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이민 개혁[뉴욕 중앙일보]
차주범/청년학교 교육부장

기사입력: 01.09.09 19:58




이민 개혁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대 사안이다. 미국 정치권과 시민사회 모두 이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지난 2001년경부터 시작된 이민 개혁 논의가 거의 10년이 되도록 결론을 짓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9·11 사태로 촉발된 국가안보 강박증이 미국사회를 지배한 것이 첫번째 원인이다. 부시 행정부의 집권 기간 동안 국가안보 강화에 초점을 맞춘 법안과 정책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이민자는 잠재적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고 이민 개혁보다는 이민 단속이 정책 기조가 돼버렸다.

한편 이민 개혁을 위해선 이민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법개정을 추진하는 주체인 의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화당은 당연히 대다수 의원이 이민개혁에 반대했고 민주당은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상태이다보니 그동안 이민법 개정과 관련된 여러가지 법안이 입안되고 소위원회에서 논의도 했지만 정작 본회의에는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2008년 선거를 기점으로 일단 정치환경은 변했다. 취임 100일안에 이민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민주당의 상·하원 장악이 한층 공고해졌다. 더욱 고무적인 현상은 반이민 성향을 가진 의원들이 다수 낙선하고 그 자리를 친이민 후보들이 채웠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선거에서 낙선한 공화당 소속 하원 의원은 전부 13명이다. 이중 9명이 이민개혁 코커스에 소속돼 활동하던 의원들이다. 이민개혁 코커스는 서류미비자 추방, 이민 단속 강화를 기초로 한 이민법 개정을 추진해 온 하원내 대표적인 반이민 의원 단체다.

2004년 대선의 존 케리 후보와 비교해서 13%나 증가한 총 67%의 지지를 라티노 커뮤니티로부터 받았으며 이민자 집단의 압도적인 후원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 역시 이민개혁을 추진해야하는 부담을 느낄 것이다.

비록 워싱턴 정가는 이민개혁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재편됐지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지난 역사에서 이민법 개정은 오히려 공화당 행정부 시절에 추진됐다. 더구나 최근 몇 년간 민주당이 다수당이었고 부시 대통령도 강력하게 이민개혁을 추진했지만 결국 좌절된 전례도 있다.

이민개혁이 추진되기 위해선 몇 가지 장벽을 넘어야 한다. 가장 강력한 걸림돌은 역시 미국의 경제상황이다. 극심한 불황에 빠진 미국경제가 빠른 시일 안에 호전되지 않는다면 이민개혁을 추진하는 동력이 상실된다. 미국내 노동자도 대규모로 감원되는 현실에서 외국 노동력의 유입을 확충하는 이민법 개정을 주장하기 힘들어진다. 오바마 행정부 역시 취임 초기는 경제살리기에 집중하고 다른 정책 사안은 뒤로 미뤄놓을 공산이 크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오바마 차기 행정부의 지향도 우려를 갖게 한다. 오바마 정권의 정책기조를 사실상 결정할 정권 인수팀은 이민개혁을 우선 처리 사안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최근 민주당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는 새 의회가 추진할 10대 주요 법안 중 하나로 이민개혁을 지목했다.

하지만 이민 개혁이 금명간 실제로 의회에서 적극 논의될지는 미지수다. 매년 의회가 개막할 때마다 민주당 지도부의 입에서 이민 개혁이 언급되었지만 추진과정은 지지부진했다.

이민 개혁의 내용 역시 앞으로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서류미비자 사면, 이민업무 적체 해소, 취업비자 확대와 합리적인 국경수비 방안을 모두 포함하는 이른바 포괄적인 이민 개혁이 이민법 개정의 정답이다. 그러나 미국경제와 사회분위기가 악화일로를 걷는다면 포괄적인 이민 개혁 대신 이민법 부분 개정 또는 단계별 이민 개혁의 방향으로 추진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민 노동자의 영주권 취득 기회를 원천 봉쇄하고, 가족 초청을 없애며 향후 미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에겐 몇 년만 유효한 합법 취업 비자를 발급(임시 초청 노동자 프로그램)하는 방향으로 이민법 개정이 확정된다면 이는 이민 개혁이 아니라 이민 개악이 된다. 이미 지난 2006년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을 필두로 한 민주당 지도부는 부시와의 밀실 야합을 통해 이런 내용으로 이민법 개정을 논의했던 전력이 있다.

결국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이민개혁이 이룩되기에는 많은 변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오바마의 당선과 민주당의 의회 장악에 지나치게 흥분하지 말고, 향후 이민개혁의 추진방향과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대응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이민자 커뮤니티에 요구된다.

이는 객관적 상황은 비교적 양호하더라도 주관적 의지가 강력하지 않으면 어떠한 정책도 이민자 커뮤니티가 원하는 방향으로 확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차가운 이성으로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