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쏘다④] 비운의 파이터, 추성훈과 아키야마  

프레시안   2007-04-06 오후 12:35:45    

  
  "지난 해 전국체전에서 용인대 선수와 경기를 했는데 누가 봐도 성훈이가 이긴 경기였는데 판정에서 졌어요. 심판에게 항의했더니 심판 한 명이 성훈이에게 '네가 이해해라. 할 수 없지 않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하더랍니다. 저도 그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는데, 성훈이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한 때 유도간판스타였던 추성훈 선수의 어머니 유은화 씨가 <뉴스메이커>(2001.01.25)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심정이다. 믿었던 모국의 배신. 그 배신은 일본이 우리에게 주었던 아픔보다 더 아팠다고 한다. 하기야 믿었던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도망간다면 화내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추성훈은 그렇게 믿었던 어머니의 땅에서 버림받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두 개의 민족을 양 어깨에 달고 말이다.
  
  
이방인으로서의 추성훈
  
  우리는 '한 민족'이다. '단일민족'을 '반만년 역사의 자랑'으로 내내 세뇌 받아 왔던 우리에게 어느새 외국인들은 모두 '이방인'이 돼 버렸다. 그 이방인의 범주에 오늘 내가 말하려는 이종격투기 스타 아키야마 요시히로가 있다.
  
  그는 처음엔 추성훈이라는 한국이름의 유도선수로 알려졌다. 재일교포 4세였던 그는 1974년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고 한국 유도대표상비군에까지 선발된 적이 있던 아버지 추계이 씨의 영향을 받아 3살 때 도복을 입었다. 일본에서 유도를 시작했던 그는 고교 시절 전국대회를 휩쓸었고, 긴키대학 시절인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일본 관서지방 유도대회를 3연패했으며, 일본 명문실업팀들의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지독한 실력파라서 그랬는지,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최고가 되길 원했고 그것은 '국가대표'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마음먹었다. 그것도 일본이 아닌 한국국가대표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모국인 한국으로 건너와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부산시청에 둥지를 튼다. 1998년이었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났던 그도 처음부터 알려지진 않았다. 1998년과 1999년에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추성훈은 두 번 모두 3위를 차지하는 초라한 성적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부터 주변에서 '재일교포'라는 딱지와 함께 편파판정의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그게 다 연습부족이려니 했단다. 이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서 결국 그는 2000년도 한국마사회배 코리아오픈 국제유도대회 81㎏에서 금메달을 따낸다. 국가대표의 길에 한 걸음 다가서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내 번번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석연찮은 판정패로 좌절의 쓴맛을 봐야 했고, 이때부터 그는 일본귀화를 생각하게 된다.
  

  '한판으로 이기지 못하면 판정에서는 진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겠다는 생각을 60%정도 굳힌 상태입니다."

  
  2001년 초 추성훈이 한 말이다. 국내유도계의 텃세를 이기지 못하고 국가대표를 포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같은 해 3월 22일, 몽골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의 기회가 왔고, 결국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어렵게 기회가 왔으니 최선을 다해 보답하겠습니다." 남다른 각오로 덤볐기 때문일까. 그는 지금까지 맺혔던 한을 이 대회에서 모두 풀어버리려는 듯했다.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경기에서 그는 예선전부터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한판'으로 끝내버리고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건다. 역시 추성훈!
  
  그 때 그 경기를 볼 수 있다면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특히 일상의 스트레스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껜 특효약이 될 듯싶다. 10초에서 길게는 1분 안에 모든 경기를 후련하게 '한판'으로 끝내버리는 그 괴력. 같이 본 여자친구는 '멋있다'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난 서글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한판'이 추성훈이 가지고 있던 '강박증'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판으로 이기지 못하면 판정에서는 진다"라는 강박증. 그 만큼 그 동안 국내유도시합에서 받았던 편파판정의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았다.
  
