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여수화재참사공대위 활동 평가 때 제출한 이주노조 평가서입니다.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공대위 활동에 대한 활동 평가

이주노조

이번 참사 항의 운동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한국 사회에 뜨거운 쟁점으로 다시 한 번 부각시켰다. 이것은 지난 2003년 10월 정부의 강제 단속 정책 선포에 항의해 일어난 이주노동자들의 농성 투쟁 이후 처음이다.
이번 투쟁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의미있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물론 투쟁의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들과 약점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당면의 이 운동이 어느 정도 마무리 돼 가는 상황이다. 이제는 지난 2달간 지속한 이 운동의 평가를 통해 성과를 잘 계승하고 약점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 평가가 그 과정에 일조하길 바란다.    

항의 운동의 배경

1. 이번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는 단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이 참혹한 비극은 그 동안 누적돼 온 정부의 야만적 미등록이주노동자 정책의 집약적 결과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정책이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제 단체들 사이에 정부 정책에 전면적인 도전이 필요하다는 광범한 문제의식이 형성됐고, 신속한 결집이 이루어졌다. 여수 참사가 일어난 당일 여수 현지에서 공대위가 구성되고, 그 다음 날 서울에서고 공대위가 구성됐다. 그리고 주요 도시와 지역들에서 속속 결집이 이루어졌다.

2. 노무현 정부의 강제 단속 정책이 시작된 이후 이것에 항의하는 운동이 지속돼 온 것이 이번 참사 항의 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특히 2003년 이주노동자들의 항의 운동 이후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하고 목소리를 내는 흐름이 점점 발전하고 있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의 끊이지 않는 탄압 속에서 이주노동자들 스스로가 조직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 스스로의 활동과 조직은 더욱 중요하다.
이런 새로운 경향이 지금 이주노동자 권리 방어 운동에 많은 세력들을 동참시키고 끌어들이는 핵심 동력 중 하나이다.

3.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 권리를 위해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있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3개의 단체들로 구성된 '이주인권노동권연대회의'가 그것인데, 2년 간 나름 꾸준한 공동의 활동을 통해 이주노동자 연대 조직으로서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2003년 투쟁 이후 이주노동자 방어와 연대 조직이었던 '외노공대위'의 붕괴 이후, 태국 여성 노동자들의 노말핵산 중독 사건 대응을 시작으로 상설적인 이주노동자 연대 조직의 건설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후 아노아르 이주노조 위원장 방어 운동을 위해 본격적으로 2005년에 '이주인권노동권연대회의'(당시 명칭은 ‘이주노동자 인권과 노동권 확보를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였다)가 건설됐다.
서울 공대위는 이 연대 조직이 폭넓게 단체들을 참가시키려는 자세로 적극 주도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번 참사에 항의하는 운동이 건설됐다.

성과

1) 요구의 측면
- 우선, 공대위가 내건 요구 사항들 중 정당한 국가 배상 문제가 있다.
협상 결과에서 애초 정부가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게 취했던 태도에 비추어보면 배상액을 대체로 전격 수용한 것은 정부가 협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지속된 항의 운동이 압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 배상을 받는 과정이 순탄치 못한 측면이 있지만, 사망자 가족들은 그들이 요구한 액수의 배상금 합의를 이끌어 냈다. 물론 김광석 씨 유가족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고, 부상자들의 경우 체류 보장 문제가 불분명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아쉬움이 있다. 만약 정부와의 배상 협상에 유가족과 공대위의 관계가 좀 더 긴밀했다면 이런 부분은 좀 더 밀어붙여 볼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 청주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된 7인의 보호해제가 이루어졌다. 정부는 애초 이들을 피해자로 보지도 않았고 따라서 이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계속 외면해 왔다. 그러나 지속적인 항의 끝에 이들에 대한 보호해제를 이끌어 냈다.

- 법무부는 매우 불충분하고 문제가 많은 안이지만 선별 '합법화'방안을 내놓았다. 법무부가 제시한 안은 선별적이고 출국을 전제하고, 또 다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이주노동자들을 내모는 고용허가제로 체류 허가를 부여하는 안이다. 따라서 이 방안 자체는 받아들기에 너무나 턱없이 부족하고 문제가 많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안이라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여수 참사 항의 운동이 만들어낸 압력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정부를 더 밀어붙여 더 나은 방안을 내놓도록 요구해야 한다.

- 반인권적 외국인보호소 폐지는 아직 진행 중인 사안이다. 정부는 유엔인권이사회 때 보호소 시설 개선 등 재발 방지 대책을 광범하게 수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는 미진하지만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해 외국인보호소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민간이 참가하는 외국인보호소 실태조사 추진을 약속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이 외국인보호소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운동을 건설해 나갈 좋은 계기다.

