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국사회] 다를 수 있는 권리/정희진

[한겨레 2006-03-12 18:24]    



[한겨레] 며칠 전 늦은 밤 혼자 택시를 타게 되었다. 급히 타느라 몰랐는데, 기사가 흰색 마스크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비스듬히 뒤돌아보며 “어디로 모실까요?” 물었다. 영락없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쇄 살인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곧 그의 얼굴에 화상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택시 운전이라는 서비스직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달플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많은 여성이 밤에 택시 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의 처지에서는 자기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승객들이 무섭고 서러울 것이다. ‘정상적인’ 몸에 대한 집착, ‘다름’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 의식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단일민족이라는 상상된 신념 때문일까. 우리는 유독 다른 몸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인종주의, 남성 중심성, 장애인 차별은 이러한 현상의 다른 이름들이다.

몇 해 전부터 곳곳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재혼·장애인 환영” 현수막이 걸리더니, 최근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준비된 베트남 신부, 마음만 먹으면 가능”이라는 제목 아래, “혈통이 우리와 비슷하다, 일부종사를 철칙으로 알고 남편에게 헌신적이다, 중국·필리핀 여성과 다르게 체취가 아주 좋다, 도망가지 않고 정조 관념이 투철하다, 몸매 세계 최고, 어른 공경하고 4대까지 제사 지낸다…” 이건 중매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사-성 노예 상품’을 파는 듯한 광고다. 원래 결혼이라는 것이 낭만적 로맨스에서 인신매매까지 그 성격이 다양하지만, 매매혼일 경우 여성이 사고 남성이 팔리는 결혼은 거의 없다. 팔리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이 광고는 성차별에 인종주의가 더해진 모욕이며 인권 침해다.

광고의 성차별도 큰 문제지만, 국제결혼 11.8% 시대에, 베트남 여성이 한국 사람과 얼마나 같은지를 강조하는 한국 남성들의 동일성에 대한 편집증적 욕망에 두려움을 느낀다. 1810년 영국 런던 사람들의 가장 큰 화젯거리는 사라 바트만이라는 흑인 여성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백인의 노예사냥이 한창이던 시절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이 여성은 영국으로 끌려가 우리에 갇힌 채 ‘괴물 쇼’ 상품으로 전시되었다. 이후 그녀는 ‘사창가’로 넘겨졌다가 과학자들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서구 남성들은 ‘유색’ 인종은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라고 믿었다. 이는 그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을 ‘계몽’(정복)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였다. 현재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는 흑인 여성을 사냥하고 전시했던 과거 서구의 만행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서구는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흑인과 자신의 다름을 강조했고, 한국 남성들은 결혼을 위해 ‘우리’와 ‘그들’의 같음을 강조한다. 둘 다 자기가 ‘보편’이고, 타인을 타자화하는 방식이다. 지금 우리가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를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훗날 위의 광고 문구가 지구화 시대에 벌어졌던 야만적 사례로 세계사에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원’ ‘본질’ ‘순종’을 숭배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한국은 이미 이주노동자 42만명에 이르는 유엔이 정한 이민국가이며, 매년 수많은 ‘코시안’들이 태어나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와 같아지기를 강요하면서 그들을 적응·동화시키는 것은 폭력이며, 가능하지도 않다. 이주여성과 ‘우리’의 차이가 극복해야 할 이질성이 아니라 “다양성은 강하다” “다를 수 있는 권리로서의 인권”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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