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특강] 만국의 불안정한 자여 공모하라


정희진과 함께한 ‘누구의 자존심? 자존심의 경합’- 자존심은 관계 속의 개념, 약자들의 연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야

제4회 인터뷰 특강- 자존심 ⑤



▣ 글 손은영 13기 독자편집위원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강연은 시작되자마자 폭소의 도가니였다”라고 일단 말해두자. 서글서글하면서 빠른 말투는 청중을 휘어잡기 충분했고, 거기에 청중을 폭소하게 만드는 일화들이 더해져 강연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활기찼다. 지난해에 강연을 들었던 사람이 반일 정도로 정희진씨의 마력은 ‘중독성’이 있는 듯. 이번에 처음 그의 강연을 들었는데 다음에도 꼭 강연을 듣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회자 서해성씨는 어느 때보다도 질문을 많이 준비해왔다. 질문 모두를 지면에 싣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 정희진씨



머리로만 생각하는 남성 진보주의자?


서해성(이하 서): 자칭 남성 진보주의자들은, 저를 포함해서, 머리는 진보적으로 생각하면서 몸은 봉건적으로 행동합니다.

정희진(이하 정): 음 그 질문이 잘못된 게, 몸은 결국 머리의 일부잖아요. (웃음) 그걸 전제한다면 그분들은 진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서: 보통 그런 사람에게 처방은 어떻게 내리십니까?

정: 아니, 그게… 페미니스트는 질문에 답변을 내리거나, 인생 지침을 내려주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많은 남성들이 그런 문제를 사적인 관계에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자본가가 노동자를 앉혀놓고 ‘내가 너를 착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웃음)

서: 대체로 한국에서 통장 관리는 여성의 역할이어서 ‘한국은 모권사회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건 제 생각은 아닙니다. 앞으로의 질문도 결코 제 생각은 아니니 오해 마십시오. (웃음)

정: 그건 성별 분업일 뿐이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20% 정도라고 합니다. 성별 분업에서 생산과 소비는 남성의 기준입니다. 콩나물을 사는 건 소비일까요, 생산일까요. 대학까지 나와서 가정주부로 지내는 중상층 주부의 재테크에 대해서 누가 연구를 해줬으면 해요. 사회의 생산·소비 관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까라는 문제를요. 여성주의는, 데이트 비용을 안 내려고,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성별’이라는 사회제도를 문제화하는 세계관이지요. 태어나자마자 남자아이는 파란색, 여자아이는 분홍색 내복을 입힙니다. 여기서는 굳이 정치적·사회적 의미가 발생되지 않아요. 그런데 세제는 파란색, 유연제는 분홍색이지요. 강력하다는 건 파란색이고 부드러운 건 분홍색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면서도 통찰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는 정희진씨와 그녀의 빈틈을 적절히 노려 마이크까지 쓰러뜨리게 만드는(정희진씨는 서해성씨의 말에 크게 웃다 마이크를 떨어뜨렸다) 서해성씨. 정희진씨는, 지난해에 “강의를 망쳐서” 삼천포로 빠지지 않기 위해 몇 시 몇 분에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것인지 빼곡히 적어왔다며, 수첩을 들어 보였다. 서해성씨의 “조선후기 양반 족보 매매가 여성 억압을 가중했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변에서 그의 강연은 시작되었다.


여성주의는 질문을 바꿔보는 것


심심찮게 등장하는 ‘된장녀, 엘프녀, 막스걸, 승리의 여신’ 등의 단어를 보면 현대사회가 여성중심주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승리의 남신’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웃음) 언설의 주체가 언제나 ‘남성’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로 인해 ‘여성’은 재현의 짐을 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부모님을 보면서 ‘가부장’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하나 내렸다. ‘가부장제란 여성으로 하여금 남자에 대해 끊임없이 기대하게 하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언어다. 사생아란 무엇인가. 사적으로 태어난, 공적인 남성의 허락 없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동성동본이라면 어머니와 같은 성씨도 금혼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애는 여자가 낳지만 시민권은 남성이 독점한다. 여성의 몸과 노동력을 남성이 의미를 부여해주고 문서화하는 것이 바로 족보다.

