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age of registance

1. 우선, 노동자의 시각으로 ‘이주노동’을 바라보자.

1) 이주노동자는 자본의 초과이윤 증대를 위해 형성된 국제적 산업예비군이다.
세계 자본은 필리핀으로, 멕시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한국으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날아다니며 노동자 민중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자본의 폭격을 맞은 곳은 한결같이 극심한 빈곤과 실업에 시달린다. 자본 이동의 자유화 촉진은 공산품과 농산물, 지적 재산권 같은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불평등한 매매도 동반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지구적인 이주현상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제 3세계의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이 끝이 안보이는 국제금융자본에 의한 부채와 고도의 실업률 속에서 ‘빈곤에서의 탈출’은 쉽지 않다. 고용의 기회도 찾기 어렵지만 농업까지도 잠식해들어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제 3세계 노동자 민중을 항상적인 실업 또는 잠재적 실업 상태로 묶어둔다.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는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더욱 급증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로 특징지울 수 있는 현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이주노동은, 초국적 자본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현상적으로는 초국적 자본의 위협 즉 본국에서의 생존의 위기, 실업란을 피해 “경제적인 이유”로 “자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부수적인 현상으로서 유입국의 노동자와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며(예; 유럽의 극우 인종주의 부활) 진행되고 있다. 유입국이나 송출국이나 모두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 하에 (자본의 초과이윤 증식을 위한)구조조정의 압박에 내몰리고 있고 이로 인해 실업과 비정규직화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일국 내에서 초과이윤 착취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는 자본의 위기에 직면하여 일국적으로는 복지비용삭감과 임금삭감, 구조조정을 통한 추가 산업예비군 확장을 감행하며 국제적으로는 자본의 국경을 허물어 내어 보다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 새로운 시장을 점령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잉여노동자의 수직적 이동이 가속화된다. 이를 계기로 현대적인 개념의 노동력 이동이 촉진되었다. 즉 국가자본의 이해와는 다소 밀접하지 않은 채 자본과 이주노동자 대중의 직접적인 임노동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제국주의 시절에는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집단적인 형태(예; 아메리카에서의 아프리카인 노예, 하와이나 만주등으로 이주한 한인과 중국인 등)의 이주노동이 이루어졌지만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적 이유”를 목적으로 한, 주로 “일자리”를 찾는 이주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이고 자발적인 이주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이주는 자본주의 모순과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노동력은 가지고 있지만 노동에 필요한 토지나 공장이나 기계를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들은 자신을 고용할 수 있는 자본이 국내에 없다면 해외로라도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디든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소위 송출국엔 희망이 없다. 세계 자본의 이해를 위해 전략적 거점으로 형성된 ‘신흥공업 국가’ 특히, 남미와 아시아의 경우 세계 자본 특히 금융자본의 영향력에 옭아매어져 있기 때문에 부채와 극심한 실업률의 위기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다. 그들 국가의 산업예비군들이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선진개발 국가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기 위하여 이주하고 있다. 이는 일국 자본(경제)는 세계 자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명제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며 자본의 운동이 이들을 초국적 잉여노동력, 즉 국제적인 산업예비군으로 내몰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농토를 빼앗긴 초기 산업혁명기의 영국 농민들이 신대륙으로 향하게 되던 원인과 일치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주노동이 증대되게 된 배경에는 가난과 실업을 탈출하고자 하는 이주노동자 개인의 의지보다는, 자본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노동력 활용을 획책하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국적 자본이 해당국가의 자본을 육성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면 노동력만을 사용하고자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저산업개발 국가로의 공장이전 및 고용창출로 나타나던 국제적 초국적 자본의 초과이윤 착취를 위한 행보가 신자유주의 이전과 핵심적으로 달라진 부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즉 투자조건이 맞지 않는 국가에 대하여서는 노동력만을 추출하거나 제한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무리 투자를 해도 1년에 한 번씩 대홍수가 덮쳐 모든 것을 쓸어가버리고 전쟁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는 방글라데시에 대하여 눈독을 들이는 자본은 없다. 다만 방글라데시의 노동자를 유입하여 단순노동인력으로 활용하려는 국가와 자본은 많다. 한국도 방글라데시와 비자면제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인이나 방글라데시인이나 비자면제협정을 맺으면서까지 활발하게 서로 관광을 오갈 조건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방글라데시의 단순노동인력이 한국에 들어오기 쉽게 하려는 한국정부의 술책일 뿐이다. 인도의 예를 들자면, 오랜 식민지를 경험한 인도인은 선진자본국가에서 보면 고급스러운 단순인력이다. 영어도 잘하고 컴퓨터 공학도 발달하였다. 독일과 캐나다 등은 인도에 대한 기술이전이라는 투자를 하는 동시에 인도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연 30,000명씩 유입하고 있고 점차 그 규모를 확대하려고 하고 있다. ‘세계경영’을 표방하며 동유럽으로까지 뻗어나갔던 ‘대우’나 특히 중국, 베트남 등지로 진출하여 현지기업을 세우고 있는 한국 자본가들은 그 나라에 기술을 이전하고 국제협력을 강화하러 간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저임금을 이용하러 간 것 뿐이다.
제3세계에 자본을 투자해 그곳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신, 제3세계에 투자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불러와서 자국에서 착취하는 방식이 점차 확대되면서 제 3세계 국가에서는 이주노동이 보편화되고 있다. 즉 이에 상응하여 송출국 정부는 전혀 국가적 생산투자를 할 필요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단으로 이주노동자를 내몰고 있다. 최대 송출국이라고 할 수 있는 186개국에 800만 이주노동자를 송출한 필리핀 정부는 출국세, 경찰심사료, 공항세, 의료진단료, 여행세, 가사노동자에 대한 자격시험비(세탁기 작동, 청소기 조작법 등에 대한) 등등 턱없는 여러 가지 요금체계를 만들어 송출사업을 하고 있으며 노동자를 마치 상품 관리하듯이 하고 있다. 현재 ILO가 밝힌 바에 의하면 전지구적으로 약 1억 3천명의 이주노동자가 있으며 이들이 본국으로 송환하는 돈은 연간 730억 US달러 규모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필리핀, 동유럽, 아프리카 등 자국의 산업기반이 열악한 나라에서 이주해 오는 노동자 역시 세계 자본의 이러한 음모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개발 국가 출신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모순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힘들다는 억측이나 그들의 이주의 원인이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국가의 이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동시에 ‘신자유주의 분쇄, 자본의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면서도 이주노동자와 연대할 필요성에 대하여 ‘동정’의 시선으로 ‘국제화 시대니까’라고 치부하는 것은 세계자본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지 못하는 것이며 초국적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의 의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즉 이주노동의 밑바탕에 있는 이런 자본의 이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IMF구제금융을 받은 98년 경제위기 시에 3만여명의 실업자 또는 노동자가 호주, 캐나다, 미국 등지로 떠나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현대적 개념의 이주노동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근 12-3년 사이에 한국인 이주노동자가 많이 유입되었고 그들은 일본 내에서 불법체류자 1순위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에도 근 10여년 사이에 20만에서 30만명의 이주노동자가 계속 존재해왔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한국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반대’, ‘구조조정 반대’를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초국적 자본의 또다른 희생양인 이주노동자에 대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하여왔다.

