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회진보연대  


함께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함께 주저앉을 것인가?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12월 18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을 즈음하여 조지 부스타만테 유엔 이주민인권 특별보고관이 지난 4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였다. 특별보고관은 방문기관 동안 관련 정부기관을 만났고 사회운동단체와 이주노동조합과 면담을 가지고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심각한 인권탄압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특별보고관이 출국 직전에 가진 기자회견의 내용은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한 당시 아노아르 이주노동조합위원장은 ILO 아-태 총회에 한국의 이주노동자의 대표로 참석했다는 이유로 법무부로부터 강제출국 시키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었다. 출입국관리소는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며 안산, 의정부 등 주요 공단지역에서 매일 수십 명의 이주노동자를 구금하고 있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다며 떠들어대는 그 나라에서 유엔의 이주민인권 특별보고관이 조사를 나와 있는 바로 그 때 이런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러한 전반적인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의 상황과 한국 정부의 정책의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언급을 피했다. 불법체류자의 인권상황이 매우 심각하며 고용허가제가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은 했지만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12월 18일이 세계이주노동자의 날로 지정된 것은 지난 2000년의 일이다. 유엔은 1990년 이주노동자권리협약(정식명칭은 이주노동자와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 International Convention on the Protection of the Rights of All Migrant Workers and Members of their Families)이 체택된 날을 기념하여 12월 18일을 세계이주노동자의 날로 정했다. 이 협약은 미등록 체류자를 포함한 이주노동자들의 기본적 인권 - 신체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사회보장 및 긴급의료에 대한 권리,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 -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UN이나 ILO의 기존 이주노동자 관련 협약보다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알제리를 비롯한 28개국이 협약을 비준하였지만 이들 나라들은 모두 이주노동자를 송출하는 나라들로 제한되어 있다. 정작 한국을 비롯하여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 광범위하게 침해 받고 있는 노동력 도입국들은 하나같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사실 이주노동자의 날이 협약이 체결 된지 10년 후 뒤늦게 제정된 것도 각 국가에게 협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의 요구와 압박에 따른 것이다.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은 적어도 형식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국제적으로 선언한 날이기는 하지만 또한 이러한 선언이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안타까운 날이기도 한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무권리의 상태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근대 민족국가의 노동력 통제 정책

오늘날 많은 국가들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점점 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이주노동자들이 문제가 되는가? 우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됨에 따라 노동력 이주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는 세계화와 동반되는 “경계 없는 하나의 지구”라는 환상과 정반대의 현실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한편으로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렇게 발생한 각 국가 간 경제적 차이는 개별 노동자들이 경계를 넘어 이주를 하는 위험을 무릅쓰도록 한다. 또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주변부로의 자본의 침투와 상품화, 시장화의 확대는 지역경제를 파괴하고 상대적으로 과잉된 인구를 형성한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경험에서 탁월하게 분석했듯이 “한쪽 끝에서는 노동조건들이 자본으로 집중되며 다른 한쪽 끝에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노동력 수용국들은 저임금에 매우 유연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주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자국 노동시장 내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지 않을 정도로 이주노동자들의 도입 규모를 조절하며 또한 장기적으로 체류하거나 정주하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을 강제로 추방하거나 출국시킨다. 그리고 사업장 이동의 권리나 단결권과 같은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하여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들 수용국들의 이주노동자의 관리 시스템은 근본적인 난점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 결국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또한 강화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정부의 통제를 피해 법의 제한을 넘어 사업장을 이동하거나 체류기간을 넘어 장기간 체류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미등록 체류자의 확대로 이어지고 정부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강제력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계속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모든 국가의 이주노동자 통제 정책은 모두 실패했을 뿐더러 미등록 체류자의 양산과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통제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 착취는 점점 더 심화된다. 그들은 분명 어떠한 사회에 소속되어 있는 구성원이지만 그 사회의 정치적 구성원, 주권자, 시민은 아닌 존재로 간주된다. 근대 혁명 속에서 탄생하였고 유엔 세계인권선언이 다시 확인한 모든 인간은 시민이라는 약속은 이주노동자에게는 부정된다.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의 약속