즉 공대위가 제기한 4대 요구가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정부가 합법화 문제에 대해필요성을 인정하고 언급하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후 투쟁의 좋은 출발을 제공했다.

2) 운동에 미친 효과
- 이번 사건과 그것을 둘러싼 항의 운동을 통해 그 동안 매우 심각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외국인보호소 문제가 한국 사회에 적나라하게 그 실체를 드러냈다.
법무부 장관 김성호의 말처럼 외국인보호소는 '보호소'가 아니라 수용소였다. 이곳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감옥보다 열악한 시설과 처우를 감내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번 여수 참사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된 항의 운동체가 '외국인보호소' 폐쇄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이제 이 사안은 이주노동자 운동 내 중요한 요구 사항으로 등장했다. 이 운동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 어느 때보다 많은 단체들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모였고 실제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높은 열의를 보여줬다.
공대위에 참가한 단체들을 살펴보면 그 구성도 매우 다양하다. 이주노동자 단체들부터 인권, 노동, 사회, 종교, 시민, 학생, 법률 단체들과 진보적 변호사들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이 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전국에서 80개 이상의 단체들이 이 운동에 참가했다. 특히 2월 25일 서울 도심 집회 때 1천여 명이 모인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여수 현지와 서울, 부산경남, 대구경북, 청주충청, 인천 지역, 수원 등에서 공동의 대응 조직들이 만들어지거나 기존의 이주노동자 관련 연대 조직들이 가동됐다.
이것은 지난 2003년 이래 처음이고 이 때문에 이 운동에 뛰어든 이주노동자 운동 활동가들은 커다란 고무와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항의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은 매우 열의 있고 헌신적으로 활동에 참가했다. 이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단체 활동가들은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매우 진지하고 협력적으로 이 활동을 수행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이번 경험은 이후 운동에도 매우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이 연대 조직들이 있는 지역의 도시들-여수, 서울, 청주, 부산, 대구, 인천, 수원-에서 리플릿팅, 1인 시위, 서명 운동, 대중 집회 등 캠페인들이 2달 가까이 지속됐다. 전국에서 1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대구에서는 여수 참사를 계기로 만들어진 공대위가 이제 이주노동자 권리 운동을 위한 상설 운동체로 전환한 성과가 있다.
여수에서는 공대위를 해소하면서 주된 여수 현지 활동가들이 제기한 문제는 이후 이주노동자 문제를 어떻게 지역에서 계속 관심을 가지면서 지속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2004년 샤말 타파가 여수외구인보호소에 구금돼 1달 동안 단식까지 벌이며 투쟁했던 것이 여수에 처음 이주노동자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이번 여수 참사와 항의 운동은 여수에서 이주노동자 인권과 권리를 위한 운동이 지속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여러 중요한 지역 단체들에게 제공했다.  

- 이주노동자들 스스로의 활동이 중요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집회들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수를 차지했고, 노조와 공동체들의 기자회견을 통한 입장발표, 서명 운동, 지역 선전전 등은 매우 의미있는 활동들이었다. 현재 이주노동자 조직화 상태가 아직 충분히 발전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이 활동이 폭넓게 벌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참가한 이주노동자 공동체들 사이에서 함께 힘을 모아 광범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펼쳐나가자는 진지한 고민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 그리고 정부가 지속한 단속 정책을 이제는 더 이상 지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들이 확산됐다. 사실 그 동안 이 정책의 심각성과 문제는 누누이 지적돼 왔지만 운동이 이 문제에 충분히 대처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각에서는 과연 이 단속을 완전히 중단시킨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 하는 물음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이 정책이 지속된다면 반드시 이와 같은 참사가 되풀이될 것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했다. 이제는 단속 정책에 일관되게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 이번 항의 운동 과정에서 건설한 국제 연대는 한국의 활동가들에게 꽤나 큰 고무감을 주었다. 공대위는 가능한 모든 국제 단체 리스트를 동원해 항의 서한을 조직했다. 또 유럽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체들의 총회 때도 이 사안을 알렸다.
또 공대위 소속 단체인 민변은 유엔 인권이사회 때 서면 보고서를 제출해 국제 회의에서 한국 정부에 대한 압박 효과를 냈다. 유엔 특별보고관의 언급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국제적 압력은 한국 정부에게 꽤나 큰 압력이 됐다.

한계

이번 투쟁은 여러 성과와 과제를 남겼다. 우리는 이 모두를 잘 이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약점과 한계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체 성과를 압도하거나 성과와 비등한 수준의 문제들은 전혀 아니다.