이주노동자들은 ‘값싸고’, ‘통제가 용이하다(말 잘 듣고 체류신분을 볼모 삼아 고용(유입과 추방)을 편리하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주노동자가 강력하게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경우 더욱 용이하다)’는 장점 외에도 일반적으로 산업예비군이 그러하듯이 노동력 수요를 조절하고 나아가 노동운동세력을 견제하는 기능에도 이용당한다. 이주노동자의 노동권과 인권은 전체 노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속에서만이 이주노동자 해방의 길이 있다. 이주노동자 운동 주체의 명확한 계급적 태도를 세워내는 것과 동시에 기존 노동운동 진영에게도 각성이 필요하다. 더 이상 자본의 노동자 분열지배 정책에 우롱당할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실업노동자, 여성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등과 같은 불완전고용노동자(산업예비군)들을 조직하고 노동운동 대오의 굳건한 주체로 세워야 한다.

2. 이주노동운동의 전략적 방향
2-1) 이주노동자 주체 대오 조직화 전략
2-1-1) 기존 이주노동운동의 대리주의로 인해 주체형성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주노동운동을 노동자운동으로 정립하고자 하는 우리의 지고지순한 신념은 이주노동자도 당당한 노동자이며 진짜노동자로 거듭날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자주적인 인격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주노동운동을 노동운동으로 밀어나갈 주체대오가 형성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이주노동자 대중의 권리는 이제까지 상담지원단체들의 “대리”에 의해 개별적인 구제를 받는 것으로 지켜져 왔다. 이주노동자 상담지원 단체들은 법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을 통해 이주노동자에게 유효한 몇가지 법적 개선들을 이루어냈지만, 자본과 정부를 대상으로 싸워내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방식에 있어서 이주노동자를 대신하여 ‘동정과 선처를 호소’하여 왔다. 이주노동자 당사자에 대한 주체화 교육과 조직화가 결여된 속에서 대리투쟁을 해 온 이제까지의 역사는, 투쟁을 ‘타협’으로 국한하게 만들고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커다란 문제점을 남기고 있다.

기존의 이주노동운동 질서 속에서는 상담지원단체가 이주노동자의 우산 역할을 했다. 우산이 비를 피해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주노동자의 시야마저 가려버렸다. 이주노동자 공동체 또는 개인의 자주적 의사와 독립적 활동이 상담지원단체의 영향력 안에서 결정되어졌다. 심지어 지난 98년 10여개 이주노동자 공동체의 대표들이 ‘국적으로 넘는 교류와 협력’이라는 자발적인 필요성에 의해 모임을 만들기로 결정하여 그 이름을 “IMOK(International Migrant workers' Organization in Korea)"라고 짓고 1달에 1번 정도 모여 회합을 가지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 번째 모임부터는 가질 수 없었다. 그들과 관련이 있는 각각의 상담지원단체들이 “그런 류의 모임은 각 센타 내에서도 가능하다”며 굳이 “(센타) 바깥에 있는” 그런 모임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각 공동체는 상담지원 단체가 주는 도움 등 때문에, 그러한 발언과 암묵적인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실질적인 수직관계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런 불합리한 간섭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독립적으로 행동을 조직할 대표 즉 이주노동자 리더가 없었다. 결국 두개의 공동체와 인자들에 의해 그 모임은 아주 축소되어 몇차례 더 모임을 갖는 정도로 진행되다가 끝이 나버렸다.
IMOK 사건(!)과 현재의 평등노조 이주지부 핵심 활동가들이 지난 2000년 10월에 외노협을 탈퇴하여 노동운동으로서의 이주노동운동을 표방하며 이주노동자투쟁본부(SNforMRF; Struggle network for Migrants Workers‘ Rights & Freedom of Migrantion)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기존 이주노동운동 질서 즉 외노협 주류들의 공격과 음해를 보더라도, 기존 이주노동운동의 계급적 정체성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자주적인 정체성이 세력화되어 나타날 때 소부르조아들은 당황한다. 이들은 나아가 노동자의 진전을 가로막으려고까지 한다. 이미 대리투쟁에 관성화되어 있는 이주노동운동판의 소부르조아들은 이주노동자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떠나 독립적인 실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자신들의 그늘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길 원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적 시각을 일부 수렴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의 자주성과 단결성을 해치기 때문에 해악적이다. 소부르조아들의 해악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주노동자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늘 타협적이고 노사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이주노동자의 투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계급대립을 희석화시킨다. 이주노동의 연원이 자본주의 모순에 있음을 밝혀내고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현실이 노자간의 모순에 기인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세워내며 이주노동자를 조직하고자 하는 지금의 노력은, 인도주의자라는 명예를 대가로 원하는 소부르조아들의 그 어떤 헌신적인 활동보다 소중한 것이다. 서정적인 노래와 음악으로 노예의 삶을 잠시 잊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조직하고 노예의 족쇄를 깨뜨릴 햄머를 줌으로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쟁취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 투쟁에, 이주노동운동의 소부르조아 관료집단인 그들의 반항과 거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외노협 주류의 행태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노동자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조직화만이 이주노동운동의 진정한 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2-1-2) 이주노동자 선진인자를 발굴하고 훈련을 통해 주체대오를 형성하여 한다
이제, 그들의 수호천사를 자부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을 종속시키려고 했던 기존 이주노동운동 질서와 단절하고 이주노동자를 존중하고 평등하게 함께 하는 새로운 이주노동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이 새로운 시작은 노동계급의 연대와 실천 속에서만이 전진이 가능할 것이다.

