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 - 홍세화.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 - 홍세화씨 글



<세계화와 인간 부초>

신자유주의로 세계화된 세계에서 자본은 첨단 정보통신 기술에 힘입어 신속하게 국경을 넘나든다. 상품도 세계무역기구(WTO) 등 세계를 실제로 지배하는 권력기관의 자유무역 기조 관철에 의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 자본이 하루에 24시간 동안 세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고 상품이 5대양 6대주를 옮겨갈 때 유독 사람만은 그럴 자유가 없다. 인류가 마음대로 오가며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지구촌은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상, 지구촌이라는 말은 미국화에 지나지 않는 세계화를 낭만적으로 포장하면서 속이기 위해 동원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화로 자본과 상품은 마음대로 이동하는데 반해, 그리고 전 세계 대중매체들이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 아메리칸 생활 방식에 대한 욕구를 일상적으로 부추기고 있는 가운데, 사람에 대한 국경의 울타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인간이 자본을 통제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고 상품을 생산한다는 점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구매력이 있어야 국경을 넘을 수 있고, 적어도 자본이 허용하는 한도에서만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이 점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처지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현대판 노예노동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산업연수생제도나 금년 7월부터 시행될 고용허가제가 오늘날 한국의 자본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자본의 요구에 의해 허용된 이주노동자는 그나마 등록될 수 있어서 ‘3D 업종’에서 노동력을 싼값에나마 팔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착취 이하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 내팽개쳐진다. 그래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등록된 이주노동자들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그런데 이렇게 등록된 이주노동자를 부러워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다. 가령 지금 이 시간에도 유럽 땅에 몰래 상륙하려는 아프리카인들이 생사를 건 모험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 검은 대륙인들이 유럽 땅에 발붙이기 위해 벌이고 있는 절망의 드라마는 과거에 노예로 팔려가던 그들 조상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강한 물음을 제기한다. 과거에는 자기 땅을 떠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들이 지금은 그들의 조상을 노예로 팔았던 사람들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역사는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거에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오늘날 노예노동을 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바뀐 것을 진보라고 말할 것인가?

이주노동자들은 자본 축적과정에서부터 희생자들이었던 제3세계인의 후예들이며, 20세기 이후 자본 지배의 부산물이다. 오늘날 세계를 떠다니는 이주노동자들의 군상은 20:80의 세계화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제3세계인들이 자기 땅을 떠나지 않도록 하는 데서 찾아야 하지만, 그것은 제3세계 발전을 위한 제1세계의 대폭적인 지원과 빚 탕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자본의 논리는 그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제3세계의 빈곤화-인간부초들의 양산’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는커녕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더욱 빈번해진 전쟁으로 ‘세계의 비참’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면서 가련한 부초 인생들을 더욱 양산하고 있다.

세계를 떠다니는 인간 부초들. 그들의 처지는 송출 비용을 힘겹게 지불하고, 혹은 목숨을 무릅쓰고 입국한 나라의 국내노동자들이 처한 노동조건과 그 사회가 소수자들에 보내는 인권의식에 의해 규정된다. 그들은 그 사회의 가장 낮은 생존조건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 땅을 찾은 인간 부초들은 세계의 부초들 중에서 가장 낮은 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 땅을 찾은 이주노동자의 처지는 세계화 시대에 ‘세계의 비참’이 감내해야 하는 한계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위에 1천만 원 대에 이르는 막대한 송출비용을 갚아야 한다는 점은 그러한 상황을 더욱 무겁고 어둡게 만들고 있다.


