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관리소는 미셸 카투이라 이주노조위원장에게 3월7일까지 출국하라는 명령서를 전달했다. 이미 표적단속을 받아 강제출국당한 1, 2대 이주노조위원장과 달리 그는 이른바 합법적인 등록노동자다. 노동부 고용센터에서 알선장과 사업장 목록을 받아 구직했고 고용센터와 출입국관리소에도 등록했다. 그가 일하는 사업장이 휴업상태라는 점이 출입국관리소로 하여금 그에게 ‘허위취업’이라는 올가미를 씌운 빌미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지 않은가. 고용허가제밖에 없는 한국 땅에서 이주노동자가 허위취업을 했다니 말이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노동허가제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고용허가제의 주체는 고용주다. 노동허가제와 달리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허가받는 주체가 될 수 없는 노동자가 허위취업을 했다? 한국이 이주노동자에게 그렇게 만만한 나라인가?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17년 이상 살았던 내 친구 미누(미노드 목탄)를 가차없이 쫓아낸 당국이다. 사업장에 일감이 없어 휴업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고용주의 책임이지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다. 당국이 차라리 “이주노동자 주제에 무슨 노동운동이냐?”고 말한다면 그 솔직함으로 비열함과 치졸함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행위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국격을 말하는 자 그 누구인가.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회자되기 훨씬 전부터 국가는 ‘자본의 청지기’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한국에선 그 양상이 점점 더 노골화하고 있다. 노동자에겐 이처럼 억압적인 국가가 자본 앞에만 서면 설설 긴다. 이 점은 오늘 49재를 맞는 삼성전자 노동자 김주현씨의 죽음과 관련하여 국가기관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다시금 확인된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안다면 자본과 노동, 그리고 그 모순관계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사회를 모르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도 알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국가 주도의 제도교육을 통해 초중고에 두루 있는 사회교과 시간에 자본과 노동의 모순관계에 관해 공부하지 않도록 기획된 한국 사회 구성원이 자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규정된다는 점까지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김주현씨의 누나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자살한 개인도 문제고 유가족도 문제다”, “돈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따위의 악플을 토해내는 사회구성원들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고용노동부가 ‘노동통제부’나 ‘노동탄압부’에 가깝고, 출입국관리소가 ‘단속추방관리소’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은 어디서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함으로써 분할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내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구분함으로써 노동통제를 강화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몸이 거하는 자리에 관심을 갖는데, 이주노동자의 몸은 이주한 나라의 인권현실과 노동조건의 양면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다. 그들이 처한 현실이 우리 사회의 인권과 노동조건을 알게 해주는 잣대가 되는 까닭이다. 그들의 몸이 놓이는 자리가 개선되는 만큼 우리 사회의 인권과 노동조건이 개선될 수 있다면, 그들에 대한 표적수사와 추방을 모르는 체할 때 그 칼날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미셸 카투이라 이주노조위원장의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민주노총이 나섰고 국제앰네스티가 긴급행동을 요청했으며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법적 대응을 하고 있지만, 시민사회의 더 많은 관심과 연대가 요청된다.

타자를 배제할 때 내부에 대한 억압을 피할 수 없으며, 추방은 내부 망명자를 필연적으로 양산한다. 아아, 이 글을 쓰는 중에 77일 동안 파업에 참여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 한 분이 또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난해 4월에 이미 스스로 이승을 하직한 아내의 뒤를 따라 두 자식을 남겨둔 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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