그 시도에 대하여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 투쟁본부(SNforMRF; Struggle network for Migrants Workers‘ Rights & Freedom of Migrantion)의 한가지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이주노동자 공동체 연석회의를 조직하여 그들과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려고 한 시도이다. 물론 초기부터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말하는 것들에는 동의하지만 참여하기를 망설였던 노동자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와 기존 질서(상담지원 단체 또는 외노협)를 선택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평등한 연대의 대상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경험적으로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석회의를 진행해가면서 서로 다른 토론문화와 사고체계에 의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가 실망과 신뢰를 거듭 교차해왔듯이 연석회의에 참여한 이주노동자 각각 개개인도 우리에게 비슷한 경험을 거쳤을 것이다. 이젠 고민 속에서 거듭난 열성적인 노동자들이 이노투본의 성원으로 스스로를 위치지었다. 이노투본 과정을 통해 우리가 들은 최대의 찬사는 처음엔 주저하던 어떤 노동자가 나중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 말한, “한국 노동자와의 연대가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꿈이 현실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것이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에게서 이주노동자들은 역으로 우리에게서 가능성과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조합원이 된 이 동지들은 아직 소수이지만 한국 이주노동운동의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1:1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끈끈한 동지애를 나누는 평등한 연대 속에서 온전한 주체가 형성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소수의 조직된 노동자가 다수의 대중을 지도할 수 있다. 노동자 대중이 현장 속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투쟁하면서 각성되듯이 선진노동자도 현장에서의 싸움과 학습을 통해 양성된다. 하기에 우리는 평등노조 조합원이 한국 이주노동운동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조합원의 정치적 조직적 단련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이것은 우리 노조가 다른 노조에 비해 역사적으로 부여 받은 특수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조합원들이 선진 활동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학습과 토론, 현장 지도력 배양 훈련 등에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조합원 속에서 선진 이주노동자들을 발굴하고 양성함으로써 이주노동운동을 이끌어 갈 주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은 지부장도 한국인이고 집행간부 중 절대 다수가 한국인 활동가들이지만 이주노동자 활동가 양성을 통해 조직의 체질을 이주노동자의 것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2-2) 한국노동자와의 계급적 연대 실현 전략
2-2-1) 현장에서의 이주노동자 연대는 실제로 어떠한가
한국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 유입에 대하여 갖는 가장 큰불만은 ‘한국 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축소시킨다’, ‘저임금 체계를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99년 민주노총이 설문을 통해 이주노동자에 대한 조합원의 인식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주노동자와 같이 일하든 일하지 않든 전반적으로 인간적인 동정은 있으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유입에 대하여서는 반대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이주노동자를 열악한 구조에 묶어두고 노동자의 중층화를 통해 노동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자본의 의도에 파열을 내는 대자본 대정권 투쟁과 함께 가지 못하는 채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방식으로 가면 자본의 구도에 말리는 것 밖에 되지 못한다. 또한 이주노동자는 영원히 천덕꾸러기로서 한국 노동자와 평행선을 그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모두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주노동자와 같이 일하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갖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태도를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보면,
첫째는 연수생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그들의 유입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금속노조가 지난 1월, 양산지역의 4개 중소사업장을 대상으로 연수생 실태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555명의 한국인노동자가 일하는 데 연수생노동자는 37명이라고 한다. 한국 노동자들은 같이 일하는 연수생 노동자에 대하여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무관심하다고 한다. 연수생 노동자에 대하여 적의를 갖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한국인 노동자에게도 더 적게 받고 많이 일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연수생들이 있는 사업장의 노조들은 그들을 미워하진 않더라도 대부분 연수생 쿼터를 줄일 것을 단협 요구안으로 상정한다.
둘째 유형은 조합원 대중의 적대감으로 인해 이주노동자를 실질적으로 배제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98년 경제위기 시, 안산지역 건설일용노조는 본청기업주를 압박하면서 불법행위 및 불법용역 근절 투쟁을 하면서 노동조합의 노동자 공급권을 쟁취하는 모범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건설일용 노동자라 할지라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포괄은 없었다. 건설일용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 노동자보다 적은 보수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에게 기회를 빼앗겨버린다는 일정의 적대감이 조합원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뻗쳐있는데 노조가 이들을 설득하고 이주노동자를 흡수하여 전반적인 권리신장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노조가 가진 노동자 공급권은 이주노동자를 배척하는 무기로 작용할 수도 있게 된다는 우려가 든다.
셋째로 가장 많은 유형은 아마도 ‘무관심’일 것이다. 같이 일하는 것에 대하여 별 저항이나 호의도 없는 채 남의 일로 생각하고 마는 경우이다. 이주노동자가 많이 일하는 금속, 화학, 섬유, 건설, 서비스업에 존재하는 노조연맹 및 단위노조 또는 지역 노조 어느 곳에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실태가 파악되어 있지 않다. 무관심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미조직노동자로 계속 남아있다. 최근 금속노조는 산별을 띄워내면서 강령 속에서 실업, 여성노동자와 더불어 이주노동자에 대한 조직화를 하겠다고 밝혔고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는 두 위원장 후보가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공약으로 걸었다. 그러나 현장 단사 및 지역노조는 아직 이러한 인식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연맹 또는 상층차원에서 갖는 조직화의 당위성과 현장에서의 필요성(과제)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상층에서는 인권적이고 추상적 차원에서 조직화를 제시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다른 미조직노동자에 대한 조직화와 마찬가지로 긴장감없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나타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무관심은 파업의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해 동부금속 산하 파업 사업장 중에서 몇 곳은 이주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와 병역특례 노동자가 같이 일하는 곳이었다. 병역특례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파업을 진행하는 동안 이주노동자는 기계를 돌렸다. 파업진영에서는 별다른 항의나 저지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주노동자를 파업대오 동참시키겠다는 계획도 없었기에 그들이 파업기간 중 기계를 돌려도 “그들은 그럴 수 밖에 없겠지”하고 이해해주고(!) 말았다. 울산의 어떤 사업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알려지지 않은 같은 사례는 더욱 많을 것 같다. 그들과 의사소통에 부담을 느껴서일 수도 있고, 그들을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치부해서 일 수도 있다.

