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진력 있는 당 활동가
- 이런 최고위원이 하나는 있어야 당이 산다-


30대 중반에 만난 김광수동지가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었다. 서로 알고 함께 활동해 온지 8년여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와 함께 해 온 지난 8년은, 김광수동지와 내가 수많은 당활동가와 당원들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준비하고 만들어온 과정 그것이었다.

김광수동지로서도 한창 혈기왕성하게 활동할 시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30대 중후반과 40대 초반이 그 시기였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함께 일하는 동지로서 나이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고, 선후배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10년 가까운 짧지 않은 그 소중한 시기를 김광수동지는 나의 후배로서 좋은 일 굳은 일 마다않고, 실무를 총괄해 온 기간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이 바탕이 된 것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세상을 바꾸어내려는 전망과 의지,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8년 5월 나는 민주노총 제2기 집행부(위원장 이갑용)에서 정치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98년 2월 민주노총이 제1기 배석범직무대행체제에서, 당시 김대중대통령당선자와의 협의로, 근로자파견법제정과 정리해고 즉각 실시 법안에 동의해주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키로 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이를 승인받기 위한 대의원대회에서 이를 부결시키고 민주노총 전 임원 총사퇴와 총파업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비대위가 파업을 실행치 못하고 임원선거에 들어갔을 때, 민주노총 혁신 집행부 구성을 기치로 승리, 민주노총 제2기 혁신 집행부를 세웠던 것이다.

당시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부결, 혁신 집행부 구성 등에서 나와 동료들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었는데, 이때 함께 하였던 하길영(초기 영등포지부(지구당) 부위원장)동지와 막 감옥에서 나온 김광수동지, 이지은동지 등이 정치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 중 선배인 김광수동지를 실무책임자로 셋이서 정치위원회 실무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당시 정치위원회는 민주노총의 투쟁 중심축을 세우고, 혁신을 추진하는데 함께 역할을 하는 이외에, 담당 업무인 정치사업에서도 활발하게 사업을 펼쳐 나갔다. 김광수동지 등 실무자들은 민주노총의 국장급 이상의 능력이 충분함에도, 무보수로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98년 6월 지자체선거에서 민주노총의 주도로 국민승리21과 지역 및 관련 연맹 민주노총 조직들과 협력, 울산에서 북구와 동구청장을 당선시키는 등 다수 광역시의원과 구의원을 배출하였고, 각 연맹과 지역본부 정치위원회를 구성하고, 주간 정치소식지를 발행, 정치교육을 위한 소책자 발행, 제 노동운동, 민중운동 단체들과 연속적인 정치토론회 개최 등을 실시하였다. 제3기에 이르는 정치학교를 진행하였는데 이 때 강사로 참여한 사람들이 나중에 안병욱 강령제정위원장을 비롯하여 민주노동당 강령제정위원의 다수를 이루어, 당 강령 제정을 주도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건설을 추진한 것이었다. 정치위원회 회의와 수련회를 연속적으로 개최하고, 민주노총 산하 지역본부와 연맹을 전국적으로 순회하며 토론회, 간담회, 교육을 벌이고, 각 연맹과 지역본부 간부와 조합원들로 당원을 모집하는 사업들을 정력적으로 벌여 나갔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합적인 활동의 결과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결의를 거쳐서 99년 3월경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내가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으로서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 역할을 마치고, 99년 9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아 당(준비위)에 상근하게 되었을 때 김광수동지 역시 나와 함께 당으로 옯겨와 상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광수동지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 조직국장을 맡고서 당시 창당준비위 상임대표와 민주노총 위원장과 나와 함께 전국의 민주노총 지역조직과 초기 당 지역추진위를 순회하면서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또한 중앙의 당 조직을 설계하는 사업을 함께 하였던 것이다. 당시 창당준비위 조직위원회에는 오재영 조직국장(현 조직실장)과 박용진(현 대변인), 오현아, 정호진(서울시당 사무처장) 동지 등이 함께 조직사업을 맡고 있었다.



2001년 9월 민주노동당에 공공부문민영화저지특위(공공특위)를 설치, 내가 공공특위장을 맡게 되었을 때 나와 김광수동지는 함께 다시 민주노동당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다. 공공특위는 당시 노동자들의 공공부문민영화 저지투쟁을 지원하는 사업과 공기업, 교육, 의료, 재정 부문의 당 정책을 생산하는 사업의 두 축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공공부문사유화, 해외매각 저지를 위해서 공동총파업투쟁을 추진중이던 발전산업노조, 철도노조, 가스노조등 분할 민영화와 해외매각 저지투쟁을 지원키 위하여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을 위시하여 광범위한 사회, 시민단체들을 망라하여 <지원대책위>를 결성하여 지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의료보험 사보험실시 기도 저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역시도당과 지역위원회에 공공특위를 설치하거나 담당자를 조직해 나갔고, 중앙과 지역에서 당원 대중이 참여하는 대중집회 개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책위원회와 합동으로 당의 공기업, 교육, 의료, 재정정책을 마련키로 하고, 공기업, 교육, 의료 소위는 공공특위가 맡고, 재정소위는 정책위원회가 맡아서 전교조, 보건의료노조, 사회보험노조,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각 소위를 구성하고 각기 수차례의 정책토론회를 진행해서 그 결과로서 공공특위 주도로 당의 공기업, 교육, 의료 정책의 토대가 된 정책자료집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후에 정책위원회가 부유세 당 정책을 마련하는데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활동에서 김광수동지는, 각 부문의 전문 활동가들과 더불어서 그 내용을 채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공공특위 실무자로서 후배 강진석, 정문수 등을 참여시켜 정책생산과 선전물 발행 등 실무를 총괄하였다.

김광수동지는 그 동안에도 정치연수원 교육위원을 맡아 왔고, 당내 비정규직철폐 순회투쟁단장을 맡아 전국 순회투쟁의 성과로서 당내 비정규직철폐운동본부를 설치케 하고, 평등연대 의장 등을 맡으면서 정책, 선전 역량과 조직역량, 사업추진력을 보여주었다.



김광수동지와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은 그가 일을 파악하고 기획하는 능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인정할 것이다. 항상 원칙을 견지하고 거침없이 이를 실현해나가는 행동력을 볼 것이다. 김광수동지는 때로는 거침없는 비판과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모났다>는 비판을 듣는다. 당은 상당히 차이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서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단결하고 조화를 이루어서 함께 당을 운영해 나가는 것이라고 볼 때 그러한 지적에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 거침없는 비판의 바탕에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 새로운 세상을 내오고자하는 헌신성과 열정이 충만해 있다. 무엇보다도 이 혹독한 세상을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함께 하고 있다.

지금 당은 수많은 원칙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당의 위기라고 일컫는 지금 시기에 특히 김광수동지와 같이 원칙을 견지하고, 동지에 대한 애정과 변혁에의 열정, 그리고 능력과 추진력이 겸비된 최고위원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기호 1번 최고위원 후보 김광수 동지를 추천하며
정윤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