<노동조건>

끝내 죽음을 택한 한진중공업의 김주익 지회장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유서에 남겼다. 8백만에 이르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고 노동운동을 위축시키는 손배 가압류 제도가 아무런 통제장치 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땅이다. 국내노동자들이 분신 등 극한적인 수단으로 불평등한 노동조건과 사회 불의에 항의하고 있지만 ‘민주화된 시대에 분신이라니...’라는 말만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사회 불의와 탄압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경찰병력이라는 국가폭력과 용역깡패 투입이라는 사적 폭력과 함께 수구신문들의 언론 폭력까지 감수해야 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는 정부와 ‘2만불 시대’에 눈먼 물신지배 사회는 서로 공모하여 국내 노동자들을 극한상황에 내몰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노사관계는, ‘민주화된 시대’에 속하는 2003년의 경우 구속노동자는 144명에 이르지만 부당노동행위로 구속된 사업주는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일방적이다. 이런 것이 수구언론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노조공화국’의 실상이다. 이처럼 국내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곳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그 위에 이주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국내노동자들로부터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인권의식>

70년대에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라는 외국 인권단체의 요구에 대해 박정희는 “인권 좋아하시네!”라고 간단히 일축한 바 있다. 어떤 독재자에게서 인권의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마는, 사회구성원들의 낮은 인권 의식이 독재자가 그런 발언을 공격적으로 할 수 있게 한 배경의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대다수 사회구성원은 인권을 유린했던 독재자들에게 충분히 분노하지 않았다. 분단과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기본적 도리를 지키는 일조차 버거웠던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집단 속에 숨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권에 대해, 아니 인간 자체에 대해 갚을 수 없는 부채의식을 물신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대신 채웠다. 사람들은 물신에 몸을 내맡긴 삶이 몸만 편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 편하다는 점을 차차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땅의 교육과정은 사회구성원들에게 오직 경쟁의식만 부추길 뿐, 연대의식이나 인권의식을 함양시키고 있지 않다. 나라의 정체성으로 규정한 민주공화국은 허울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인권의식이 척박한 땅에서 천박한 자본의 요구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애당초 송출국에서 ‘송출’되고 입국하자마자 ‘분류’되는 ‘노동력’이지 인간이 아니었다. <한겨레> 지면을 위해 만났던 네팔의 교사 출신인 바랄(34) 씨는 이 땅에 처음 들어왔던 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94년에 한국에서 손가락이 잘리거나 다친 사람들 이야기가 네팔 신문에 다 났어요. 제가 한국 가겠다고 할 때 가족과 친척들이 ‘왜 가느냐’고 난리가 났어요. 저는 ‘다 자기 팔자대로 사는 것 아니냐’고 했죠. 처음 한국에 와서 3일 동안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요. 그게 이틀 동안 교육받고 사흘째는 사장들이 와서 하나씩 데리고 가는 거였어요. 그걸 보며 시장에 물건 내놓고 파는 것처럼, 여기서는 인간을 놓고 장사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친구들이 많이 울었어요.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나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한 명 한 명 데리고 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여성이주노동자>

가난한 나라 출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통제 없는 차별의식은 여성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영세 공장이나 식당,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이주노동자는 일상적 성적 차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한국 남성노동자의 임금은 한국 여성노동자, 남성이주노동자, 여성이주노동자로 내려갈수록 낮아진다. 여성이주노동자들을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조선족 여성노동자들도 이러한 차별과 빈곤에서 예외가 아니다. 이 사실은 이 땅의 순혈주의가 천박한 물신주의에 의해 굴절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생리휴가가 없고 임신을 해도 장시간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면서 사산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이 땅의 여성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여성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두 견뎌내야 한다. 특히 여성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성폭력 문제는 남성우월주의와 천박한 물신주의 아래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주여성과 내국인 남성 사이라는 힘의 관계에서 여성이주노동자는 일상적 성폭력에 노출되기 쉬운데 비해,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성폭력의 진상은 대부분 은폐되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주노동자들의 자식은 아예 남의 핏줄로 보는 데 비해 여성이주노동자가 한국 남성의 자식을 낳으면 피를 오염시킨다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강제추방>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강제출국을 강력하게 시행한다. 불법체류자를 고용한 사업주에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정부는 4년 이상 체류한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추방의 칼을 꺼내들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절망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강제추방의 위협 아래 지금까지 목숨을 잃은 이주노동자의 숫자는 알려진 것만 해도 9명,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같은 운명에 처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부의 단속조치가 발표되면서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하였다. ‘노동력’에 지나지 않았던 이주노동자들은 강제추방 앞에서 ‘인간사냥’에서의 인간이 되었다.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의 샤린 씨는 “한국에 와 있는 3천여 명의 버마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4년 이상 체류한 상태”라며 “지금 버마에서는 군부독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는커녕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데 강제추방은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이러한 절박한 현실 속으로 다시금 내던져 버리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강제추방 대상자로 전락한 10여만의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산업연수생제도라는 합법적 노예노동제도를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온 노동자들이었다. 정부는 미등록노동자의 숫자가 40만에 이를 때까지 팔짱만 끼고 있었다. 그 동안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기업주들이 그들을 산업노예로 마구 부려도 모르는 체 눈감고 있었다. 그러던 정부가 돌연 체류기간 4년을 넘긴 미등록노동자들을 강제추방 하겠다며 나선 것이다.