민주노총이 오랫동안 준비하여 2000년 발표한 ‘노동운동 발전 전략’은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계획에서 ‘①외국인 연수제도 개선 ②독자적 조직화보다 지역노조를 통한 전체 노동조합 운동에 결합 ③외국인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의 정비’를 조직화 계획으로 제출하고 있다. 기간 이주노동운동이 노동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진행된 바가 없기에 또한 민주노총이 한 일이 없기에 간략하게 거론되는 것은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이 짧은 계획 속에서 이주노동자를 여전히 노동자의 한 진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권리를 보완해주어야 할 사람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이는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 방안에서도 같은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당장 조직하기는 어려우므로 이들에 대한 보호, 서비스 제공 등을 통해 저변을 확대한다”(!)고 하며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에 대해서 “산별” 지역노조를 결성하고 가입시킨다는 계획(?)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 분출되고 있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에 민주노총이 적극 결합하고 지도해내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왜그런지 설명이 된다. 즉 그들의 억압된 현실을 법제도 몇가지의 개선을 통해 권리를 진전시키면 되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산별노조로의 전환이라는 “만병통치약”이 모든 것으로 자연스레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에서 ‘같은 처지의 노동자, 함께 싸우지 않으면 공동의 미래도 없는 동지’라는 것을 인식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운동의 노동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내고자 하는 노력은 함께 싸워나가야 할 비정규․중소영세사업장 노동 동지들에게서 먼저 받아 안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아직까지는 논적인 지지와 연대의사에 머무를 뿐 실천적이기때문에 일상적인 연대로 발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노동운동으로서의 이주노동운동을 펼쳐가고자 하는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는 개별적인 권리구제와 사회적 온정에 기반한 제도 개선에 머무르던 이주노동운동을, 노동자의 시각으로 읽어내고 정립하려는 노력 속에서 연대투쟁의 당위성을 확인하고 결의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노동자와의 실천적 연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2-2-2) 이주노동자 노조 조직화 전술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는 전체 노동운동진영의 과제이다. 한국 노조운동 진영 내에서 대표적인 미조직 노동자들은 여성, 실업, 장애, 이주, 비정규(계약직, 특수고용직, 파견직 등) 노동자들이다.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위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대되면서 노동운동진영에서 이들을 조직화하는데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해 말, 이노투본으로부터 시작하여 국적을 초월한 계급적 연대를 촉구한 우리의 활동은 서서히 그 반향을 보이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진영에 대한 강력한 선전선동 뿐만 아니라 비록 한국인 활동가들이라도 현장에서 싸우는 투쟁사업장에서 함께 농성하고 함께 싸웠기 때문에 신뢰와 동지애를 쌓을 수 있었다. 감히 말하건데,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실천적인 노조의 동지들과 평등노조 이주지부는 더욱 강하게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대우, 현대와 같은 커다란 사업장 노동자들이 아니다. 주로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커다란 노조의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비주류노동자들에 대하여 연대할 의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이 서서히 투쟁성을 잃어가면서 주류중심으로 관료화되어가는 것은 한국노동운동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있다. “말로만 연대하겠다고 하지말고 실천적으로 연대하자고, 노동절에만 연대하지말고 현장에서부터 연대하자고!”

우리는 이주노동자의 조직화 토대를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조직화와 궤를 같이 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는 모두 중소영세사업장에서 일하며 존재의 조건이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아왔다. 외국인이라는 특수성으로 특별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자본의 노동유연화 과정에서 발생하며 희생당하는 비정규직(불완전고용) 노동자이다. 이주노동자는 왜 비정규직 노동자인가. 정규직은 통상, 기간을 정하지 않은 상용고용이며, 전일제(Full-time)로 일하고, 단일한 고용주를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주노동자는 건설일용직이나  연수생 노동자를 제외하곤 위의 요건에 대부분 충족한다. 그러나 개인적 견해로 보면, 이주노동자는 합법적 고용관계에 속해 있지 않고 완전한 ‘불법고용’의 형태를 띄기 때문에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으로 구분할 만한 근거조차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본의 노동유연화 정책에 의해 파생된 산업예비군이며 자본의 노동자 분할 지배 전략의 희생양이라는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운명을 같이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비정규․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고용불안의 원인은 자본의 노동유연화에 있다. 자본은 생산과 고용을 탄력적으로 하길 원한다. 원가는 줄이길 원한다. 본청 자본이 자본투입 가격은 낮추면서 수익성은 높이고자 분사화, 소사장화, 용역사용, 외부하청, 파견고용 등과 같은 생산방식을 확산하는 것은 이미 신자유주의 하의 대표적인 생산체계가 되고 있다. 저임금과 노동유연화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주노동자를 연수생으로 유입하고 있고 불법체류자 양산을 암묵적으로 확산시켜 온 것이 한국의 자본가 정권이다. 연수생은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 노동자의 1/3정도의 임금을 받고도 초과근로를 시켜도 별 저항을 할 수 없다. 이주노동자의 존재이유를 노동자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이주노동자도 투쟁의 대오에 함께 조직하면서 자본의 산업구조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라는 확신을 가져내는 연대투쟁이 필요하다. 이주노동자가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임금을 갉아먹는 위협요소가 아니라 중층적인 고용체계로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강요하는 자본이 진정한 노동자의 적이라는 인식을 획득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이주노동자가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로 조직되길 원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것은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사업장에 노조가 있다면 그 노조에 이주노동자가 가입하고 그 노조는 이주노동자의 요구를 담아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사업장에는 노조가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평등노조와 같은 지역노조가 이들을 초기업단위로 조직하고 있다.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기업별 노조가 이주노동자를 동지로 조직하고, 지역노조에서 갈등없이 함께 조직하기 위해서 우선은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간의 문화적․정서적 간극을 좁히는 활동을 벌여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평등노조 이주지부는 기존의 노조가 이주노동자를 자연스런 동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력할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조직화는 궁극적으로 노조조직화를 목표로 한다. 노조는 이주노동자 대중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실현하는 기본적인 단위이며, 이주노동운동이 발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노조조직화를 위하여 이주노동운동진영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몇가지 정리하여 보자.
첫째, 임금체불, 산업재해, 폭행 등 이주노동자에게 발생하는 사업장에서의 문제를 기존 상담소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대리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왔던 데 비해 이젠, 투쟁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가운데 노조로의 전망도 찾을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체불된 필리핀인 여성 자수노동자가 체불된 임금을 해결하려 한다면 서울지역의류업노동조합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고 서의노와 함께 투쟁하여 쟁취함으로써 기존 노조와의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다.

