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를 착취해 행복할 수 있나요?  
그 누구도 해고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정규직이 앞장서 비정규직과 이주 노동자의 고용을 지켜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왜 ‘함께 사는 삶’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걸까.  

[101호] 2009년 08월 17일 (월) 13:56:07 고동우 기자 intereds@sisain.co.kr  



평택 공장을 점거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 작전이 한창이던 지난 8월5일 오후, 전북 군산에 위치한 타타대우상용차 노동자들은 노조 사무실에 삼삼오오 모여 그곳의 ‘현장 중계’ 영상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와 인터뷰 약속을 했던 김근규 부지회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대다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긴급히 평택으로 향한 상태였다.

“우리라고 자유롭겠습니까? 저 자리에 우리가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모니터 화면을 골똘히 응시하던 한 노조원에게 “타타대우는 안전한 거냐?”라고 불쑥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럴 것이다. 이번 쌍용자동차 사태는 정규직도 결코 예외일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철밥통’에 ‘이기주의’의 대명사처럼 묘사되던 대공장 정규직도 저 지경인데, 이제 누가 자신은 해고와 구조조정의 안전지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문수
이융홍 현장대표(맨 왼쪽)를 비롯한 한국보그워너씨에스 소속 한국 노동자와 필리핀 노동자들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함께 살자’는 외침은 더욱 공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쌍용차만 봐도 그렇다. 기업주와 노동자, 정리해고자와 비정리해고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 공장과 저 공장, 그리고 이 노조와 저 노조…. 이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 있는 몸부림이 있었던가? 혹여 있었더라도 최종 결과는 모두가 본 그대로였다.

‘시류를 거스르는’ 타타대우의 선택

금속노조 타타대우상용차지회의 사례에 눈길이 쏠린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덤프트럭, 트랙터 등 상용차를 생산하는 그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시장주의 질서에 반하는 ‘시류를 거스르는’ 선택을 했다. 비정규직 320명 전체를 노조에 가입시킨 것(2008년 8월)도 모자라(?), 가동률이 70%까지 떨어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약 10%에 해당하는 42명을 지난 5월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곳곳에서 비정규직들이 소리소문 없이 잘려나가고, 정규직들도 휘청대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전우관 지회 사무장은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를 내세운 회사 측의 공세와 ‘쌍용차처럼 진짜 어려움이 닥치면 어쩔 거냐’고 걱정하는 정규직 조합원들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노조의 방침에 공감했다. 염려하는 사람들에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지레 겁부터 먹고 소극적으로 가지 말자.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한데 힘을 모으면 회사도 어쩔 수가 없다. 물량이 늘어날 때까지 정규직화를 미루자고 했지만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타타대우가 비정규직의 일부를 정규직화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다. “비정규직 비중이 지나치게 늘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판단 아래 노조는 매해 회사 측에 일정 비율의 정규직화를 요구해왔고, 상당 부분 관철했다. 그러니까 타타대우 노조는 일찍부터 비정규직 문제에 눈을 뜬 셈이다. 전 사무장은 대개의 다른 공장과 달리 이것이 가능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소외를 겪어본 자가 소외된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라는 점을 꼽았다.

    
ⓒ타타대우노조 제공
타타대우 노조는 모든 행사를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구분 없이 치른다. 위는 지난 6월 열린 족구대회.
“지난 2000년 대우그룹 부도 이후 상용차 노동자들은, 인도 자본인 타타모터스가 인수하기 전까지 일감이 없어서 창원 등 전국 곳곳의 GM대우자동차 공장에서 수년 동안 파견 근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말만 정규직이지, 아무래도 해당 공장의 정규직과는 처지가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비정규직이나 이주 노동자들과 어울리는 일이 더 많았다. 그때 느꼈던 것들이 비정규직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먼저 현장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었다. ‘일상의 차별부터 없애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노조의 의식적인 노력도 중요했지만, 조합원들이 ‘몸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모두 헛수고가 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다.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지 3년 만에 올해 정규직이 된 김관식씨(30)는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다른 회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명찰, 작업복에서부터 다르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업무적으로도 차별이 없었고, 회식·행사·체육대회 모두 같이 했다. 임금과 복지가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현장에서는 내가 비정규직임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전문수
경주 용강공단의 발레오만도 노동자들은 모두 정규직이다. 경비(왼쪽)와 식당 노동자(오른쪽) 또한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 정규직화 등 타타대우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노조는 올해 초 물량이 줄었을 때도 ‘비정규직부터 휴무를 진행하자. 정규직은 똑같이 일할 수 있다’는 회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규직·비정규직이 동등하게 휴무를 실시하도록 했다. 한번 원칙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 7월15일 경남 창원공단의 한 작은 공장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의 바탕이 된 것도 모두의 꾸준한 노력이었다. 중장비 쿨링시스템인 팬을 생산하는 한국보그워너씨에스의 한국인 노동자 12명은 전면 파업까지 벌여가며 필리핀에서 온 이주 노동자 3명의 고용을 지켜냈다. 이 역시 평소 생산 현장과 일상에서 서로 차별 없이, 마음을 터놓고 지내온 덕분이었다.

