 철거의 상응구도가 형성됨으로써 정치적 패배를 당하게 된 미국은 자기의 패배를 만회해보기 위하여 분별없는 행동으로 나왔다. 그것은 북(조선)이 핵무장을 포기하는 범위에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문제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누구도 간섭침해할 수 없는 주권국가의 정당한 권리인데도, 미국이 핵무장 포기라는 구실을 내세워 북(조선)의 주권을 제한하려고 한 것은 자기의 패배를 만회해보려는 술책이었다.
북(조선)은 자기의 주권을 제한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책동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수로 건설사업을 다시 시작하여야 하며, 그 사업에 응당 미국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드센 반격을 퍼부어 미국을 몰아세웠다. 드센 반격을 받은 부시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경수로 문제는 의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꽁무니를 빼기에 바빴다.
제4차 6자회담이 중간에 3주 동안의 휴회기간을 포함하여 유례없이 오랫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북(조선)이 미국의 제국주의책동에 맞서서 싸우는 치열한 정치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미국이 북(조선)의 핵무장만 포기하게 만들고 자기의 핵우산은 그대로 놔두려고 하는 것이나,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주권국가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것이야말로 한(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한(조선)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모독이며, 한(조선)반도 비핵화를 지지하는 진보적 인류의 염원을 우롱하는 짓이다.

4-7) 한(조선)민족의 목숨을 노리는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는 것은 한(조선)반도를 겨냥한 미국의 핵전쟁전략을 송두리째 바꾸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한(조선)반도를 겨냥한 미국의 핵전쟁전략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은 주한미국군이 나가는 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제국주의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운다는 말은 핵전쟁의 돌격대로 편성된 주한미국군을 무력화시키고 철군시킨다는 뜻이다. 핵우산 철거가 핵전쟁전략의 근본적 변화와 그에 따른 주한미국군 철군으로 이어지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4-8) 조미쌍무회담 중심의 다자회담에서 북(조선)이 미국의 제국주의적대정책이 들씌운 핵우산을 걷어치우기 위하여 싸우는 것과 더불어 남(한국)에서는 제국주의지배정책의 군사적 집행단위인 주한미국군을 몰아내기 위한 철군투쟁이 힘있게 벌어지고 있다.
남(한국)에 있는 미국군기지들 앞에서는 미국군기지 폐쇄투쟁과 미국군 철군투쟁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시기에 미국의 핵우산을 걷어치우고 한(조선)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정치투쟁에는 북(조선)만 나섰으나, 남(한국)의 진보적 사회정치세력이 반미자주화투쟁에 나서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지금 한(조선)반도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핵우산을 걷어치우고 제국주의군대를 몰아내어 한(조선)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제국주의핵우산 철거투쟁과 제국주의군대 철군투쟁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의 정치투쟁이다.
한(조선)민족의 21세기 통일전선운동은 한(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투쟁에 민족주체역량을 총집중하고 있다. 한(조선)반도에서 제국주의군대를 몰아내고 제국주의 핵우산을 걷어치우는 날, 민족통일전선운동은 60년이 넘는 기나긴 싸움에서 마침내 전략적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5. 글을 마치며

제4차 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는 새로운 정치회담이 열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회담의 형식은 조미 쌍무회담과 남북(북남)과 중미가 머리를 맞댄 4자회담이 결합된 형식 또는 조미 쌍무회담과 남북(북남)과 미국이 머리를 맞댄 3자회담이 결합된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정치회담은 한(조선)반도에서 비핵화를 실현하는 문제를 한(조선)반도의 평화체제를 세우는 문제로 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전략목표는 한(조선)반도에 평화체제를 세우는 것이다.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말하는 한(조선)반도 평화체제 수립이란 미국의 제국주의 핵우산을 걷어치우고 미국의 제국주의군대를 몰아내는 것을 뜻한다. 한(조선)반도에서는 제국주의 핵우산의 철거와 제국주의군대의 철군에 의해서 공고한 평화체제가 세워질 것이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강화발전은 제국주의핵우산의 철거와 제국주의군대의 철군을 결정적으로 촉진하는 요인이다.
남(한국)의 민족민주운동가들과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통일전선운동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제국주의 핵우산을 걷어치우고 제국주의군대를 몰아내기 위하여 싸우는 통일전선운동의 강화발전이 민족적 자주성과 진보적 민주주의, 그리고 조국통일을 실현해 가는 하나뿐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남(한국)에서 노동자, 농민, 서민이 단합하여 새로운 정치주체로 일어서고 다양한 사회정치세력들과 손잡고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싸우는 것은, 밖으로는 제국주의핵우산을 걷어치우고 제국주의군대를 몰아내며, 안으로는 거액뇌물사건과 불법도청사건에서 폭로되었듯이 대미예속과 부정부패로 무너지는 낡은 정권을 새로운 정권, 곧 자주적 민주정권으로 교체하기 위한 사회변혁의 정치적, 조직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6.15 공동선언의 깃발 아래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는 추세에 따라 남북(북남) 정부당국의 전술적 통일전선이 형성되었으며, 그 전술적 통일전선이 정치적 주도력을 작용하여 제4차 6자회담을 성사시켰으며 미국의 일방주의를 꺾어버리는데 이바지하였다.
남(한국)에서 통일전선이 형성되면서 사회변혁의 정치적, 조직적 준비태세가 차츰 갖춰지는 것과 6.15 공동선언의 깃발 아래 전민족적 범위에서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면서 조국통일의 정치적, 조직적 준비태세가 차츰 갖춰지는 것은, 마치 하나의 중심점에서 일치하는 두 개의 동심원이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조선)민족의 21세기 통일전선운동은 바야흐로 두 개의 동심원을 확장하면서 8월의 불볕보다 더 뜨거운 싸움열기로 한(조선)반도 전역을 들끓게 하고 있다.
13개월 동안 조미 두 나라가 벌인 치열한 공방전에서 전술적 승리를 얻은 북(조선)이 정치적 주도권을 틀어쥐고 이끌어갔던 제4차 6자회담은, 13일 동안 이어졌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휴회상태에 들어갔다.
회담은 휴회상태에 들어갔으나, 제국주의핵우산을 걷어내고 제국주의군대를 몰아내려는 한(조선)민족의 통일전선운동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전진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2005년 8월 1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