둘째로, 기업별노조 또는 지역노조가 투쟁을 할 때 이주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동참시키자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설령 그러한 제안을 받았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주노동운동진영과 한국인 노동자(노조)와 함께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적극 동참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노동자 요구안에 이주노동자 관련 사안을 넣을 수 있도록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에 서울일반노조에는 상계동의 악덕 사업주가 고발되었다. 그 사업장에는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같이 일하는 데 사장의 폭력과 임금체불이 극에 달해 한국인 노동자가 노조를 찾아왔다. 이주노동자에게 대한 폭압은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노동자는 모두 떠나버리고 이주노동자만이 남아 기계를 돌리고 있다고 한다. 이미 사장으로부터 채권을 받은 몇몇 한국인 노동자는 채권할인과 사장 골탕먹이기에만 관심이 있지 다른 한국인 노동자나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서 일반노조도 접근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주노동운동진영은 서울 일반노조와 함께 그 사업장을 방문하고 그들의 노조조직화를 지원하는 것, 또는 함께 규탄 투쟁을 벌여내는 것 등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이주노동자에게 닥친 고통과 불합리에 대하여 기존 노조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난 10월 연수생으로 일하면서 한 남성노동자의 성노리개가 되어 결국 그에 의해 타살된 베트남 여성 노동자 니야가 있었다. 니야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치정에 의한 죽음이었지만 사실은 연수생제도가 강요한 폐쇄적 생활, 비인간적 대우에 있었다. 그녀가 일하던 대양염직에서 노조와해 공작에 의해 쫒겨난 조합 위원장은 당시 대전지역 여성노조의 간부가 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연수생제도를 알 수 있었고 인간 ‘니야’에 대하여 가졌던 일종의 도덕적 미움을 걷어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니야의 죽음을 계기로 여성노동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쉴자리조차 없어 아무데서나 종이를 깔고 누워야 하며, 일상적인 직장 내 성희롱, 열악한 위생상태 등 대양염직의 노동현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힘있게 지역노조와 함께 연수생제도 철폐, 노동환경 개선, 니야의 산재보상을 걸고 연대투쟁이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원인은 우선 이주노동운동 주체의 역량의 부족이었고, 또한 니야씨 보상건을 교회를 주축으로 한 지역모임에서 맡으면서 노조가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지역 내 여건 때문이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사건이었지만 이주노동자에게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지역 또는 단사 노조가 일반화시켜 함께 투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넷째는, 이주노동운동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가 강화되는 것이다.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는 지난 2001년 5월 발족한 신생노조이며, 이주노동자 노조로서는 한국에서 처음이다. 아직까지는 서울 경인지역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지역적 제한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역량이 강화된다면 규약변경을 통해 언제든지 전국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다. 현재는 상담을 통해 권리구제를 받고자 하는 노동자 보다 자신들의 공동체 활동을 통해 전부터 관계를 형성해 왔고 의식적으로 함께 하는 노동자들을 우선 조합원으로 조직하고 있다. 우리는 조합원의 숫자를 확대하는 것보다도 현재의 조합원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운동의 핵심 주체역량을 만들어 가는 것을 더욱 중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운동에 동의하는 노동자라고 할 지라도 노동조합에 가입함으로써 경찰이나 출입국관리국으로부터의 부당한 탄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에 가입하고 활동하는 지금의 조합원들은 우리 운동의 발전에 있어 너무도 소중한 존재들이다. 양보다 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조합원 확대에도 비중을 둘 계획이다. 이주노동자 스스로 조직하고 교육할 수 있을 만큼 핵심대오의 성장의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고, 조합원의 수가 많을수록 경찰과 출입국의 주목을 따돌리며 우리 스스로 엄호력을 키울 수있기 때문이다.

3. 한국의 이주노동 운동의 현황과 투쟁과제
1)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력 활용정책
한국정부는 3D업종에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의 정당한 이주와 취업을 보장하는 정책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연수생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미등록노동자는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노동자성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소수의 합법적인 연수생 노동력과 다수의 불법 체류상태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기만책을 공공연히 구사하고 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30만명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한국 땅에서 일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여 한국에는 이주노동자 유입정책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불법체류자의 암묵적 양산, 연수생의 노동력 착취’가 한국 정부의 비공식 정책이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는 중소자본가의 이해가 주요 뒷받침이다. 그들은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의 값싸고 말 잘듣는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90년대 초기에 급증한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를 사면하고 연수생제도라는 합법적인 틀거리를 만들어 시행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중소영세사업주의 요구에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를 계속적으로 증가시켜왔다.

체류유형불법체류자산업기술연수생현지법인연수생체류 수약 21만명약 8만명약 2만명법적용근로기준법, 산재보상법, 최저임금법 산재보상법, 최저임금법, 의료보험산재보상법, 최저임금법임금수준(12시간 노동)80만원50-60만원20만원입국형식연수생, 관광, 친지방문, 연예인 비자 등 입국 후 장기체류2년 짜리 연수생 비자
(연수취업생 시험 통과하면 1년 연장 가능)2년 또는 1년짜리 연수생 비자

한국 정부 특히 법무부(출입국관리국)은 그렇게 불법체류 미등록노동자를 양산하여 왔지만, 형식적인 법논리를 앞세워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하여 왔다. 당근은 불법체류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을 면제해주는 기간을 주고 출국을 종용하는 것이며 채찍은 강력 단속이다. 만성적인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의 권리 침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와는 거리가 먼 채, 표면적으로 불법체류자를 줄이기 위하여 ‘자진출국신고기간’을 두거나 ‘합동단속기간’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지난 92년부터 연례적으로 1-2개월 간 ‘자진출국신고 기간’을 두어 벌금을 면제해오다가 지난 IMF시기에 많이 내몰기 위하여 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6개월씩 벌금 면제기간을 운용하여왔다. 그리고 1년에 1회 정도씩 마약사범이나 국제 범죄조직 적발을 근거로 들어 12월 경 관계기관 합동단속이 있어왔다. 실제로는 경찰과 국정원, 출입국관리국이 진행하는 강력단속이었다.
최근에도 6월 18일부터 7월 31일까지 자진출국 신고 기간(출국벌금 면제, 고용주 처벌 면제)과 병행하여 6월 18일부터 7월 17일까지 합동단속을 벌였다. 합동단속기간 중, ‘관계부처 합동 및 자체단속을 병행 실시하여 적발되는 외국인은 강제퇴거조치 후 입국규제, 고용주도 엄중처벌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강력단속의 특징은, 이례적으로 년 중에 이루어지고 있고, 그 강도가 초유로 심하다는 것이다.