해고될 위기에 놓였다가 노사 합의를 통해 앞으로 3년 동안 고용을 보장받게 된 알비 씨(34)는 인터뷰 내내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필리핀 친구가 많은데 나 같은 행운아는 없는 것 같다. 한국 노동자들이 외국인 노동자의 고용을 지켜주고, 노조 가입(지난 1월)까지 시켜주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우리 공장의 한국 노동자들은 매우 친절하며, 늘 형제처럼 대한다. 일하는 과정에서도 차별하지 않는다.”

이익성 노조 현장위원은 “규모가 작다보니 인간적으로 어울릴 일이 많았고, 노조도 인권 교육뿐만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위해 한 조합원을 영어학원에 보내는 등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라고 설명한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지자 구체적인 불만 사항부터 개인적인 고민까지 나눌 수 있게 됨은 물론이었다. 수년간 노력한 끝에 이제 한국 노동자들은 “회사가 ‘이주 노동자 임금을 줄이면 너희들 임금이 올라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회유해도 ‘친구를 착취해 내 잇속을 챙길 수는 없다’고 생각할 정도가 됐다”라고 한다.

누구나 놀랄 만한 ‘함께 사는’ 사례를 만들어낸 노조의 간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노동운동의 원칙이나 논리 이전에 ‘인간적인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
지난 4월 해고 직전까지 간 울산 현대자동차 2공장 비정규직 60여 명의 고용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연대해 지켜냈을 때, 이상수 2공장 비정규직노조 대표도 ‘승리의 비결’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 먼저 비정규직들이 최선을 다했다. 공장에서 정규직들에게 ‘형님, 우리 못 나갑니더’라고 말하며 연대를 호소했다. 술도 먹으면서 계속 호소했다. 그 후 조금씩 정규직들의 마음이 열렸고, 그들이 대의원이나 현장 조직 관계자들에게 ‘비정규직들 어떻게 되는 거냐?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의원과 현장 조직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문수
한국보그워너씨에스 생산 현장(위)에서는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간의 차별이 없다.
물질적 안정 넘어 ‘삶의 전환’까지

8월10일 오후 1시 경주 용강공단의 자동차부품 업체인 발레오만도 정문 경비실 안. 지난 4월 노조 도움으로 ‘외주화’의 위기에서 벗어난 경비·청소 노동자들이 당시 상황과 관련한 담소를 나눈다. 정문 경비인 이덕기씨(55)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큰일날 뻔했지. 외주화되면 고용도 불안해지고, 급여도 줄어드는 건데. 경영이 좀 어려워지니까 바로 우리부터 쫓아내려 하더라고. 그래서 노조 가입을 신청했지.”

노조는 외주화를 막는 것을 넘어 경비 노동자 14명의 조합원 가입까지 받아들였다. 대다수 기업이 외환위기 이후 경비나 청소, 식당 업무를 외주화·비정규직화한 것과 달리 발레오만도는 노조의 강력한 의지로 직영·정규직 구조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조합원이기도 했다.

청소 업무를 하는 이동식씨(52)는 좀 더 구체적인 걱정을 했다. “난 애를 늦게 낳아서 큰애가 고1이고, 둘째가 중2거든. 지금부터 정년(60세)까지 일해도 교육비가 빠듯해. 근데 외주화되면 1~2년도 보장 못 받는 거 아니야? 잘리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데, 나이 50이 넘어 뭘 새로 할 수 있겠어?”

