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옴...



[이주노동자, 영상활동가 “미누”의 강제송환반대]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17년 세월을 인정받고 싶습니다.


(아래 글은 현재 노동대학 20기 학우인 신순영님의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졸업논문“이주노동자
의 사회적 배제와 적응에 관한 생애사 연구 : 장기체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중 미누님의 생애
와 관련된 글입니다.)



네팔, 미누씨의 살아온 이야기와 생각들.

미누씨는 1972년 네팔의 버히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 주둔군 캠프 안에서 일하는 약사셨고 어
머니는 전업주부셨는데, 큰 어머님이 계시고 그 쪽에 누나가 둘 그리고 어머니 아래서 형과 미누씨가 자
랐다. 원래 인도인이었던 아버지가 네팔에 근무 때문에 오셨다가 어머니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함
께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용병으로 취업하는 네팔 사회에서 아버지는 군인은 머리 없는 사람들이나 가는 데라
며 공부를 강조하셨고,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형 대신 미누씨에 대한 기대가 각별해 많은 돈을 들여 컴
퓨터 학원을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으셨다. 어머니는 평소 가족들이 먹다가 남긴 밥을 다 드실 정도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분이셨는데, 큰 어머님에 대한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더사
인 같은 큰 명절 때는 항상 큰 어머님을 찾아 인사를 드리게 하고 누나들을 챙기도록 아들들에게 당부를
하셨다.

어렸을 때는 주로 포카라에서 주로 성장했고 대학 때는 사회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가난
하고 취업도 쉽지 않은 네팔에서 이주는 젊은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꿈꿀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고, 특히 유명한 관광지인 포카라에서 자란 미누씨는 어려서부터 외국인들과 부대끼는 게 낯
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통과의례처럼 이주노동을 계획하면서 유럽보다는 인종 차별이 없을 거
라는 생각으로 아시아를 택했고, 당시 88 서울올림픽 소식과 함께 우연히 신문에 실린 남산타워의 사진
을 보고 한국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1992년 2월 22일에 도착한 한국은, 네팔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추워서 밖에서도 에어컨
을 튼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도착하자마자 이태원의 일자리 브로커를 찾아갔고, 여관 방바닥에서 잠을 청
하며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조차 낯설고 무시 당하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한국에서의
첫 날 밤을 보냈다.

대부분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는 데 비해 미누씨는 특이하게 식당이 첫 직장이 되었다. 레스토랑 일자리
가 있다는 브로커의 말에, 그곳에서 일하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빨리 한국말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자청해 의정부의 한정식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설거지와 주방 보조일을 주로 하면서
나름대로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며 식당일을 배우게 되었지만, 사장이
바뀌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그만 두면서 미누씨 역시 그곳을 나왔다.

동료를 따라 다시 취직한 곳은 의정부의 나이트클럽이었는데, 그곳에서도 금세 사람들과 친해지고 사장
의 신뢰를 얻었고, 한국말도 많이 늘어 잘 할 수 있게 됐다. 또 한국 노래를 배워 부르곤 하면서 의정부에
서는 한국 노래 잘 부르는 네팔 이주노동자로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노래를 하고 싶은 욕심과 주말마다 친구들을 만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
다.

처음으로 일하게 된 곳은 군포의 밸브 만드는 공장이었다. 쇠로 된 밸브를 코팅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광
물질이나 유해물질을 다루는 일이었고 그 일은 이주노동자들에게만 할당되었는데 당시에는 별로 힘들지
않아 좋아했지만, 나중에야 그게 꽤 위험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 공장은 얼마 있어 당진으
로 이사를 가고, 그 다음에는 구로공단 독산동의 봉제공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구로공단의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봉제공장 일을 배우다가 동대문 봉제공장에서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
는 정보를 입수해서 아예 옷을 직접 만들고 돈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동대문쪽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동
대문에서 일을 하면서는 처음에는 월급쟁이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보조로 그리고 나중에는 기술자로 일하
게 되었고, 한국인 동료와 일대일로 장 당 얼마씩 가격을 계산해서 나눠 갖는 식으로 5년가량 일하면서 봉
제쪽 일은 미싱과 시다를 다 할 줄 알게 되었다.

