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든 이주노동자 소모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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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호] 2010년 05월 04일 (화) 09:35:01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5월1일은 세계노동절 120주년. 120년 내걸었던 ‘8시간 노동 쟁취’는 여전히 전 세계 많은 노동자들에게 숙제로 남겨져있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여전히 법전 안에서만 존재한다. 2004년 8월부터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이들의 열악한 작업 조건과 저임금은 ‘상식’처럼 굳어졌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라며 이들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다. 한국인들이 더 이상 꿈꾸지 않는 공간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 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를 선택해야 한다.


소모뚜씨(35)의 명함에는 직함이 여러 개 새겨져 있다. 'MWTV(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2004년 결성된 '버마행동' 총무,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보컬·작곡·기타리스트… 날래 보이는 작고 마른 몸으로 그는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날라 간다. 어디 한 군데 편히 앉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소모뚜씨는 바빴다. 그와 인터뷰는 이동 중인 전철 안에서 주로 이뤄졌다.

소모뚜씨를 만난 4월29일, 그는 언론시민단체 활동가 14명이 낸 ‘공영방송 국민 컨설팅 보고서’의 공저자로 참여해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오후에는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iFM(옛 iTV 경인방송)<다문화 톡톡>의 진행을 위해 인천으로 향해야 했다. OBS 라디오 <다문화 톡톡>의 김희성 PD는 “이주노동 당사자가 직접 라디오를 진행하는 것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장일호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다문화 톡톡>의 진행하는소모뚜(맨 오른쪽)
이날은 인천여성의 전화 김성미경 회장이 게스트로 출연해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인 ‘아시아 이주 여성 마을’을 소개했다. MWTV의 대표이기도 한 소모뚜씨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방송이 끝난 후, 소모뚜씨는 김성미경 회장이 일하는 곳을 방문해 둘러보고 방송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다시 서울로…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보증금 50만 원짜리 작은 단칸방은 집이 아닌 ‘자는 곳’이다. 그는 다음 날 스탑 크랙다운 공연을 하러 대전으로 간다고 했다. 빼곡한 스케줄을 듣고 있던 기자가 놀라워하자, 소모뚜씨가 말했다.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주노동자)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해요. 그 사람들 생각하면 힘들 수가 없어요”

여느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소모뚜씨는 이 곳 저 곳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닐 수 있다. 공장 같은 ‘현장’에서 일하기보다, 현장을 ‘찾아다니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에서 버마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그가 ‘인도적 지위’ 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적 지위 인정은 난민과는 다르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불안하지만 당장 추방될 염려는 없다. 현재 소모뚜씨는 난민 신청 소송 중이다.

물론 소모뚜씨도 처음부터 ‘활동가’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지도 벌써 15년, 스무 살 때이다. 버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는 정치적으로는 올곧았으나,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했다. 그러나 소모뚜씨는 민주화 운동을 했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민주화 운동’의 선배격인 한국에서 버마를 도울 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모뚜 '주임'에서 '활동가'가 되기까지

처음 한국에 와 들어간 곳은 박스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8년을 일했다. 그 공장은 ‘소모뚜 주임’이라는 직책을 붙여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심해졌다. 추방되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주임으로 눈 딱 감고 일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성공회 성당 앞에 농성장을 꾸렸는데 ‘주임’ 소모뚜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이주노동자들이 외친 구호, ‘스탑크랙다운(Stop Crack Downㆍ단속을 멈춰라)’은 그대로 밴드 이름이 됐다. “피부 서로 달라도/문화 서로 달라도/우리 서로 아름 다음 동지/혼자 가는 것보다/함께 가면 좋은 걸/함께 사는 이 세상 우리를 위하여.(스탑크랙다운 노래 <와> 中)” 그들은 그렇게 ‘함께 살자’라고 한국말로 노래했다.

농성이 마무리 되면서 소모뚜는 소화기 압력계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소모뚜의 ‘강행군’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월~토요일까지 일하고, 단 하루 쉬는 일요일이면 밴드 연습을 하거나 공연을 가졌다. ‘버마행동’이 꾸려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2005년 MWTV가 만들어지면서는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사장은 늘 소모뚜를 배려해주곤 했다.

   
ⓒ한향란
스탑크랙다운 공연
그러다 지난해 10월 스탑 크랙다운의 멤버인 미노드 목탄, ‘미누’라고 불리던 ‘유명한’ 한 이주노동자가 강제 추방 됐다. 미누의 추방과 함께 소모뚜씨 역시 ‘미누의 친구’로 언론에 입길이 오르내렸다. 어느 날 사장이 소모뚜씨를 불렀다. “네가 열심히 활동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부지런히 활동하는 줄은 몰랐다. 혹시나 정부에서 압력이 올까 무섭다. 일 정리 해달라” 추방당한 것은 미누씨 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모뚜씨는 일자리에서 ‘추방’ 당했다. 그리고 돌아보니 2003년 결성 된 스탑 크랙다운의 멤버 5명 중 남아 있는 사람도 둘 밖에 되지 않았다.

공구 대신 소모뚜씨는 카메라를 들었다. MWTV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그에게 MWTV는 단순히 방송이 아니다. 그는 “MWTV를 통해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스스로 찾아다니면서 노동법, 산재, 최저임금법 등을 공부했다. 취재 차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 꼬박꼬박 참여해 강의를 듣곤 한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국내 기업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이주노동자들은 또 한 번 실직의 벼랑 끝으로 몰렸다. 정부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수를 제한하는 ‘건설업 취업허가제’를 도입했고, 기존에 회사에서 부담하던 기숙사비와 식대 등을 이주노동자 월급에서 공제하는 방안 도입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시행되던 취학 아동을 둔 미등록 이주 노동자 부모들의 한시적 체류 허용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 들어 중단 됐다. 노동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도 선 구제하고 후 통보한다’라는 지침을 삭제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불임금을 상담하러 가면 노동부는 문제 해결에 앞서 법무부에 신고부터 하게 했다.

누구보다 이런 현장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의 ‘속살’을 잘 알고 있는 소모뚜씨는 말한다. “이주노동자들에 나라를 떠나올 때,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것 아니에요.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떠나오는 경우가 많죠. 저 역시 그랬구요. 이주노동자들,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싼 값으로 일해요. 미디어에서는 명절 때 TV에 한복 입고 나와 한국말로 노래하고, 한국 음식 잘 먹는…그런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마이크를 놓을 수가 없어요. 아직 알려야 할 현실이 더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