- 유가족들과 배상 협상까지 공동 보조를 맞추는 것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했다. 이것은 객관적 한계가 컸다. 흔히 유가족이 한국인일 때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도 통하지 않고 국적도 다른 사람들이 공대위와 함께 끝까지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한국 정부가 중국 대사관 등을 통해 이들에게 압력을 넣었을 것은 쉽게 추측이 가는 일이고, 매우 억압적인 중국 정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유가족들은 가족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면서도 끊임없이 동요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공대위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가 중요하다. 공대위가 일치 단결해 유가족들과 함께 진지하게 싸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공대위도 함께 동요한다면 유가족들은 훨씬 동요하고 갈등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2월 25일 여수 참사 사건 이후 서울 도심에서 열리는 첫 항의 집회 조직 때 일어난 일들은 매우 안타깝다.
당시 유가족들은 법무부 장관의 분향 항의 행동, 여수출입국관리소장 항의 방문, 여수경철서 항의 방문 등에 이어 서울 집회 상경을 결정했다.  
유가족들이 스스로 나서서 이런 활동들을 통해 유가족들은 한국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와 위선을 고발하면서, 항의 운동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정부는 이런 분위기에서 서울 도심에서 이 운동의 상징인 유가족이 대거 참가한 집회가 열리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 25일 집회를 앞두고 정부는 유가족들이 이 시위에 참가해 초점을 형성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국 대사관 등을 통해 압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실제 25일 집회를 앞두고 유가족들은 중국 대사관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했고, 이 과정에서 부담과 압력을 느끼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여수 공대위 공동대표 중 이철승 대표가 유가족들의 서울 상경 집회 참가가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폈고, 이 때문에 유가족들과 함께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항의의 수준을 높여 가려는 공대위 내 다수와 갈등이 빚어졌다.
2월 25일 서울 집회 유가족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공대위 내 내분과 갈등이 생기면서 유가족들 사이에서 형성된 관계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유가족들도 이런 긴장과 갈등이 있음을 알았고 이것은 유가족들의 동요를 막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사실 항의 운동이 점점 고조돼 가고 있던 상황이라 이 시기에 드러난 공대위 내부 갈등은 사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2월 25일 집회 이후 여수 현지에서 외노협이 사실상 철수하면서 유가족들과의 관계는 더 어려워졌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이런 주관적 요인이 유가족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 진다.
이후 정부측과의 배상 협상에 주도력을 발휘하기 힘들었고, 정부도 이 점을 이용해 가족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하도록 조장했다.
그러나 유가족과의 관계 문제에서 이 주관적 요인이 미친 영향이 지배적이었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오히려 이들 유가족들의 처지 자체에서 비롯한 객관적 상황이 훨씬 지배적이다. 따라서 여수 현지에서 이들과 함께 끝까지 함께 활동한 활동가들이 이 문제 때문에 회의에 빠지거나 좌절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끝까지 여수에서의 활동을 지속했기 때문에 이 운동은 지속될 수 있었다.

-여수와 서울이 명칭상으로는 하나의 조직으로 묶여 있었지만, 실제 활동은 여수와 서울에서 각각 결정하고 집행했다. 이것은 여수와 서울이 각각 공대위를 구성했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협의와 상의가 있었고, 특히 서울 공대위는 여수 공대위의 견해를 충분히 받아들이며 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좀 더 유기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그 때 그때의 상황 판단을 공유하고 계획과 방향을 함께 논의하며 세워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충분치 않았다. 이 때문에 여수 현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어려움이 컸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여수에서 여수 현지 공대위의 두 공동대표와 공동집행위원장 중 1인이 무책임하게 역할을 방기하고 사실상 활동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어려움은 가중됐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서울 공대위가 이 문제 해결에 좀 더 적극 나서 여수의 공백의 메우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 또 한 가지, 이 사건을 보며 큰 분노와 절망을 느꼈을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활동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다소 부족했다. 필요성은 공감했으나 실제 활동에서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2월 25일 집회 전에 민주노동당 서울 시당 지역위들이 중국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중국어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편 일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주노조 역시 여러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리플릿 배포, 서명 운동 등을 펴는 활동들을 벌였다. 이런 활동들이 공대위 전체적에서 좀 더 확대되고 지속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공대위가 여러 이주노동자 단체들의 활동을 고무하고 공대위에 참가하도록 해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좀 더 일찍 나서지 못한 점도 아쉬움이다. 이후 활동에서 이런 점들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 사실, 이번 항의 운동의 평가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외노협과 관련된 문제다. 서울과 여수 모두에서 외노협의 일방적 활동 중단은 전체 운동에 적지 않은 영항을 주었다. 그리고 활동 중단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 역시 중요한 문제들이었기 때문에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애초 이 운동은 여수 화재 참사 문제를 둘러싼 광범한 동맹으로 출발했다. 이것이 이 항의 운동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이 장점을 잘 살려나가려면 이 동맹이 합의한 사항들을 중심으로 서로 간에 협력적인 자세로 서로를 존중하며 활동하는 것이 기본 출발이다. 의사결정 과정이나 집행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적 운영이 필요한 것은 그 운동 참가자들의 능동성과 열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외노협 공동대표이며 여수 현지 공대위의 공동 대표를 맡았던 김해성, 이철승 목사는 이런 정신을 전혀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방으로 자신들의 지도력을 무조건 인정하고 따르라는 태도였다.
2월 12일 여수에서 (당시) 여수대책위 전체 회의 때 김해성, 이철승 목사는 이 회의에 참가한 여러 단체들(여수 현지 단체들, 여러 지역에서 모인 단체들)과 함께 대책위의 기본 방향, 요구, 조직 구성 등을 합의하기 위해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이 구상한 계획과 조직에 다른 사람들을 끼어 넣는 식으로 일관했다. 당시 이것에 대한 분명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전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계속 반복됐다. 2월 22일 여수경찰서 항의 방문 때 유가족을 비롯한 항의 방문단을 무시하고 일방으로 중재안을 내놓고 사실상 대열을 해산시킨 역할을 했다.
그리고 2월 25일 대정부 항의를 최대한 집결하기 위해 준비된 유가족 상경 투쟁 일정이 좌절된 원인에도 영향이 있다.

