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옷 보낸다던 내 남편, 왜 자살했나요"
[이주노동자이야기]네팔 고빈더 바하두르 채트리의 죽음... 묻혀버린 진실
  


2005년 겨울, 너무나 벗어나고 싶었지만 죽음 말고는 빠져나올 길이 없었던 공장에서 한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망자가 마셨다는 독극물이 든 컵에서는 지문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살'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도 아이들의 안부와 겨울 점퍼를 세심히 챙기던 남편, 아내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위험한 삶의 끝에는 억울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가족과 함께 지낼 예쁜 집을 지으며 꿈에 부풀었던 고빈더 바하두르 채트리. 그는 유서도 유언도 없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려진 죽음의 진실은 더 이상 밝혀낼 방법이 없고, 온 가족의 꿈이었던 정원이 딸린 예쁜 집은 가장의 부재와 함께 방치되어 흉물스러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의혹 투성이로 가득한 남편의 최후, 그러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자살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아내에게는, 이미 끝난 수사를 뒤집을 증거도 힘이 되는 증언을 보태줄 증인도 없습니다. 한국보다도 더 먼 곳으로 떠나보낸 남편을 향해, 미처 전하지 못한 사랑과 믿음의 말을 되뇌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 마디의 진술로 결론난 자살


"여기 한국인데요. 저는 KFSB(Korea Federation of Small and Medium Business·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는 구룽이라고 합니다. 당신 남편이 약을 먹었어요.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요. 내일까지 가봐야 알아요.”
"아니, 왜 약을 마셨는데요?"
"그거야 모르죠. 집안 사정이 그러니까 마셨겠죠"
"뚜뚜뚜…."

남편 죽음이 너무나도 냉정하게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끊긴 전화를 들고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남편이 자살을 했답니다. 남편이 살기 싫어서, 일이 힘들어서 일부러 약을 먹었답니다. 우리 식구들을 남겨두고 말입니다.

"돈은 잘 저축하고 있느냐, 아이들은 잘 있느냐, 며칠 후에 아이들 겨울 점퍼를 보내겠다." 평소처럼 통화했는데, 그런 남편이 이 세상이 살기 싫어 죽음을 택했답니다.

2005년 11월 10일에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병원 지하의 시신 안치실에 열흘째 누워있었습니다.

종이컵에 든 화학 약품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고, 남편과 같은 방을 쓰던 네팔 사람이 경찰서에서 이미 진술을 끝낸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게 사실이냐고, 남편이 정말 일부러 그 약품을 먹은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사람은 아예 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죽음 뒤에야 떠날 수 있었던 공장



사실 우리 남편은 그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2002년 연수생으로 입국한 남편이 인천에 있는 그 회사에 들어갈 때는 세 명이 함께 였는데, 두 명은 이미 회사를 그만 뒀고 남편만 혼자 일하고 있었다 합니다.

일하기 힘드니 공장을 옮겨 달라고 KFSB에 부탁한 적도 있고, 그것이 잘 안 되어서 이틀 정도 회사를 안 간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결국 회사를 옮기지 못하고 다시 그 회사로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다시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서 말입니다. 많이 괴로웠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남편이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책임감 없고, 나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한국에 도착한 지 두 달이 지난 후에야 회사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했던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네팔에 있는 우리들 때문에 그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곳에서 만난 사장님은 남편이 죽기 전에 무슨 얘기를 하더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제 대답은 들으려고도 않더니, 아마 집안 일 때문에 자살을 했을 거라고 단정하더군요.

남편은 음독 사고 후에도 만 하루 동안이나 의식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어느 누구도 남편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제게 위로금이라고 몇푼 쥐어주고 나서 두세 번 사인을 하게 하고, 굳이 차를 도중에 세워 다시는 이 일에 대해 다른 요구를 하지 말라고 거듭 확인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대답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우리 남편이 약을 마시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약을 마시는 걸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요. 저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증거도 증인도 없이, 서둘러 정리된 사건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제 남편이 종이컵에 든 약품을 먹고 자살을 했다면, 분명 종이컵에 남편의 지문이 남았을 텐데, 남편의 지문은 찾을 수 없었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컵에 지문을 묻히지 않고 어떻게 컵에 든 약을 먹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어떻게 제 남편이 자살을 한 거라고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건가요?

저는 남편을 그렇게 보내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보내면 다음 세상에서도 남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던 단체에 연락해서 우리 남편이 정말 자살을 한 것인지 한 번만 더 조사해 사실을 밝혀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단체는 그것을 다시 뒤집을 수 있는 가능성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왔던 여러 단체 중에는 회사에서 보상금 받았으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원하느냐며 그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기색을 내보인 단체도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더군요. 제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소리를 쳐도 한국 사람들에게 그런 하찮은 몸부림은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아무리 의문을 제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경찰서에서도 이미 확보한 진술대로 수사를 마무리 했다고 했습니다. 산재보험에서도 이미 네팔 사람이 진술한 대로, 자살인 것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보험으로 처리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가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남편은 절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처가 되어버린 짓다 만 집, 모든 것을 주고 간 남편의 유산



남편은 예쁜 집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공부방도 마련해 주고, 예쁜 꽃이 해마다 피는 꽃밭을 가꾸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이 집을 지었습니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을 아끼고 아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 말끔히 단장한 이 집을 보여주며 고맙다고, 그동안 고생했노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가족의 자그마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돈이 끊기는 바람에 짓다 말아 흉물스럽게 된 집은 우리 가족에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 부족한 엄마를 아이들이 위로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한참 사춘기를 겪을 나이여서 남편의 죽음이 큰 상처가 되었을텐데도 씩씩하게 저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남편이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제가 대신 지켜줄 수 있을지 자꾸 자신이 없어집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녀석들 공부만큼은 하고싶은 만큼 다 하도록 뒷바라지 해 주겠다던 남편의 약속을 말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자꾸 남편에게 미안해집니다.


여보, 당신은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어요.
그 사랑을 무턱대고 받기만 한 것이 늘 미안합니다.
여보, 당신의 죽음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아요.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요.
당신이 세상을 향해 하고픈 말, 대신 전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신이 이루고 싶어했던 꿈,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주노동자의 죽음...밝힐 수 없는 진실  



이주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때때로 그 원인과 진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려울 때가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주위의 증언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주위에 있던 또다른 이주노동자들은 미등록(불법체류자)이라는 자기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 증언을 꺼리는 이들이 많다. 그 때문에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혀내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몇해 전 인천에서 사망한 미얀마인의 경우, 실제로는 공장에서 사망하였으나 유해물질 취급을 소홀히 해왔던 사장이 그런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시신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친구가 그 사실을 증언하고 나섰지만, 오히려 불법체류 사실이 발각되어 자신만 추방당하고 말았다. 증인이 강제추방당하면서 사건의 진실이 영원히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