함께 있던 노조 정연재 부지회장은 노동자들이 심리적·물질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주요 배경 중 하나로 사외감사 추천제도 등 노조가 적극적으로 회사 경영에 개입하는 점을 꼽았다. “회사 측은 만날 ‘어렵다’ ‘위기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추천한 사외감사를 통해 정확한 경영 상태를 파악한 후에 대응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고용 보장이나 정규직화 등은 단순히 현재 삶의 방어를 넘어,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어떤 ‘삶의 전환’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또 다른 경비원인 손호문씨(55)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합원이 아닐 때는 아무래도 회사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었다. 조합 가입도 쉽지 않았다. 회유와 압력이 심했으면 아마 잘 안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가입을 하니 회사의 태도도 달라지고, 할 말은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사업장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4년 정규직으로 전환된 타타대우의 정광진씨(30)는 “별 기대 없이 ‘돈이나 벌자’ 하는 생각으로 입사했는데, 2년여 만에 운 좋게 정규직이 된 후 이곳에 정을 붙이며 눌러앉게 되었고 이제는 노조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라고 한다. 인터뷰 도중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여전히 비정규직인 동료들에 대한 걱정까지 털어놓기도 했다.

“아직 비정규직 전체를 정규직화하고 있지 못하다. 일부만 정규직화하는 일종의 ‘발탁 채용’인 셈인데, 이게 부작용이 적지 않다. 정규직을 만들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상사나 관리직한테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별 문제 제기를 못하는 것이다. 분명히 같은 조합원이지만 찍힐까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다. 모두 한꺼번에 정규직이 되면 좋지만 불가능한 일이고 그저 답답할 뿐이다.”

여전히 비정규직인 동료들

그게 해결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남아 있는 차별 구조를 견디지 못하는 것, 작은 부작용이더라도 불평등을 온전시키는 것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 그것은, ‘정규직’ ‘조합원’보다 ‘모두 함께’를 중심에 둔 노동운동가들이 보여준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한국보그워너씨에스 노조는 현재 있는 이주 노동자뿐만 아니라 앞으로 들어올 이주 노동자도 노조 가입과 고용이 보장될 수 있도록 투쟁을 진행 중이다. 지난 4월 임금 동결과 파업까지 해가며 비정규직 14명의 정규직화를 이루어낸 경주 인지컨트롤스의 정동원 지회장은 비정규직이 단 한 명도 없는 공장을 꿈꾼다. 이상수 현대자동차 2공장 비정규직노조 대표는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 없어 대량 해고의 위협에 놓인 다른 공장 비정규직들의 처지에 대한 걱정을 토로한다.

끝으로 한 가지. 위에서 언급된 노조들이 거둔 주목할 만한 성과가 가능했던 요인 중에는, 이들한테만 있는 ‘특수 조건’ 역시 적지 않은 구실을 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발레오만도나 타타대우의 경우, 오래전부터 채용 과정에서 직원의 추천을 받아 친인척을 비롯한 지인들의 입사를 상당수 허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입사 초기부터 서로 ‘형’ ‘동생’ 할 만큼 인간 관계가 끈끈해질 수밖에 없다. 발레오만도 정연재 부지회장은 “노조의 운동적 원칙도 있지만 지역적 조건이나 인간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이 비정규직이 되거나 잘릴 판인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라고 말한다.

연령대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타타대우나 한국보그워너씨에스, 인지컨트롤스를 보면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이 30대를 넘지 않을 정도로 꽤 젊은 편이었다. 타타대우 노조 전우관 사무장의 말마따나 “40대, 50대가 중심이었다면 고용 불안 때문에 연대감이 약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젊었다. 인지컨트롤스 정동원 지회장도 “노조의 주축인 남자들의 평균연령이 35세 정도인데, 아무래도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좀 덜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또 다른 ‘연대’를 위해

이는 이들 노조의 사례가 조금(또는 매우) ‘예외적’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례가 비정규직과 이주 노동자 문제 해결의 ‘근본 대안’으로 여겨지거나 똑같이 못한다고 특정 노조를 비난하는 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이들 노조에도 언젠가 극복하기 힘든 크나큰 시련이 닥칠 수 있다. 만일 경영상 위기로 부도가 나거나 해외 자본이 갑자기 철수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노조는 경우에 따라 지금과 다른 방향의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배신자’라는 낙인? ‘너희들도 결국 똑같잖아’라는 비아냥? ‘자본주의 사회에서 날고 기어봤자지’라는 패배감의 공유?
아닐 것이다. 비판 이전에 먼저 표현해야 할 것은 ‘미안함’이어야 한다. 당신들이 적극적인 희생과 양보, 아름다운 연대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그 귀중한 성과를 함께 지켜내지 못한, 그런 근본 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 말이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또 다른 ‘연대’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