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급정지'로 묶인 델리오 씨의 적금통장
  대우건설의 연수생 통장 통제, 인권침해 소지
  2006-08-10 오후 4:48:12
  델리오(39) 씨가 세 아들과 아내를 고국 필리핀에 남겨 둔 채 부푼 꿈을 안고 대한민국 땅을 찾은 것은 2004년 8월이었다. 델리오 씨는 대우건설의 건설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의 꿈은 하루빨리 돈을 벌어 자식들과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현장소장이 바뀐 뒤에 잦은 구타에 시달리던 그는 지난 6월에 사업장을 이탈했다. 그리고 지난달 31일 그는 대우건설이 강제로 들게 한 적금통장에 들어 있는 돈 180만 원을 찾기 위해 외환은행을 찾아갔다.
  
  외환은행에서 그가 들은 대답은 "통장에 있는 돈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월급에서 한 달에 18만 원씩 빠져 나가 쌓인 돈이었다. 담당자는 "회사와의 문제로 인해 지급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대우, 산업연수생에게 18만 원씩 강제로 적금 붓게 해
  
▲ 대우건설 인력지원팀장이 외환은행장 앞으로 보낸 공문. ⓒ프레시안

  열심히 일해 번 자기 돈 180만 원을 찾지 못한 델리오 씨는 지난 2일 '포천 나눔의 집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담소 실무자들이 외환은행과 델리오 씨의 소속 회사인 한중건설, 원청업체인 대우건설 측 담당자 등을 두루 확인해 본 결과, 대우건설이 외환은행에 이 돈의 '원천 지급정지'를 요청했음이 드러났다.
  
  대우건설이 원천 지급정지를 요청한 사유는 "외국인 산업연수생들의 무단이탈 및 도주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는 10일 오전 서울 안국동 달개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우건설이 외환은행에 이같은 요청을 한 것을 보여주는 공문을 공개하면서 "대우건설의 '강제적금 및 지급정지 요청'은 명백한 인권침해이면서 근로기준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대우건설 인력지원팀장이 외환은행장 앞으로 보낸 이 공문에 따르면, 대우건설은 산업연수생들의 무단이탈 및 도주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유보급 제도(1인당 18만 원/월, 불입기간 12개월)'를 시행하고 있으며, 이 제도에 따라 지급된 돈에 대한 '원천 지급정지'를 요청했다.
  
  대우건설은 "다만 당사 인력지원팀장 혹은 당사 인력지원팀장이 위임하는 당사 직원에 한해 동 유보급 인출 등에 대한 권한이 부여된다"고 이 공문에 명시했다.
  
  이날 델리오 씨가 공개한 월급명세서를 봐도 대우건설이 18만 원을 아예 월급에서 공제하고 나서 잔액을 지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월급명세서의 하단에는 대우건설의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으며, 상단에는 'Sub-contractor(대리 건축자)'로 한중건설이 적혀 있다. 이는 산업연수생의 사용이 금지된 대우건설이 한중건설이라는 하청업체를 이용해 사실상 저임금의 외국인노동자 인력을 편법적으로 사용해 왔음을 보여준다.
  
▲ 델리오 씨가 받은 월급명세서. ⓒ 프레시안

  이번 사건은 델리오 씨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대우건설이 외환은행으로 보낸 공문에는 '원천 지급정지'의 범위를 대우건설에 소속된 산업연수생 42명으로 명시하고 있다.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고 일하고 있는 다른 연수생 41명도 언제든 델리오 씨와 마찬가지로 '눈 뜨고 코 베이는' 일을 겪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정부가 1999년 산업연수생 인권 보호에 관한 관리지침을 수립하고 각종 강제적금을 공식적으로 폐지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이같은 재산권 및 인권에 대한 침해가 '관행'이라는 명목 하에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우건설의 '강제적금, 지급정지 요청'은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은 이같은 노동자에 대한 강제저축 유도 또는 저축금 관리를 규정하는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규정(제29조)하고 있다. 또 근로기준법 제42조는 "임금은 통화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정훈 변호사는 "노동자의 임금 전액을 직접 지급하지 않고 강제로 그 일부를 적금에 들게 한 것은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우건설의 압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금 자체는 델리오 씨 당사자와 은행 간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법적으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 변호사는 "당사자 간 계약에 의해 적금이 성립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목적이 무단이탈 방지 등 연수생의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가 분명한 만큼 합법적인 것으로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또 정 변호사는 "근로기준법 제36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가 사망 또는 퇴직한 경우에는 그 지급사유가 발생한 때로부터 14일 이내에 임금, 보상금, 기타 일체의 금품을 지급해야 한다"며 "델리오 씨가 사업장을 이탈함으로써 사실상 퇴직한 만큼 은행에 예치된 돈은 2주 이내에 사측이 델리오 씨에게 알아서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연수생을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정 변호사는 "산업연수생이라 할지라도 일정 시간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임금 등을 지급받는 경우에는 근로자로 볼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외국인 산업연수생의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노동부의 지침에 따르면 연수생은 '연수수당의 정기, 직접, 전액, 통화불 지급 ' 등의 보호를 받게 돼 있어 대우건설의 이같은 행위는 노동부 지침과도 어긋난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개선책과 근본적 대책 마련 절실"
  
▲ 필리핀에서 온 산업연수생 델리오 씨. ⓒ 프레시안

  델리오 씨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사업장을 이탈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며 "소장이 바뀐 뒤 잦은 폭력에 시달리다 보니 회사에는 미안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우건설은 연수생의 무단이탈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막기 위해 이같은 '재산권 침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사업장을 이탈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책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여권 압류, 강제 적금을 통한 월급 일부 압류 등을 통해 강제로 사업장 이탈을 막겠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이면서 동시에 인권침해"라고 목소리를 모았다.
  
  고기복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공동대표도 "근본적인 정부대책과 고용주의 인식전환이 없으면 개인 재산권을 침해하는 이같은 일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김규환 국제엠네스티한국지부 부지부장은 이번 사건은 "임금보호에 관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위반이면서 동시에 인종차별 금지와 관련한 협약의 위반"이라며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이같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 사례를 막기 위해 "정부 당국의 철저한 감시·감독과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