- 2월 25일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의 발언을 계기로 당시 공대위 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두 대표의 문제는 외노협 전체의 문제로 확대됐다.
외노협이 주봉희 부위원장의 발언에 격분하고 기분 상해하는 것은 이해한다. 또 당시 집회 상황에서 적절한 발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노협이 이 발언의 책임 문제를 공대위에게 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무엇보다 공대위가 이 사안에 대한 유감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활동을 공식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며 독자 행보를 한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사실 이미 외노협은 2월 25일 집회 이후로 공대위 활동에 힘을 빼고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외노협은 주봉희 부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여러 공대위 소속 단체들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공대위가 민주노총 주봉희 부위원장의 발언을 옹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공동의 활동을 거부했다.
그러나 외노협이 이주 운동 내에서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이것은 공대위 전체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이었다.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외노협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진정으로 연대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이 항의 운동의 대의를 위반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족들과의 관계 형성은 더 어려워져 갔고, 공대위 내에서도 혼란과 사기 저하가 일부 찾아오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외노협 이 자신의 주도력을 강요하는 식의 태도로 인해 운동을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해악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주노동자 운동의 외연이 넓어지고, 특히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하는 상황의 변화를 인정하고 함께 하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도력을 운동에 강요하려는 이런 식의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이런 태도는 이주노동자들의 스스로의 자발적 운동에 치명적이다.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활동을 더욱 고무하고 능동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을 따르라는 이런 태도는 이주노동자들을 수동화시키고 때로는 분열시켜 결국 운동을 약화시킨다.

- 외노협이 공대위 내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독자 농성에 돌입한 후 3월 29일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이 찾아와 선별 '합법화' 방안 등을 내놓았다. 공대위가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요구를 내걸고 있는 상황에서 형식적으로는 참가단체인 외노협이 이 정부의 선별 '합법화' 방안을 큰 틀에서 받아들인 일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결론

여수 참사에 항의해 시작된 운동을 이제는 더 본격화해야 할 시점이다. 단속추방과 외국인보호소 문제, 합법화를 위한 운동을 적극 벌여나가야 한다. 법무부가 매우 미흡하고 문제가 많은 ‘합법화’ 방안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한 운동의 대응이 필요하다.
공대위에서 논의된 단속, 보호소 감시 활동 같은 계획들이 꼭 추진돼야 한다. 그리고 제 운동 단체들과 함께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운동의 진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야 한다.  
이번 항의 운동은 이주노동자 운동이 지난 2003년 전국에 걸친 이주노동자들의 항의 운동 이래로 지속 발전하고 있는 맥락에서 일어났다.
그 과정이 더디고 순탄치 않더라도 이것은 명백한 흐름이다.
게다가 이번 운동은 이 운동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이것은 서로 차이가 있더라도 공동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함께 운동을 지속해 온 활동의 결과다.
운동의 대의와 이주노동자들의 단결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의견 일치를 모색하려는 관점만 분명하다면 단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제 이 운동의 성과를 이어 좀 더 지속적이고 좀 더 실천적인 공동의 행동으로 지속해 나가는 과제가 남았다. 이 성과를 기존의 '이주노동자인권노동권연대회의'가 이어받든 아니면 새로운 연대 조직을 건설하든 확대와 강화의 방향으로 가야하는 시점이다. 이 때 이주노조뿐만 아니라 다른 이주노동자 단체들도 적극 참가할 수 있도록 방향을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