3D 업종 중소기업 인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오래된 이주노동자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주노동자를 위한 인권단체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사업장 이동의 자유도 없이 노예처럼 일하다 허가받은 시간이 지나면 돈 떼이고 병들어도 군소리 없이 사라져 줄 순종적인 노동력! 이게 바로 한국 정부와 자본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평등노조이주지부 활동가의 말처럼 “장기 체류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정부와 자본이 원하는 미숙련 저임금의 말 잘 듣는 노동자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에겐 이주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숙련노동자가 되어갈수록 정부와 자본에게 ‘물갈이’해야 할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다. 또 외국인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5년 이상 체류할 경우 주어지는 권리들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올 7월부터 시행될 고용허가제도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계약기간을 3년으로 제한하고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도록 한 것이나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을 제한한 것 모두 이주노동자를 비인간적인 착취구조에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주노동자는 이주 ‘노동자’가 아닌 인간성을 박탈당한 ‘노동력’일 뿐이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성공회 성당에서 농성하면서 구호를 외칠 때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그 때 순간적으로 ‘나는 지금 인간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나가는 한국 사람들한테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말할 때 갑자기 눈물이 나오고 슬펐어요”
미얀마 출신 뚜라(32) 씨의 말이다.

한국 정부는 ‘합법적인’ 노예제도를 만들어 놓고 체류 기간 4년을 넘긴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게 ‘불법’ 신분을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 가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합법’은 그 대부분이 내일 ‘불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방 드러날 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정부의 임시방편적 근시안이 답답할 뿐이다.


<순혈주의와 콤플렉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들의 제1세계인들에 대한 콤플렉스 해소를 위한 값싼 대상이다. 이주노동자에게 ‘어이, 그래 한 달에 얼마 벌어?’라고 거리낌 없이 반말을 건네는 내국인들에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우월감이 스며 있다. 자기 성숙을 위해 내면과 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다.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긴장이나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일수록 귀속 집단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이주노동자는 그러한 내국인들에게 우월성을 확인시켜주는 열등한 소수자 집단을 대표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우월성을 집착함으로써 이 땅의 순혈주의는 물신 숭배와 함께 천박한 형태로 강화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이 땅에 정주하면 안 된다는 정부의 발상에도 제3세계 출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식으로 더욱 강화된 단일민족, 혈통보존이라는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한 한국인의 우월감은 백인들에 대한 비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표시하는 사람일수록 비굴할 정도로 제1세계와 백인을 선망한다. 이주노동자들에겐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해 은근한 친근감을 드러내는 척하는 게 고작이지만, 백인에게는 받는 것도 없이 간까지 내줄 양 친절을 베푼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내국인의 차별은 제1세계에 대한 선망의 반사경인 것이다. 월드컵 당시 홈 스테이 캠페인을 통해서 볼 수 있었듯이 제1세계 출신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받는 것 없이’ 간까지 내줄 만큼 칙사 대접을 하는 반면, 가난한 나라 출신들에게는 ‘주는 것 없이’ 경멸과 차별의 시선을 보낸다.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이중성, 제1세계인들을 올려다보는 시각만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6-70년대 우리 선배들은 중동과 독일로 떠나야 했다. 3년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간호사와 광부들은 계속 남아서 그 곳에 둥지를 틀었다. 인간 부초라 하지만 그들에게도 고향은 있다. 고향이 있다는 말은 곧 문화가 있다는 뜻이다. 소비만을 미덕으로 보는 자본은 그 문화를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내국인들의 의식이 아직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에게 문화가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들을 생존을 위해 짐승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틈입해온 동물로 보든지 기껏해야 하위인간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들이 이 땅에서 비벼짐으로써 다양성의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일 수 있다. 지난 해 교육위 국정감사에 따르면(2003.5.31 기준) 전국 초. 중학교를 다니는 이주노동자의 자녀는 205명에 이른다. 10년을 넘긴 이주노동의 역사를 반증하듯이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를 이루는 다양성을 보듬는 대신 순혈주의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를 쫓는 어리석음을 그만 끝낼 때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

