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향이 만난 사람]파키스탄 출신 귀화인 박이스라르씨
 글·사진 김지환 기자 kjh1010@kyunghyang.com
  • 댓글 0

  • 0
  • 0
ㆍ“이주노동자들의 아픔 누구보다 잘알죠”
고물상 운영하며 인권센터 다문화강사
ㆍ5년째 인권운동 ‘이주노동자의 아버지’

고향을 떠나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인종차별이 심한 대한민국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유없이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 되어버린 건 여전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편견과 차별 때문이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귀화한 박이스라르씨(44)에게 그 같은 쓰라린 눈물의 시간은 올해로 벌써 17년째를 맞는다.

박이스라르씨는 17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차별받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부천에서 고물상 ‘라자자원’을 운영하는 박씨가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더 유명세를 타는 건 어쩌면 그렇게 긴 터널을 견디며 쌓아온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박씨를 처음 알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지난해 12월18일 세계이주민의 날을 앞두고 인천 남동공단의 한 숙소에서 그는 파키스탄 이주노동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기 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는 여전히 바삐 전화를 받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가끔씩 고물상에서 일하는 중에도 멀리 부산이나 대구에서까지 전화가 오곤 해요. 얼마나 절박했으면 저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했겠어요.”

사실 박씨 역시 한국에서의 생활은 평범한 이주노동자에서 출발했다. 고향을 떠나 금의환향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한국에 온 그였지만 여전히 그도 프레스기를 돌리며 찌든 기름 냄새에 취한 이주노동자 신분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는 건 마음 한켠에 자리잡은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제게도 생업이 있지요. 하지만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길이 옮겨지더라고요.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순 없지만 작은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껴왔던 게 아닌가 싶네요.”

고물상 사장 박씨보다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진 직함은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다문화강사다. 올해로 5년째 인권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초·중·고등학교에서 다문화 강사로도 활동하며 아이들에게 ‘차이’와 ‘차별’을 가르친다.

‘이주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이스라르씨가 인천 남동공단에서 파키스탄 이주노동자들과 상담하고 있다.



사실 박씨가 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늘 그의 곁을 지켜준 든든한 후원자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년 전부터는 부인 박영금씨(40) 역시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에서 다문화 교육담당을 맡을 만큼 박씨네 가족은 이제 이주노동자들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사람들은 박씨 부부의 만남을 보면서 천생연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잘 모르겠지만 인연인 것은 확실해요.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보였던 제가 아내에게 만큼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했다고 하니 말이에요.”

박씨가 부인을 만난 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아직 한국말조차 낯선 박씨가 경기도 안양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지금의 부인이 안내자 역할을 해준 게 첫 인연이었다.

“피부색도 다른 낯선 외국남자가 길을 묻는데 아내가 성심성의껏 퍽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거에요. 그 인상이 무척 좋아 차 한 잔을 권유했고 흔쾌히 수락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져 결혼까지 골인하게 됐죠.”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두 사람의 결혼 역시 순탄치 않은 과정이 있었다. 파키스탄인인 사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처가쪽의 반대는 물론 피부색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겪을 고통이 염려스러운 파키스탄 가족도 한국인 아내와의 결혼이 결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둘도 없는 사위가 됐지만 정말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결혼 후에도 제 불안한 신분에 아내가 많이 힘들어 했죠.”

결혼 후에도 영주권이 나오지 않던 박씨는 여행 비자로 3개월에 한 번씩 파키스탄을 다녀오며 한국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파키스탄을 다녀온 횟수만 수십 번이 넘을 정도다.

첫째 아들 하비비(12)가 뱃속에 있을 땐 월세조차 밀릴 정도로 힘든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박씨는 울며 겨자먹기로 만삭의 아내를 두고 파키스탄을 다녀올 수밖에 없는 상황도 겪어야 했다.

“물론 힘들었지만 사실 귀화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 뿌리를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또 귀화한다고 해서 얼굴색이 바뀌고 말투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내가 한국에서 겪을 차별은 똑같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박씨는 고생하는 아내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는데 식당일 등 궂은 일을 마다 않고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박씨가 귀화를 결심한 건 6년 전이었다. “아내가 간절히 원했어요. 어느 날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겠다고 결심이 서게 돼 그날로 바로 귀화신청을 하게 됐죠.” 귀화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박씨는 술에 취해 있었다. 부천역을 지나 중동역에서 내린 그는 밤거리를 혼자 걸으며 펑펑 눈물도 흘렸다. 고향을 버린 죄책감 때문인지 한국에서 고생하는 가족이 미안해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박씨는 태어나서 그처럼 많은 눈물을 흘린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저는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공장에서 막노동하는 이주노동자들보다는 행복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고향에 계신 가족도 모두 잘 사는 편이라 제가 뒷바라지를 안 해줘도 먹고 살 만하니 그나마 다행이죠.”

8남매 중 넷째인 박씨의 고향 가족은 파키스탄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큰 형이 군 장성이고, 둘째형이 세관 간부, 셋째형이 개인사업 등으로 모두 박씨보다는 풍족하게 살고 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형제들 모두 잘 살기 때문에 저는 다른 이주노동자들보다 마음의 짐이 가벼운 편이에요. 대부분 이주노동자가 고향에 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지 못하죠.”

박씨는 부유하진 않지만 그래도 행복한 편이라고 말한다. 다만 다문화 가정 속에서 자녀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숙제라면 숙제다. 박씨는 아들 하비비와 딸 시나(9)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사춘기가 되고 어른이 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 아버지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파키스탄 상황이 좋지 않아 아직은 이르지만 언젠가 아이들을 파키스탄에서 일정기간 동안 살게 하고 싶어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스스로 물어볼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하거든요.”

박씨는 여전히 바쁘다. 때론 고물상 사장으로 때론 인권운동가로 또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서 짊어진 짐이 크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얼굴엔 누구도 갖지 못한 따뜻한 미소가 담겨 있다.

박씨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문득 생각에 잠겼다. 구수한 농담을 던지며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다운 말솜씨를 뽐내던 박씨와의 차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끝에 그 이유를 찾았다. 넉넉한 심성의 인터뷰이는 이미 마음 속 편견을 버린 지 이미 오래였고, 쪼잔한 인터뷰어는 여전히 그 편견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