IMF 경제 위기 이후 현저하게 추방정책이 강화되었던 점을 감안하여 98년부터 상황을 살펴보면 지난 강력단속의 세기를 알 수 있다. 즉 1달에 1천명 정도씩 단속을 한데 비해, 10일만에 2천여명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강력한 불법체류자 추방정책의 강도를 더 이상 높일 수 없었다. 몇 번의 이와 같은 경험을 통해 계속 그 계획의 무모함을 검증하고 있으며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력의 공동화로 비난을 받고, 인권탄압이라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권이 이후에라도 자본가 정권은 점진적인 구조조정을 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법적 지위의 향상(근로기준법 적용, 산재보험 적용)으로 불법체류자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상승하자 훨씬 법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는 연수생을 늘이려는 것이다. 이것을 막아내는 유일한 길은 불법체류자이건 연수생이건 동등하게 노동법적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다.
계강제출국자진출국보호 중98년74,77812,96761,8115,43599년16,60212,0724,5306,4122000년 1.1-7.3111,7995,4256,3743,604비교계단속실적자진신고고용주 신고2001년 6.18-6.28까지1,9041,7634137

2)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의 투쟁과제
그래서 한국 정부 특히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이 타락하고 무능하여 21만명이나 되는 불법체류자가 양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 정부는 연수생들이 구조적으로 비싼 송출 수수료에 희생되고 지독한 저임금으로 인해 배정된 사업장에서 이탈하여 불법체류자로 나서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연수제도를 1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어왔다. 그리고 입국심사대는 노동력의 필요정도에 따라 탄력적으로 넓거나 좁았다. 최근 한국 정부는 출입국관리 직원들의 비리를 색출하기 위한 칼을 들었다. 이는 일부 타락한 출입국관리 직원들과 손을 잡은 불법브로커들이 이주노동 희망자에게 거짓 선전으로 고액의 수수료를 전가하면서 사기 이주를 확산하여 결국 노동자를 이중 삼중으로 수탈하는 고리를 끊어낸다는데 의의가 있다. 법제도의 모순과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를 이용하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계략 속에서 기생하는 이들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원인의 핵심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력 정책의 구조적 모순과 관료의 부패를 이주노동자 개개인에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외국인 범죄 급증, 흉포화”등의 나팔을 불며 이주노동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이주노동자를 청소하려 들고 있다.

2-1) 불법체류 자격 사면, 거주와 노동의 기회 쟁취
이주노동자는 세계적으로 노동유연화를 위한 가장 편리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제거하기 쉬운대상이다. 이주노동자의 유입과 추방은 철저하게 자본의 이해에 종속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자본은 노동력 유입을 위한 유인은 하되 불법체류자로 만들든지, 연수생으로 만들든지, 학생비자를 주어 제한적인 시간제 고용(아르바이트)을 허가하는 방식으로 편법적으로 이주노동력을 활용하고 있다. 특히 국제적 산업예비군을 활용하는 데 있어 ‘불법체류자’라는 올가미는 각 국의 자본가 정권에게 가장 매력적인 전술이 되고 있다. 산업예비군에 대한 자본의 일반적인 활용양태가 그러하듯이, 경기 호황 땐 합, 불법을 가리지 않고 유입하다가도 불황 땐 자본가 정부들이 나서 이주노동자를 추방한다. 지난 아시아 경제위기 시의 이주노동자 추방은 잔인하기까지했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특히 버마(미얀마)에서 이주한 노동자들을 태국정부는 총탄으로 내몰았다. 추방에 저항하다가 궁지에 몰린 버마인 이주노동자들이 국경 주변 병원을 점거하게되자 병원 안의 수백명을 모두 사살하였다. 그런 반면 대만에서 태국인 이주노동자를 10만명을 추방하려 하자 대만 근처에 함대를 띄워 자국 노동자들의 재귀환을 거부하였다. 태국 경제가 인도네시아, 한국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경제위기 때문에 자국의 노동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각지에서는 인종주의로 인한 폭력적인 사회적 축출이 자행되고 있다. 유럽의 경제 위기는 네오 나치즘을 재건하고 있다. 지난 해 2월에 스페인에서는 인종주의적 폭력사태가 벌어져 5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부상하였지만 경찰은 수수방관하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도 지난 IMF 시기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백색테러가 종종 발견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추방은 아닐지라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추방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서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 특히 법무부(출입국관리국)은 형식적인 법논리를 앞세워 불법체류자에 대한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였다. 당근은 불법체류자에게 부과하는 벌금을 면제해주는 기간을 주고 출국을 종용하는 것이며 채찍은 단속추방 강화이다. 지난 2001년 6월 18일부터 7월 17일까지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추방이 이루어졌다. 단속은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공장, 집, 심지어는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수갑을 20여개씩이나 차고 떨렁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목표물을 발견하면 폭언과 폭행으로 위협을 가하며 이주노동자의 목덜미를 나꿔채는 모습은 ‘인간사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불법체류 미등록노동자를 양산하여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편리하게 부려먹다가 원할 때에 쉽게 내쫒아내면서, 자본가들은 가장 쉽고 빠른 노동유연화 강화를 자축하며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지난 강력단속기간은 암울하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동네 슈퍼에도 마음놓고 갈 수 없었고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면 근처 산으로 줄행랑을 치거나 오도가도 못하면 기계 밑에라도 숨어야 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아니라도 눈을 마주치고 다가오는 한국인들은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는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다. 한 달 동안 모든 것은 정지되었다. 한국인 조합원들과 연대단위 동지들이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회를 가지고 단속과 추방을 저지하기 위한 여론조직화를 열심히 펼쳤지만, 이주노동자 당사자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직접 행동으로 나설 수 없는 분노를 삭여야만 했다. 한국 정부의 토사구팽 행태와 야만적 단속에 대하여 항의하기 위하여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내는 엽서를 쓰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이주노동자의 분노와 항의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공포를 갖는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쓴 추억이 될 것이다. ‘단속과 추방’은 그 자체가 우리에게 가해지는 일방적인 폭력이다. 단속과정에서의 폭행과 구금과정에서의 비참함 역시 한국 정부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 앞에 느끼는 인간적 모멸감과 분노는, 한국 노동자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강도가 더해가는 경찰의 폭력에 직면하고 있는 것과 같다. 노동자의 손에 들려 있는 떡조차도 빼앗아가려고 하는 김대중 정권은 우리의 공적이다.
우리는 단속과 추방을 이대로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21만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가 “예비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솎아내지는 것이 너무도 부당하고 억울하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를 불법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우리의 외침은 이주노동자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자국의 지긋지긋한 가난과 실업에 대한 절규이며, 이를 조장하는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규탄이며, 노동력은 유인하면서 합법적인 비자를 마련하지 않고 우리를 기만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다. 우리는 노동의 댓가를 정당하게 돌려 받을 권리가 있는 당당한 노동자이다. 합법적 체류자격과 취업의 자유 쟁취 투쟁을 통해 소중한 노동의 땀방울에 대하여 정당한 임금과 적합한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고야 말 것이다.

