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 멱살잡이, 폭행…난민을 거지 취급하는 코리아”
새해 초 파키스탄인 동성애자가 낸 난민 신청 행정소송에 대해 법원은 이례적으로 승소 판결했다. 첫 ‘동성애자 난민’ 술람 차드리 씨(가명)를 <시사IN>이 단독으로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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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2010년 01월 15일 (금) 10:32:19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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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4일 법원의 ‘동성애자 난민’ 인정 판결로 풀려난 파키스탄인 굴람 차드리 씨. 이번 판결은 정치적 박해나 인종·종교 차별 등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 성적 취향으로 박해받는 자에 대한 국내 첫 난민 인정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판결 후 <시사IN>과 처음 접촉한다는 굴람 씨 얼굴에는 불안감이 채 가시지 않았다. 법무부가 불복해 항소할 경우 다시 수용시설에 갇히고, 난민 인정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아직 그에게 난민 인정서를 발급하지 않고 ‘일시 보호 해제’ 조처만 취한 상태다.

파키스탄에서는 무슨 일을 했고, 왜 한국으로 건너왔나.
 변호사로 일했다.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이 친족들에게 발각된 건 결혼 후였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할 처지에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한국에 건너왔다. 내가 자랄 때 부모님은 동성애자인 걸 눈치챘지만 늘 "우리가 죽으면 이 아이를 누가 돌보겠나"라고 한숨을 쉬며 천사처럼 비밀을 지켜주셨다.

   
결혼 생활은 어땠나.
선천적으로 동성애자로 태어났지만 이슬람 율법에 동성애는 사형이기 때문에 노출하지 않은 채 결혼해 두 아들까지 두었다. 아들 둘은 지금 각각 오스트레일리아와 스페인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동성애 취향으로 결혼 생활이 불행했고, 아내는 걸핏하면 ‘죽여서 동물 먹이로 주고 싶다’고 말할 만큼 나를 증오했다.

이슬람 국가에서 동성애자는 죽임을 당하나.
파키스탄에서는 동성애가 발각되면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조차 적대시한다. 1994년 내 동성애 취향이 발각되면서 일가친척 30여 명이 대책회의를 열어 이슬람 율법으로 ‘명예 살인’ 시키기로 한 뒤 형제들 손으로 나를 죽이는 결정을 했다. 밤에 자다가 침대에 꽁꽁 묶여 흉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몸부림치는 순간 어머니가 끼어들어 목숨만은 건졌다. 내 직업이 변호사였지만 차마 나를 명예살인하려 한 형제들을 고소할 수 없었다. 그 길로 탈출해 전전하다가 한국으로 건너왔다(그는 오른쪽 머리에 깊이 팬 10cm가량의 흉터를 보여줬다).

동성애 파트너도 난민 신청을 했는가.
파키스탄에서는 남자친구를 지키느라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와 남자친구를 여러 명 사귀었지만 그들은 아직 동성애자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따로 난민 신청을 하지 않았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이 난민을 거지 취급하기 때문에 나도 오랫동안 난민 신청하는 것을 망설였다.

법무부가 두 차례 불허한 난민 지위를 이번에 법원이 인정했는데, 수용시설 생활은 어땠나.
출입국관리소에 11개월 10일 동안 구금돼 있었다. 그곳 공무원의 1차 업무가 구금된 외국인을 추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난민 신청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통역이 없어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일이 다반사고 일부 출입국 직원들은 욕설에다 걸핏하면 멱살잡이와 폭행을 하기 일쑤였다. 난민으로 인정받아도 거지 취급하는 분위기라서 한국에 오래 살기 힘들 것 같다. 아들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스페인으로 가는 게 소원인데 이번에 난민 인정 판결로 그 나라 비자를 받을 길이 열렸다.

자식들과는 연락하고 지내나.
내가 동성애자인 것이 한국에서 공개되면 자식들도 충격을 받는 등 피해가 갈까봐 연락을 안했다. 이제 자식들을 만나고 싶고, 찾아갈 수 있게 됐으니 연락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