  이러한 서글픈 감정이 비단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이는 곧 현실이 된다. 사실, 첫 태극마크를 단 이후 남자 81㎏에서 추성훈을 따라갈 적수는 없었다. 그 동안 추성훈의 벽이었던 조인철 선수도 추성훈에게는 번번이 패했다. 2001년 4월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및 최우수선수, 6월 제10회 FAJR국제유도대회 우승, 10월 전국체전 우승, 그리고 조인철 선수의 은퇴까지. 이미 국내 유도 81kg에서 추성훈은 최강의 자리를 굳혔고, 2002년 부산아시아게임에서의 국가대표까지도 예상됐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일본귀화를 선택한다.
  

그의 금메달에 "조국을 메쳤다"고 답한 한국
  
  "조인철 선수가 은퇴하기 1년 전부터 몸이 안 좋아 실력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것을 성훈이는 알았습니다. 선수끼리 (도복을) 잡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훈이에게 기회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에선 조 선수의 은퇴를 만류했습니다. 성훈이가 많이 실망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누구는 몸이 안 좋아 은퇴해야 하는데도 만류하고, 성훈이에게는 기회를 주지도 않고. 성훈이가 말은 안 했지만 그래서 조인철 선수가 은퇴한 것을 알고도 귀화한 것 같습니다."(뉴스메이커, 2002.01.24)
  
  추성훈의 어머니 유은화 씨의 말이다. 조국을 위해 피땀을 흘렸고 결국 금메달까지 따왔건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너희 나라로 가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재일동포지만 일본에서 일본선수와 시합을 해도 경기장 안에서는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절규어린 호소는 계급, 인종, 국적, 성별을 초월하며 정당함을 고수해야만 하는 스포츠에 '야누스의 두 얼굴'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81kg급 결승에서 한국의 안동진에게 조르기를 시도하고 있는 추성훈 ⓒ연합뉴스

  결국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했고, 2002년 부산아시아게임 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아키야마 요시히로'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예선에서 결승까지 무난하게 올라온 아키야마는 결승전에서 한국의 안동진(경남도청)과 붙었고, 심판판정까지 간다. 그 순간 그는 '귀화를 결심하게 했던 재일동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불현듯 생각났다'고 한다. '설마…', '괜찮을 거야, 정말 이번에는 괜찮을 거야. 심판들이 모두 외국인이니까'라며 1시간 같았던 발표 전 10초의 시간 동안 그는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결국 2-1. 아키야마의 승리로 결정 났고, 그는 순간 관중석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관중들은 박수가 아닌 야유로 답한다. 조국의 배신자라고. 한 스포츠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조국을 메쳤다'고…
  
  
왜 확실한 '금메달감'인 그를 내팽겨쳤을까?
  
  추성훈에게 가해졌던 조국의 냉담과 차별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우리의 민족성을 지적한다. 배타적이면서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민족성을 바탕으로 순수하지 못한(?) 혈통에 린치를 가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민족'이라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를 교육받은 우리로서는,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보면 공격적이고, 배타적이 된다.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교육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조금 나아졌다 싶다가도 중요한 순간엔 여지없이 그 기질을 발휘하는 민족성 때문에 '고령화와 출산율의 감소로 인한 노동인구 축소'라는 위기담론 속에서도 타민족의 귀화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는 폐쇄성을 지키게 된 것 아닐까?
  
  지난 2002년 한국축구계가 월드컵 16강을 위한 최후의 승부수로 '귀화카드'를 꺼낸 바 있다. 프랑스는 말할 것 없고, 가까운 일본마저 용병선수를 귀화시켜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일까. 우리의 배타적 민족성도 이처럼 국가적 대업을 위해서라면 누그러질 수 있겠구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이기기 위한 하나의 전략 차원에서 나온 카드로도 생각할 수 있다.
  
  현대 스포츠에서 1위나 금메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거의 강박관념 수준이다. 국내의 체육고등학교에선 전국체전에서의 메달은 금메달일 뿐, 동메달은 '똥메달' 취급한다. 이런 사람들이 왜 조인철까지도 확실한 '금메달 감'으로 인정했던 추성훈을 내팽개쳤을까?
  