특히 불법체류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추방이 강행되는 한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은 허상에 불과하다. 출입국관리법 위반이라는 딱지 때문에 언제 어떻게 추방될 지 모르는 노동자에게 ‘고용안정’은 그림의 떡이며, ‘근기법 준수, 노동 3권’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다.
한국 정부의 외국인력 정책의 기조는 단기로테이션(필요한 기간에만 일하고 돌려보낸다)이다. 단순인력이 대다수인 제 3국의 외국인의 정착과 거주를 거부한다. 이것의 일환이 ‘연수생제도’이며, ‘불법체류자 단속’, ‘재입국 금지 규정’ 등이다. 비록 불법체류일지라도 활용하고 때가 되면(?) 돌려보내는 것이다.

2-2) 연수제도 완전철폐
지난 2000년 8월 노동부와 여당(민주당)이 내놓은 당정협의안에 의하면, “외국인근로자의 인권침해, 송출비리,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산업연수제도 운영의 잘못이라기 보단 ’제도 자체의 결함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더불어 “불법체류자가 외국인력 중 60%이상을 차지하는 기형적 현상을 초래, 이는 세계최고 수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불법체류자가 연수생보다 노동법의 보호를 더 많이 받는 등 ‘법집행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이라며 “종합적, 체계적인 인력정책을 수립, 시행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여야 할 시점”이라고 못박고 있다.
김대중 정권은 연수제도의 반인권 반노동자성에 대한 비난에 몰려 그의 개정안인 ‘고용허가제’를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연수제도에 의해 상당한 송출이익을 챙기고 있는 중기협측의 강력한 로비와 압력에 굴복하여 2001년 공식적인 포기선언을 하게 되었다. 지난 1월 10일, 김윤식 중소기업특위 위원장을 통해 “외국인 연수취업제를 확대 보완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며 공식적인 ‘고용허가제’ 포기선언을 한 것이다. 연수생 체류를 최장 3년에서 5년으로 늘이는 방안인 연수취업제 확대 보안 안은 연수취업제가 시행되기 시작한 98년부터 이미 중기협 측에서 주장해 온 바이다.
노벨평화상을 겨냥하여, ‘국가인위원회 설치(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e)’, ‘국가보안법 개정’과 더불어 상반기 국회의 3대 인권과제로 천명되었던 ‘고용허가제’는, 이제는 운동진영에서 많이 주지하게 되었듯이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옹호하고 법제도의 모순을 제거하는 정책이 아니었다. 자본가 내의 잇권 다툼으로 좌초되었을 뿐, ‘고용허가제’는 우리 이주노동자에게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고용허가제는 현재의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를 모두 내몰고 새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기에, 지금 한국 땅에 존재하는 21만 불법체류 미등록 노동자에게는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더불어 새로 들어오는 이들은, “고용허가 법안”에 의하면 언어 및 기술 교육도 받지 못하면서 배치된 사업장이 적성과 소질에 맞지 않는다 하여도 사업장을 옮길 수도 없게 되어있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연수제도보다 훨씬 후퇴한, 상상할 수 없는 악법이다. 더구나 사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고용중지”되더라도 “14일 이내에 지체없이 출국”되어야 하기에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지속적으로 강요당할 수 밖에 없다. 노동부는 ‘노동 3권’을 인정한다고 했지만 노동통제가 강화된 고용허가제 하에서 노동 3권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외노협 등 일부 시민단체들은 아직도 고용허가제를 지지하고 있다. 개념도 분명하지 않은 ‘노동허가제’라는 유럽식 제도명칭을 차용하여, 대선 전인 올 해 안에 법제도 개선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지만 이는 김대중 정권의 구조조정을 도와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법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한다는 것이 자본을 위한 것인지, 노동자를 위한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연수제도를 형식적으로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편법적으로 노동력을 수탈하려는 모든 형태의 연수제도를 반대한다. 연수제도의 완전한 철폐는 연수생노동자가 법적으로 동등한 노동권을 쟁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수제도의 완전한 철폐를 위하여 우선, 최저임금법이 현장에서 시행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아직도 최저임금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연수생이 많다. 또한 악랄하게 실질임금을 빼앗아가는 ‘강제적립금(Forced saving)'을 폐지하는 투쟁을 하고 있다. 중기협은 비난 여론에 밀려 이 지침을 철회했지만 아직도 현장에서는 임금의 일부를 저축한다는 명목으로 사업주가 강제로 떼어가고 연수생에서 이탈하면 돌려주지 않고 있다. 본국에 돌아갔지만 임금의 일부분인 이 적립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신고를 받아 본인에게 돌려주는 국가적인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 송출국 NGO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2-3) 노동법 완전적용 쟁취, 당당한 노동권 쟁취 투쟁
노동법의 기본법인 근로기준법은 제 5조에서 남녀의 차별적 대우를 하지 못하며 국적․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대다수의 비정규․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철저히 법적 소외를 당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조금 더 열악한 처지에 있으나 기본적으로 처한 처지가 같기에 비정규․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와 투쟁의요구가 같다.