여성주의란 ‘앎의 방식’에 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즉, 질문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나. 이는 바꿔 말하면 고정관념이 사실을 만든다는 것이다. 알기 위해서는 보지 않아야, 눈을 감아야 새로운 게 보인다. 어머니가 하는 말 중에 ‘남자는 울타리’란 말도 있다. 그러면 울타리는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남자들의 기가 죽었다라고 하는데, 그럴 땐 ‘기 살려서 어따 쓸려고’라고 묻는다. 도서관에서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검색해보라. 엄청나게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무엇인가? 책상인가? (웃음) ‘흑인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흑인은 누구인가’ 아닌가. 이제 이 수첩대로 주제를 이야기하자. 이번 강의에서 이야기할 것은 누구와의 관계에서의 자존심인가와, 자존심의 경합에 관한 것이다.

우선 ‘누구와의 관계에서의 자존심인가’. 많은 경우 성역할, 계급의식, 열등의식 등에서 자존심을 찾는데, 자존심은 ‘관계적 개념’이다. 상대방이 없다면 자존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서태지 팬클럽 회원임을 친구에게 알렸을 때, 내 친구는 “네가”라고 말하더라. 나와 같은 조직에 속한다는 게 부끄럽고 자존심 상한다는 것이다. (웃음)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배용준의 팬클럽이 중년 여성이라고 하는데, 이후 한국의 젊은 배용준 팬들이 많이 이탈했다더라. 같은 것이라도 상대방에 따라 달라진다. 장동건이 성폭력을 했다면 누가 믿나. 세팅이 없다면 일반화할 수 없다.

이처럼 자존심은 누구와의 관계에서 논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다. 거기다 모든 정체성이 무균일하기까지 하다. 고정된 ‘나’는 없다. 존재가 없기 때문에, 자존심을 논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강자의 자존심과 약자의 자존심이 충돌할 때 보통 약자 편을 들기 마련이다.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 간에 갈등이 일어날 때인데, 장애 남성의 “우리에게 성매매를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장애 여성의 성적 권리에는 무관심하고, 인간의 성활동을 본능으로 구성하고, 비장애 남성의 정상성을 욕망하는 것이기에 ‘보편적 인권’에 위배된다. 자존심이 경합할 때, 기존의 자존심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장애 남성이 비장애 남성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 남성과 비장애 여성(사회적 약자)이 연대할 때 사회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여성도 군대 가라’고 하지 말고 현역 간 사람과 여성주의자가, 이주노동자와 장애남성과 게이가 연대해야 한다. 도미야마 이치로가 “만국의 불안정한 자(Precariats)여 공모하라”고 말했다. 자존심을 관계적이고 유동적으로 파악해서 새로운 질서와 대안을 탄생시켜야 한다.


가부장 사회에서 성매매 근절은 없다


‘결의’와는 달리 강의는 가끔 삼천포로 빠졌지만(녹음을 걱정하면서 끄집어낸 미국의 차기 집권 전략까지 나왔다!) 밤 9시까지 내내 ‘유쾌 통쾌’했다. 자리를 정리할 시간도 없어 사회자와 강연자가 선 채로 청중의 질문을 받았다.


청중1: 페미니스트에게 종종 공격받는 김기덕 감독의 표현방식에 대한 의견과 ‘마초’에 대한 견해는?

정: 김기덕 감독이 몇몇 영화에서 자신의 분노를 여성을 통해 표출하면서 문제가 된 것인데, 그것을 제외하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와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할 정도로. 마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웃음) 여러 타입의 남성을 나열했을 때 주로 낮은 계층의 남성들을 ‘마초’라고 지칭한다. ‘마초’ 자체에서도 계급이 분류되는 것인데, 결국 누구와의 맥락에서 관계인지 따져봐야 안다.

청중2: 성매매 특별법으로 성매매 집결지가 불법화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지하 시장이 더 커졌는데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정: 좋은 질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대책이 없다. 성매매는 자본주의의 시장법칙에 따라 엄청난 변종이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가부장 사회에서 더욱 확고한 존재를 가진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녀관계는 성매매의 원형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바로 성별화된 매력의 교환이 남녀관계를 조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돈, 기술 등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여자는 몸, 외모 등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돼 결국 아무리 평등화된 교환이 된다고 해도 성차별일 수밖에 없다. 성매매는 이렇게 복잡한 관계에 근거해 있어 결코 근절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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