  "네가 이해해라, 할 수 없지 않느냐"…그 놈의 연줄이 뭐길래
  

▲ 그는 언론으로부터 "한국 유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추성훈"이라는 설명에 이어 "조국을 메쳤다"는 비난을 들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추성훈. ⓒ연합뉴스  

  잠시 한국의 '정(情) 문화'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만큼 '정'에 약하고 민감한 사람들도 드물다. 하지만 이런 이 집단끼리의 내부결속을 위해 너무 강하게 부각되면 이른바 '정실주의(情實主義)'로 나타나 부정부패의 원인이 된다. 이른바 '제 식구 챙기기' 현상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체육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몇 년 동안 한솥밥 먹고 동고동락하며 운동했던 사람들끼리 오죽하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의식이 형성이 되고 소위 '연줄공동체'가 발달된다. 온갖 혜택과 보호를 받으면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패라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연줄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족'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그 순간만큼은 아시아게임이나 올림픽에서의 금메달이라는 '대의명분'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재일교포인 추성훈은 '연줄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일본에서 실력 있는 유도선수로 자랐기에 유도국가대표로서 그의 내적조건은 충분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성공의 지름길인 '연줄'이라는 외적조건이 부족했다. 이러한 연줄 때문에 고생했던 선수가 어디 추성훈뿐이겠는가. 쇼트트랙에서부터 농구나 축구에 이르기까지 연줄에 따른 배제의 논리가 발휘되지 않는 곳이 없고, 그 논리에 고통받는 선수들은 음으로 양으로 늘어만 간다. 국가대표선발전에서 항상 '경기에선 승리했지만, 판정에서 졌던' 추성훈에게 '네가 이해해라,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어떤 심판의 측은한 한 마디는 '난 이 가족구성원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으로 고통 받게 했을 것이다.
  

'벌거벗은 삶'에서 탈(脫)하다
  
  가족의 확장으로서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에 속하지 못한 자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언제라도 내팽겨질 수 있는 벌거벗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법의 보호도, 경제적 도움도 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 그것이 자신들의 가족을 주류로서 더욱 빛나게 해주니까.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G. Agamben)은 "현대국가는 자신들 내부의 주류를 더욱 빛내기 위해 빈민들이나 이주노동자들처럼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조건으로서 '벌거벗은 삶'을 양산해낸다"고 말했다. 이처럼 벌거벗은 삶으로서의 존재를 '신성한 인간'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부른다.
  
  '한국 유도계의 주류를 더욱 빛내기 위해 희생당한 추성훈'이라고 말하면 논리적 비약일 수도 있겠다만, 어찌됐든 그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배제당한 '한국체육계의 호모 사케르'였다.
  
  결국 그는 '벌거벗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이종격투기라는 전쟁터로 나간다.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서 안타까워하는 그를 측은히 여겼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선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적극적인 권유로 말이다.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아마도 이종격투기라는 장(場)이 민족코드나 배제나 차별의 논리에서 탈(脫)한, 실력만이 유일한 기준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추성훈은 2004년 12월 31일 열린 K-1 연말 이벤트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국제복싱연맹 헤비급 챔피언 출신 보타를 맞아 1라운드 1분54초 만에 팔꺾기 기술을 이용해 기권승을 거두며 데뷔 무대를 승리로 장식한다. 그 후 2005년 11월 5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K-1 '히어로스' 대회에 한국 쪽 주장으로 참가한 그는 1라운드 중반 오쿠다 마사카쓰(일본)에게 잇단 펀치세례를 퍼부은 끝에 티케이오(TKO)승을 거뒀다.
  
  경기 뒤 그는 "한국에 와서 경기해 너무 기쁘다"며 "나는 지금 한국 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지만 내 가슴에는 한국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소리쳤다. 또 오쿠다를 쓰러뜨리고 난 뒤 벌떡 일어서 양쪽 어깨에 붙이고 나온 태극기와 일장기를 번갈아 손바닥으로 탁탁 내리치며 자신은 두 민족을 포용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추성훈도 저고, 아키야마도 저에요"라고 외치며.
  