특히 현장에서의 문제는 이주노동자 자신이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이기에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와 그 현실과 요구가 같다. 다만 차이는 이주노동자는 99% 미조직 노동자이고, 한국 노동자는 수적으로는 적으나마 조직대오를 갖춘 지역노조가 활발하게 투쟁하고 있고 투쟁의 역사와 경험 또한 장구하다는 것이다. 이젠 지역노조에서부터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고 연대하여 함께 투쟁할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지역노조 연대회의가 제출하는 3대 기본 요구안인 ‘노동조합에 근로감독권을 부여할 것, 실질적 노사관계에 있는 모든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할 것, 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할 것’은 이주노동자에게도 필요한 절박한 요구이다. 저임금 철폐와 근로조건 개선, 임금채권 적용범위의 문제, 산재 보상 등의 문제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인 이주노동자 당사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투쟁 그리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전면 확대하기 위한 투쟁을 함께 해나가면서 서로의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획득할 수 있고 쟁취된 권리를 당당히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참고> 이주노동자와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노동현실 비교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27만 이주노동자 중 70%를 차지하는 ‘불법체류미등록 노동자’(이하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한 유형과 30%정도의 비율을 차지하면서 외출과 외박의 자유도 감금당한 채 2년이라는 계약기간동안만 한시적으로 이 땅에서 노동하게 되는 ‘연수생노동자’의 유형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50%에 달하는 중국동포 노동자들 중 50%인 남성 노동자들은 대개 건설일용직에서 일하며, 50%인 여성 노동자들은 대개 식당 등 서비스 업종에서 일한다. 또다른 50%인 제 3세계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주로 금속, 화학, 봉제 등의 업종에서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특히 서울, 안산, 의정부, 인천, 수원 등 수도권 지역과 사상, 신평등 부산 4개 공단지역 주변에 많이 거주하며 노동하고 있다.

지난 해 노동부가 상담지원단체들을 통해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10인 이하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100만원선(정액+초과급)인데 비해 이주노동자의 임금수준은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 노동자에 비해 80%(79만원;정액+초과급)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10인 이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가 상여급 수준이 현저히 낮고 특별 및 초과급여가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주 당 평균 50여시간에 달하는 노동을 하는데 비해, 이주노동자는 주당 평균 64시간노동을 하면서 상여급이나 특별 및 초과급여를 전혀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대다수이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상식 이하의 임금을 주며 삶의 질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 자본에 맞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삶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투쟁에 이주노동자를 소외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흔히 ‘이주노동자’에게서 3D업종을 떠올린다.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400만 노동자가 영세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악성적인 소음과 분진, 유해한 작업환경과 사업주의 고의적인 안전장치 제거 등으로 인해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건강은 벼랑으로 내몰린 지 오래이다. 유해한 환경일수록 이주노동자나 연로한 노동자로 메꿔지고 있다. 임금체불도 이들의 현장에선 만성적인 문제이다. 96년 민주노총이 조사한 임금체불률을 보면 4인 이하 사업장 노동자의 34.7%가 임금체불을 경험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99년 노동부가 조사한 이주노동자의 임금체불률은 50.7%이다. 이들은 정부가 “사업주가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비호를 해줌으로써 근로기준법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거나, 무능력하고 반노동자적인 노동부와 근로감독관들에 의해 최소한의 권리마저 빼앗기고 있다.

한국 노동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98년 상반기, 300인 이상 대공장 노동자들의 대량 정리해고에 의한 실직률은 전체 실직률의 5.6%인데 반해 10인 미만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다가 실직된 수치는 62.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연쇄부도와 경기침체로 인한 중소영세사업체의 도산과 경영악화가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예로들은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의 불완전 고용의 심각성은 이주노동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경제위기로 인해 강화된 당국의 추방 정책으로 인해 단속을 기피하는 업주들이 줄줄이 이주노동자를 해고했다. 98년 중반 경 이주노동자 상담지원 단체들이 피부로 느낀 실업률은 (물론 공식적인 수치는 아니었지만) 98%였다. 그리고 이주노동자의 2/3가 출국하거나 추방되었다.

4. 맺음말
우리가 펼쳐가고자 하는 이주노동운동은 이주노동부문운동이 아니다.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우리 노동운동의 단결과 건강성을 복원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수많은 선배열사의 전투성과 계급성으로 이제까지 발전해 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민주노동운동은 구타와 해고, 수배와 구속의 억압을 뚫고 줄기차게 투쟁해왔다. 70년 전태일 열사로 다시 깨어난 노동운동이 90년 전노협을 결성하고 95년 민주노총을 세워내면서 노동현실도 전진해 왔다. 또한 목숨을 건 군사독재 퇴진 투쟁과 나아가 자본가 정권에 대한 노동자의 정치투쟁 역시 가열차게 이어져왔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지난 97년 이후 5년이 되어가도록 경제위기라는 이유로, 노동자를 마구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며,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노동자의 멱살을 잡아 흔들려는 자본의 일방적인 ‘노동자 길들이기’에 대항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식할 수 밖에 없었다. 자본이 교묘하게 밀어부치는 노사협조주의, 노동운동을 체제내화하려는 음모에 휘둘리는 운동 관료들이 있다. 이들은 아주 당당하게 노동자 분할지배구조를 인정하고 있고 몇가지 권리구제와 같은 자본가가 던져주는 ‘당근’에 만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국제 노동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소련의 몰락 이후 많은 노조들이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투항하였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안정된 노조들은 제 3세계 노동운동의 개량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들에게 이주노동운동은 하나의 장식거리에 불과하다. 심지어 노동력 유입 규제정책을 통해 이주노동력을 통제하는데 정부와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가하면, 인종차별을 완화하는 정책을 표방하지만 인종차별의 계급성을 숨기고 비주류 노동자들의 분노를 희석화시키고 있다.
또한 많은 이주노동자 운동 단체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성보다는 “가장 비천하고 열악한 삶을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권리구제 운동으로 이주노동운동을 국한시키고 있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를 위한 유엔 협약”비준운동이나 ILO 조약 비준운동과 같은 법제도 개선운동은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의식 강화와 조직화에 기여할 때만이 의미가 있다. 시혜와 동정을 박차고 주체를 중심으로 일어서는 과제는 이주노동운동의 핵심적 과제이다.

우리는 계급적 관점에서의 노동자 국제연대를 촉구하는 우리의 투쟁이 죽어가는 한국 노동운동을 다시 일깨울 것을 바라고 있다. 이는 또한 우리의 계급적 노동운동 속에서만이 이주노동운동의 전진방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는 실천적인 이주노동운동의 연대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거라고 아직은 기대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부터 서로 교류하고 실천적으로 연대하면서 서로를 알아나가고 신뢰를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 일부터 같이 하되 이주노동운동의 계급성을 확고히 세워내기 위한 교감과 실천으로 연대의 폭을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