재소자들과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인권상황은 그 사회의 인권상황을 알게 해주는 정확한 가늠자다. 그 사회가 인간에게 허용하는, 즉 더 밑으로 떨어질 수 없는 최저 한계선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땅의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오랜 동안 다른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았던 나를 참담하게 한다. 이 땅의 인권상황이 어떤지 정확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의 참여정부에게 다시금 묻고 싶다. 걸핏하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장하는 정부가 이주노동자 문제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언어 소통도 잘 되고 숙련도도 높은 노동자들을 내쫓겠다는 것은 도구적 이성으로 무장한 경제동물의 시각으로 볼 때에도 합리적이지 않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양산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인 뒤, 그 현실 위에서 오래된 미등록이주노동자들부터 구제해 주고 있는 외국의 예를 모르는 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체류기간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공과금 증명서를 버리지 않는 유럽의 미등록노동자들의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는가. 현장도 모르고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글로벌’ 현상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관료들의 탁상공론식 행정은 미봉책을 남발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10만 명을 넘는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전원 출국시킨다는 방침을 고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 조치는 계속 미봉책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전원 출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데서 스스로 증명된다.

지난 3월12일 인권단체 이주노동자 농성지원대책위원회의 <이주노동자 강제단속, 추방 정책으로 인한 인권침해 실태조사 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듯이 , 이 땅의 이주노동자 문제는 정부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만든 법과 제도를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면 다소 부작용과 반발이 있더라도 곧 수그러들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또 현재 한국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단속과 추방 정책은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던 이주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점을 한국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올해 7월부터 시행 예정인 고용허가제도 반인권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수정해야 한다. 특히 사업장 이동 제한은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사업주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이주노동자는 부당한 인권침해를 포함한 문제가 발생해도 강제출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참고 일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위 <보고서>가 제언한 대로 정부는 강제단속과 추방을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국회는 1990년 유엔총회가 69차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을 비준하고 국제적인 기준에 맞는 법과 제도를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

이 땅은 본디 우리가 우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다. 우리의 자손에게서 잠깐 동안 빌린 것이다. 나는 우리 자손에게서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의 후예를 제외시키라는 요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땅의 주인인 우리 후손에게 우리는 모두 잠깐 스쳐 지나가는 부초, 이주노동자다.

여기에 방글라데시 출신의 한 이주노동자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 가 가진 희망을 이 땅을 찾은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갖게 할 수는 없을까. 그들 모두 소통 가능한 인간이어야 하기에.

“나는 앞으로 한국에서 1년 반 정도 합법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 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방글라데시에 돌아가서 시민사회 단체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젊은이들의 환각제 복용을 자제시키고 초등교육을 널리 전파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발전을 꿈꾸는 그런 시민단체를 만들어 보고 싶다. 나의 사랑하는 방글라데시를 위해서. 그곳에서 행복할 줄 모르지만 행복하다고 강요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