  
두 민족, 그리고 두 이름: '일본인' 추성훈과 '한국인' 아키야마
  

▲ 유도선수에서 이종격투기 선수로 변신한 추성훈 ⓒ뉴시스  

  이종격투기 투사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던 추성훈. 그는 한국에서 경험했던 유도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지우고자 이종격투기에 몸을 던져 챔피언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다. 유도선수 시절 모든 경기를 한판으로 끝냈던 것처럼 추성훈은 K-1에서도 '테이크 다운 후 역십자 꺾기(암바)'라는 공식에 따라 시합을 정리해 버렸다. 적어도 그에게 이종격투기의 공간은 걸리적거릴 것이 없는 무대였다. 하지만 그러한 그에게 또 다시 불길한 문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도에서 경험했던 차별이 이종격투기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었다. 정통 일본인과 아류 일본인의 구별짓기.
  
  지난 2006년 12월 31일 추성훈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K-1 프리미엄 2006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일본 격투기의 영웅 사쿠라바 가즈시(37)와 맞붙었고, 정말 간단하게 1회 TKO승을 거둔다. 경기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참 시시하게 끝났다. 물론 급소를 맞은 당사자는 시시하지 않았겠지만.
  
  문제는 경기 후. 사쿠라바가 '추성훈이 몸에 오일을 발랐다'며 집요한 항의를 거듭했고 결국 K-1 주최사인 FEG에 정식으로 제소했다. 재검증 끝에 추성훈이 잘 모르고 중계카메라 앞에서 스킨로션을 몸에 바른 것이 포착돼 주최사는 이를 단순과실로 인정해 게임을 무효 처리했고 그의 파이트머니를 몰수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에 더해 FEG는 "K-1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사쿠라바 가즈시와 대결할 때 스킨크림을 몸에 바르고 링에 오른 추성훈에게 무기한 출장정지 처분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면서 더욱 무거운 죄를 부과했다.
  
  일본의 격투기 영웅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힌 괘씸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의 텃세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러한 반칙을 하면 원래 그러한 징계를 먹는 것일까? 물론 일회성의 사건을 가지고, 그것도 추성훈의 과실이 인정되는 사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명 그곳에서도 정통 일본인과 아류 일본인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편 가르기를 한다. 모든 사회의 유기체적 작동방식처럼 말이다.
  
  
끝나지 않을 차별의 시련…그러나 그를 믿는다
  
  왜 이토록 차별과 배제의 악연은 추성훈을 따라다니는 것일까. 어째서 한국의 추성훈도, 일본의 아키야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일본인 추성훈'과 '한국인 아키야마'라는 모순적 재현 때문 아닐까? 한국에서는 일본인 추성훈으로 차별받고, 일본에서는 한국인 아키야마로 외면당하는 모순. 이종격투기만큼은 모든 차별과 배제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이런 시련은 한국에서의 기억하기 싫은 경험과 중첩되는 경험일 것이다. '넌 그런 놈이야'. 이 꼬리표가 추성훈이 죽는 그 날까지 따라다닐 것이란 우울한 생각을 하긴 싫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것이 삶의 조건인 것을. 그리고 추성훈 그대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선천성인 것을.
  
  추성훈과 아키야마. 그는 한국과 일본에서 받아왔던 차별을 토양삼아 성장한 하나의 소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끼로 찍어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소나무 말이다. 그가 앞으로 있을 난국에도 흔들리지 말고 이겨나가길 바란다. 그대가 가지고 태어난 피, 뛰어난 격투 실력, 비(非)정통성, 비(非)주류, 강인함 등의 특성은 그대를 소나무 그 이상으로 만들어줄 것을 의심치 않는다.  
    
  

  남상우/충남대학교 스포츠사회학 박사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70406103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