이 모든 상황은 근대 이후 출현하였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된 민족국가와 민족국가들의 국가간 체계가 보장했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민족국가는 그 구성원들을 민족적 정체성으로 통합하고 그 한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한다.(물론 이는 시민의 자격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 여성들의 집단적 투쟁의 결과다) 민족국가는 이를 통해 계급모순과 같은 근대사회의 내적인 적대를 관리하면서 그리고 일부 국가들에서는 이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을 제한적으로나마 완화하면서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었다. 국가 간의 경계, 국적과 민족, 인종을 가르는 경계들은 “일부 민족국가들이 자신의 고유한 내적 갈등들을 관리하면서 경험했던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민주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조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모든 조건들은 해체되고 있다. 경계들은 이제 오히려 “반-민주주의의 반-민주주의적 조건”으로 변화하였다. 한편으로 민족국가는 심화되는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완화하기 위해 점점 더 허구적인 민족적 동일성을 강화시켜야 하지만 초민족적인 자본과 노동력의 이동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민족국가는 계급적 차별화에 봉사하는 속성을 스스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대다수 국가들의 노동력 이주 정책들은 점점 더 자본의 운동에 유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인력과 이주노동자로 불리어지는 저임금 노동력들로 이중화된다. 그리고 민족적 동일성 내로 포섭하고 관리할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점점 더 강제적인 수단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대한 유엔의 무능력과 한계는 이러한 근대 민족국가의 위기의 일부이다. 유엔은 정확히 식민제국들의 세계분할이 야기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이에 대한 능동적인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던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을 방어하기 위한 대응 속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부분적으로 각 민족들에게 제한적이나마 주권을 허용하고 민족국가의 형태를 전 세계로 확산시켰지만 실질적으로는 진영의 분할과 그 내에서 위계화된 민족국가들의 질서가 관철되는 공간 이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냉전의 종결 이후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편입되어 있는가에 따라 새로운 분할선과 새로운 위계적 질서들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이 이주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를 아무리 ‘선언’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민족적 소속이 정당한 권리의 자격이 되는 정치체제에 기반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주노동의 위험과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국가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위계적 질서에 기반하고 있는 한 허구적인 ‘선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배제와 불평등의 심화인가 아니면 새로운 민주주의의 출현인가?

점차 심화하는 배제와 불평등,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관리와 통제의 강화에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서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는 없다. 또한 이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바로 우리 사회 자체의 민주주의의 조건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민족국가와 민족국가 간의 체계가 제한적으로 보증했던 민주주의의 전망이 위기에 처한 오늘 우리는 보다 급진적인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로 회귀할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다.
이를 위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근본적으로 저항하고 민족국가와 이들의 국제적 체계가 독점하고 있는 국가, 국적, 인종을 가로지르는 경계들, 법적이고 정치적 경계들을 해체해야 한다. 이주노동자 운동의 근본적 목표는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민족적인 자격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개방하는 것, 체류, 출국 등 국경을 둘러싼 국가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경찰기구들을 해체하고 이에 대한 민중에 의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국가가 내적으로 포섭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실패한 계급간 불평등과 적대를 근본적으로 전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모든 사회운동의 목표이다.
12월 18일 세계이주노동자의 날을 맞아 한국의 사회운동은 단지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결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특히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계속 되는 한 이주노동의 흐름이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내는 운동의 형성 없이 그저 방어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시장으로 유입하는 것을 차단하거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에 동참하여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방어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장기적으로 노동자들의 단결을 약화시킬 뿐이며 노동조건의 동반하락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이미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나아가지 않고서는 경제적 이해의 방어도 정치적 목표의 달성도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미 우리는 갈림길에 왔다. 함께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함께 주저앉을 것인가.  

2006년12월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