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 27일 (화) 12:00   민중의소리

불타버린 9개의 '코리안 드림'...그들의 사연
지난 2월 11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로 9명이 목숨을 잃고 18명이 부상을 당한 참사가 발생한지 10여일이 경과됐다. 사건 발생 이후 정부당국은 유족들에게 고인의 소식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시민대책위들에게 지적을 당했지만, 언론 보도 등의 소식을 듣고 머나먼 땅에서 유족들은 속속 분향소를 찾고 있는 실정이다.

덧붙여 유족들이 도착하면서 화재참사로 고인이된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조금씩 세상 밖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래의 글은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원회'가 작성한 고인들의 사연과 유가족 및 사상자들의 증언이다.

  
“아들을 내놔라. 남편을 내놔라.

아버지를 살려내라.”

“누명 못 벗으면 우리는 한국을 떠날 수 없다. 죽은 사람에게 정확한 진상 조사나 증거 없이 누명을 씌우지 마라. 처음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라이터가 거실,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고 뉴스에서 들었다. 불이 그렇게 났는데 어떻게 라이터가 말짱할 수 있나? 라이터가 바늘도 아닌데 왜 처음에는 발견되지 않았나? 출입국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다 믿을 수 없다.”고 김광석 씨 유가족

“한국에 온 지 6년이 다되어 가는데 아버지는 매일 전화를 할 만큼 자상한 사람이었고 식구들을 그리워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좋은 감정만 갖고 있습니다” 고 리사오춘 씨 아들

“인천공항에서 3시간 기다렸다가 광주터미널을 거쳐 12시간 만에 여수에 도착했습니다. 병원 영안실에 갔더니 부검하고 시신 수습도 제대로 하지 않아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경악했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고 경위도 안내해 주지 않았습니다.” 고 진선희 씨 유가족

“‘살려 주세요. 아저씨 문 열어 주세요’ 밤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잠을 잘 수가 없다.”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부상자들







- 고 이태복 씨(43세)

평생 농사만 짓다 1996년 빚을 내 브로커에게 8백만 원을 주고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공장이 3~4개월 만에 문을 닫아 ‘귀국조치’ 명령을 받았으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건설 현장 컨테이너에서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 고 김성남 씨(54세)

건축과 서비스업에 일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나 일이 없어 가두리 양식장에서 일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전락했습니다. 엄마 없는 청각장애인인 큰 딸과 둘째 딸을 남부럽지 않게 교육시키려고 노예처럼 일했지만 체불임금 해결을 기다리다 변을 당했습니다. 그가 숨진 하루 뒤 확인한 통장에는 체불임금 720만 원이 입금돼 있었습니다.

- 고 천슈엔훼이(35세)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하루 더 머물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 고 김광석(39세)

보호소에서 폭행을 당해 치료를 요구했지만 묵살 당했고 오히려 독방에 갇히며 온갖 인권 유린을 당했습니다. 여수 외국인보호소는 고 김광석 씨에 대한 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 고 에르킨 씨(47세)

체불임금 420만 원 때문에 꼬박 1년째 갇혀 있었습니다. 봄에 결혼할 딸에게 혼수품을 사 줄 것이라며 귀국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 고 장지궈 씨(50세)와 손관충 씨(40세)

강원도 채소밭에서 배추와 무를 캐 시장에 배달하며 손발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일했습니다. 한 형제처럼 서로를 위로하던 이들은 보호소에 갇혀서도 한 방에서 지냈고 변을 당하기 직전 고향에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 고 리사오춘 씨(46세)

여권이 없어 보호소에 남은 지 6일 만에 변을 당했습니다.

- 고 양보가 씨(33세)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 때문에 보호소에 감금된지 25일만에 변을 당했습니다.


△여수 화재참사로 숨진 9명 사망자의 영정사진들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 제정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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