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내 계급이란 결국 '노동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한편으로 나는 절망했다. 단란한 중산층,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이런저런 '고상한' 취미를 누리는 '우아한 쁘띠의 생활'을 나는 얼마나 동경했던가. 시끄러운 시장바닥, 십대 소녀들이 몸을 파는 사창가 근처에서 내가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던 것은, 그 길만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거,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도 그 가난 면할 길이란 고작 10%의 가능성만 갖고 있는 거,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사람들 인성이 피폐해지곤 하는 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는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해서 남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졸업장을 따도 내 생활이란 변화의 가능성이 그리 보이지 않았으며(주제에 자존심 때문에 취직 잘 되는 과를 선택하지도, 토익에 목숨 걸지도 않은 당연한 결과이겠으나), 그후 직장생활을 하며 나는 내가 천상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찌감치 사회에 눈을 떠 사회과학을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 가질 만한, '인텔리'라는 정체성도, 나는 갖지 못했다. 내 재산은 내 몸뚱이 하나며, 그나마 가진 건 대학졸업장,...
하지만 내가 확고하게 '프로레타리아 여성', 또한 '노동자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뒤, 내 삶이 다른 쪽으로 변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인터넷에 글도 쓰는 노동자이며, 영화도 보는 노동자인 것이다. 지식인이라, 프티라 인터넷에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자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빵'뿐 아니라 '장미'도 우리 노동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으로 쏠렸다. 올리브와 공공재 등에 관심을 갖게 된 거,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요즘, 나는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명동성당에 자주 간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우리 이주동지들이 눈에 밟혀 안절부절 못 한다. 그것은, 내게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너무나 깊숙하게 찍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의 집회 두어 번만 참여해 보라. 당장, 우리가, 당신이, 얼마나 지독하게 나이브하고 나태하고 입으로만 좌파를 중얼거렸는지 알게 된다. 강고한 투쟁과 노동자 의식, 더불어 '연대의식'을 갖고 집회마다 울려퍼지는 '노동자는 하나다' '한국노동자 이주노동자 단결투쟁 노동해방 쟁취하자'는 구호는 투쟁의 모범 그 자체이다. 그들이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투쟁하는가? 그렇지 않다. 현대자동차의 파업과 투쟁이 현자 노동자들만의 이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한 선구자적 투쟁이었듯, 지금 우리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주노동자/한국노동자의 구분 없이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가장 아래로부터의, 가장 격렬한, 가장 선도적인 투쟁이다.
법무부와 협상을 시도했을 때, 법무부는 "왜 이주노동자들이 파병반대집회에도 그렇게 참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집회에도 그렇게 열심히 참여하는가?"라고 불만을 내비치었다. 그들의 입장으로선 불만이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주동지들의 그같은 연대투쟁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럼에도, 제대로 연대하고 있지 못한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그 연대투쟁이 눈물나게 고맙다.
잡히면 강제출국인, 우리보다 더욱 절실한 상황에서도 우리 이주동지들은 각종 파병집회와 비정규직 노동자집회에 참여하여 강력한 연대투쟁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왜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우리는 이리도 나이브하고 미온적으로 관심을 가질 뿐인가?
2월이면 자진출국기간이 끝난다. 3월초 명동성당은 침탈을 맞을지도 모른다. 명동성당은 매일같이 긴장의 연속이다. 경찰과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매일같이 명동성당 앞을 배회하며, 심지어 이주동지들이 담배와 음료수와 기타의 것들을 사러 가는 명동성당 앞 편의점 직원들을 교육시키며 이주동지들을 협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주동지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잡혀서 강제출국 당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상관없다, 이 투쟁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40만 이주노동자들이 더이상 인간사냥을 당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면! 이라고. 이주동지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연대는 모든 노동자들의 역할(의무)이라고, 학생 역시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라고. 이주동지들은 도움과 시혜와 동정을 구걸하고 있지 않다. 하나된 노동자로서, 연대투쟁을 요구한다. 그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 강력한 연대로 화답해야 한다. 노동자의 무기란 단결, 연대투쟁밖에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두 연대로 화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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