스스로가 말하는 미누씨는 한 번 마음을 먹고 일을 시작하면 무섭도록 집중하는 성격이어서, 일을 배우
는 시기에는 완전히 손에 익을 정도로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엄청 노력을 했다. 일을 하나 맡게 되면 똑같
은 작업복을 일주일 내내 입고 모자랑 마스크 쓰고서 사람들이 기계냐고 할 정도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
고 작고 좁은 공장에 날리는 먼지 때문에 눈썹까지 다 하얗게 될 정도로 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일하던 중에 외환위기가 왔고 미누씨가 일하던 공장도 어려워져서 가족처럼 일하던 공장을 먼저
그만두고 나왔다. 당시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온통 회사가 부도나고 사람들이 자살하고 노숙인이 되고
그런 이야기들을 전하기에 바빴고, 한국 사람들이 다들 고통을 겪고 있는데 자신이 출근하고 일하는 게
어쩐지 눈치 보이고 미안하고 죄책감도 느껴져서 사장이 말리는 데도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2000년부터는 직접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공평하게 일하고 나누면서 일
했고, 직접 경영을 하면서부터는 노동자로 일할 때 미처 몰랐던 어려움도 알게 되었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한편 이따금 이주노동자 단체들에서 하는 행사가 있을 때 초대 받아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마침 팀
으로 공연하던 네팔 친구들이 외환위기 때문에 돌아가고 혼자 남은 친구가 있어 그때부터 함께 노래하게
됐다. 이후에 한 상담소에서 명절 때 텔레비전에서 하는 외국인 노래자랑에 출전해보겠냐고 권유해서 신
청하고 나갔다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미등록 상태여서 조금 걱정을 했는데 방송국에서는 전혀 개의치 않
았고 오히려 상을 받게 되어 쑥스러웠다.

처음에는 그렇게 노래하는 일 외에 다른 활동이나 단체와의 연계가 전혀 없었는데, 조금씩 알려지게 되
고 여러 곳에서 연락이 오면서 다양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당시에는 운동을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이 전혀
없었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면서 미누씨는 언젠가부터 우리를 이웃으로
여겨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이 시작되었을 때, 미누씨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불법체류자
를 신고하라는 안내방송 같은 것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전에도 이따금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집회
나 시위에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았었지만, 그 방송을 들은 이후로 미누씨는 스스로 농성장을 찾게 되었
다. 그리고 성공회성당 농성에 합류하여 농성단의 일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도 낯설기만 했고 이주노동자
라는 말도 강제추방이라는 말도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어려운 한국의 투쟁가 대신 부를 쉬운 노래가 필
요해 구호를 모아 노래를 만들다가 밴드(Stop Crack Down, 스탑크랙다운)까지 결성하게 되었다.

85일 간의 농성이 끝나고 다시 일터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고 외부인 취급하면서 섞이기 싫어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답답
하기도 했고, 농성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상황들도 알게 되면서 사
회운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시 분위기 상 언제 공장으로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는 위기감도 있었고, 그 즈음부터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후 서울 용산의 <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에서 몇 개월 간 일을 했고 그러면서 단체들의 어려움과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 같은 걸을 알게 되면서 새롭게 공부가 됐다. 물론 단체는 돈이 없지만 진심을 담아
활동하는 게 좋았고 또 그렇게 활동하면서 한국 사회와 이주노동계의 흐름 같은 것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단체에서 몇 개월 간 활동하던 중에,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해보
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거기에 합류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MWTV(이주노동자의방송) 일과 농성
장에서 결성한 밴드 활동 등을 병행하며, 온전히 이주노동자 활동가로서 사회운동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
다.

한편으로는 개인 생활이 거의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 고향과 집에 대한 그리움이나 혼자라는 외로
움을 묻어버리고 오히려 덤덤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가족들의 얼굴
은 기억 속에서 점점 흐려지는 대신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훨씬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한
국에서 살면서 이따금 연애를 하기도 하고 오래 만났던 애인도 있었지만, 주로 혼자서 생활하고 바쁜 활
동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던 미누씨는 이제 가족의 느낌이라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네팔로 돌아간다면,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가족이라면 주로 어떤
말들을 하고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 이따금 궁금해지기도 한다. 게다가 몇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
고, 그럼에도 네팔로 갈 수 없었던 것을 다시 떠올리면 그 마음을 말로 다 할 수 없다.
가족이란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아지고 외로움과 슬픔이 먼저 밀려오고, 고아가 된 느낌이 드
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이제는 가족이란 것이 미누씨 스스로에게 새로운 개념, 새로운 분야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초에 네팔에서 한국으로 올 때 미누씨의 계획은 딱 3년만 돈을 벌고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나버렸다. 하지만 사실 애초의 그 계획은,
이주노동의 삶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했던 상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필
요한 많은 것들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생활하면서 들어가는 비용 같은 것 역시 전혀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이 돈을 벌기만 하고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한국사람 못지않게 소비할 수밖에 없다.

미누씨의 형은 영국 용병으로 미누씨보다 먼저 홍콩으로 떠났었다. 어렸을 때는 많은 네팔 사람들이 영
국 용병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고, 특히 돈을 벌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한
다는 사실이 비극적으로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정적으로 영국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정부의 여러
가지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형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생각할 때 오히려 그런 형의 선택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누씨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비록 아직 한국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지만, 사회운동
을 시작하고 만나는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는 일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문화라는 구호가 범람하는 지금도 그 다문화라는 것에 이주노동자가 포함되는
지 의문스럽고, 백만 이주민 시대라고 말할 때 설마 이주노동자도 이주민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건지 의
문스럽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이제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준비 역시 한국 사회가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미누씨 자신처럼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다
고 생각하고 그러한 책임감으로 활동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물론 만족스러운 활동에 비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빈 부분이 많지만, 그런 빈자리 역시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활동을 통해 채워나가겠다고 생각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