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전태일인가](3)또 다른 ‘2010년의 전태일’ 이주노동자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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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범죄자도 노동기계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지만 상습적 임금 체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들은 또 다른 ‘2010년의 전태일’이다. 이들은 ‘불법 체류자’ ‘실업 증가의 주범’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쓴 채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마저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2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120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 이주노동자 대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쇠사슬을 목에 걸고 한국의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방글라데시에서 온 라파(29·가명)는 경기 안산의 비닐공장에서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후 1시까지 밤을 새워 하루 14시간씩 일한다. 주·야간으로 24시간 공장을 돌리는 사업주의 방침 때문에 누군가는 밤에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야간근무를 택한 이유는 따로 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출입국관리사무소 단속반원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라파가 한국인 ‘사장님들’로부터 공식적으로 받지 못한 임금은 1300여만원. 수차례 부딪히고 깨지고서 ‘체불임금 지불각서’까지 어렵사리 받아냈지만 지급하기로 한 돈은 정해진 날짜를 넘기거나 그보다 적게 들어오기 일쑤다.

“못 받은 임금이라도 모두 돌려받을 수 있다면, 고국으로 돌아가 나처럼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을 텐데….” 기회의 땅이라 생각했던 한국은 그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겨줬다.

라파는 2001년 20살의 나이에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13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먹고 살기에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대학생이었지만 학업을 계속하기 힘들었다. ‘한국에서 일할 분을 찾습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인력송출업체에 약 1000만원의 거금을 줬다. 돈은 땅을 팔고 이웃에게 빌려 겨우 마련했다. 한국에 도착해서야 1000만원이란 취업비용이 사기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 150만원 정도면 수수료 등 제반 비용이 충당된다는 것을 친구들을 통해 들었다. “나라마다 나쁜 사람은 있잖아요.” 한국 생활 10년 동안 분한 일이 너무 많아 체념한 듯한 말투였다.

체불 임금 문제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미등록’ 신분인 라파에게는 큰 약점이다. 정부는 물론 많은 한국인들도 ‘미등록=불법체류자=범죄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들이 은연중에 ‘불법사람(미등록 신분 이주노동자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말)’에게는 돈을 덜 줘도, 늦게 줘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권을 잃어버린 미등록 신분의 친구가 있었어요. 대사관에 찾아갔더니 경찰에서 분실신고 확인서를 받아오라고 하더군요. 경찰서에선 여권번호를 확인하다가 불법체류자라는 걸 알고는 곧바로 신고해서 방글라데시로 출국시켜버렸죠. 하지만 여권부터 찾아주는 게 경찰이 할 일 아닌가요. 어떻게 한국 정부를 믿겠어요? 폭행을 당하고 강도를 당해도, 심지어 친구가 살인을 당해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게 사람이 살 만한 곳인가요.”

고된 노동에 치여 외출도 하기 힘들지만 더 큰 두려움은 강제출국당하는 것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강화된 단속은 그의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불법사람’은 마치 사람이 아니라는 듯한 따가운 시선, 게다가 이슬람교 신자를 모두 ‘테러리스트’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를 힘들게 한다. “테러는 안 하는 거지?” “오사마 빈 라덴하고도 잘 아냐?” “테러하게 생겼다”는 한국인 노동자 친구들의 장난섞인 말도 비수가 돼 가슴에 박힌다.

이주노동자 라파(가명)가 3일 자신이 일하는 경기 안산의 비닐 공장에서 기계장치를 둘러보고 있다. |라파 제공

“2002년 월드컵 때는 불법사람들을 많이 합법화해줬어요. 이미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을 한국사람으로 받아준 것이죠. 비록 일은 힘들고 돈은 잘 못 받아도 그렇게 인정받으면 더 열심히 살려고 하지 나쁜 짓을 하겠어요? 왜 우리가 범죄인 취급받아야 하는지 정말 마음이 아파요.”

네팔인 데비(44·가명)는 매일 밤 코에 약을 뿌리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다. 7년 전 경기 용인에서 용접 일을 할 때 쇳가루를 하도 들이마신 탓에 만성 비염을 얻었다. 수술을 하고 싶어도 ‘미등록’ 신분이라 병원에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고국에서 부인이 보내준 물약을 매일 사용할 뿐이다. 그는 “지금은 서울 청량리의 원단상 ‘사장님’이 월급도 제때 꼬박꼬박 주고 야간 잔업도 거의 없어 나아졌다”면서도 용인 공장에서 용접할 때의 일은 잊지 못한다고 했다.

“10년 동안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못 받은 월급을 따지면 1년은 공짜로 일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월급이 밀리면 그냥 옮기는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살지요. 용인에서 못 받은 428만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때 일은 또렷하게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용인 공장에선 밤 1시까지 일해도 아침 8시면 또다시 일을 해야 했다. 공장 안을 가득 채운 쇳가루에 눈은 항상 시렸고 목은 늘 따가웠다. 지금도 저녁 때만 되면 눈이 충혈되는데 그게 다 그때 얻은 병이다. 데비도 단속과 강제출국이 가장 큰 걱정이다. 기자와 만나는 동안에도 수원에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단속당해 강제출국될 처지이니 집에 있는 물건들을 네팔로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그나마 나은 ‘인기있는’ 업체들이 서울에도 있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일수록 단속반원이 들이닥치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오히려 이제는 기피하는 곳이 됐다고 덧붙였다.

“고향 사람 중에 일본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어요. 거기도 미등록 외국인 단속이 심하다고 하지만, 최소한 일터나 집으로 단속을 나오진 않는대요. 일할 때도 항상 문을 걸어잠그고 눈치를 봐야 하는 건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에요.”

한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한국 사장이 시키는 일을 기계처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24시간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다.

태국에서 온 가녹(26·여·가명)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고용허가제에서 요구하는 테스트 점수가 낮아 농장 비자를 받았다. 태국에서는 전혀 해본 적이 없는 ‘밭일’이지만 2008년 7월 입국한 뒤 지금까지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열심히 일해왔다. 한 달에 쉬는 날은 이틀, 월급은 90만원이다. 하지만 월급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평상시보다 일이 적은 날은 3만원을 빼고 받는다. 최대치가 90만원이란 얘기다.

가장 힘든 것은 육체노동이 아니라 젊은 농장주의 성희롱이다. 한적한 곳에서 태국 여성 2명, 한국인 할머니와 함께 일하다 보니 농장 주인은 시도 때도 없이 성적 농담과 신체접촉을 시도했다. 새 일을 찾고 싶지만 공장 취업은 원천적으로 제한돼 있어 저임금과 성희롱에 시달리면서도 농사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고단한 생활, 팍팍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꿈을 얘기했다. 라파는 130여만원 되는 월급의 절반을 가족들에게 보내면서도, 나머지 돈을 쪼개 방글라데시의 소년소녀 가장 20여명을 후원하고 있다. 고국에 돌아가 약사가 되는 게 꿈인 그는 “밤낮이 수시로 바뀌어 몸이 너무 피곤하다”면서도 “방글라데시에서 보내온 약학 서적을 한쪽이라도 매일 보려고 한다”고 했다. 데비는 내년에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이 의사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10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아들의 대학 뒷바라지만 할 수 있다면 그때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가녹은 태국에 돌아가면 한국식 네일아트숍을 열 생각이다. 그들은 ‘노동하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