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내쫓겨 노숙자로 떠도는 이주 노동자들"
[경남CBS 특별기획-④] 2008 불황의 겨울, 벼랑 끝에 선 이웃들
[ 2008-12-15 06:00:00 ]

경남CBS 최호영 기자


경남CBS는 사상최대의 경제불황을 맞아 생존의 위기에 내 몰리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아픈 현실을 취재해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주]


“아침에 출근했더니 갑자기 회사에서 나가래요. 새 일자리도 구할 수 없고. 돈도 다 떨어져 너무 힘들어 어제는 부모님이 정말 보고 싶어 한참을 울었어요. 마음이 정말 답답해요...”

◈ 가족 부양위해 불법 체류 감수 한국행

따뜻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날아 온 바샬(28·가명·방글라데시)씨는 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새까만 피부에는 어느새 허연 버짐이 올라왔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 돼 있다.

직장을 잃은 슬픔과 가족들 걱정에 한 숨도 자지 못했다는 바샬. 그의 고향에는 칠순을 넘긴 부모님과 형, 그리도 여동생 2명이 있다. 바샬의 집은 말 그대로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가난에 허덕였다. 우리나라 60년대 농촌을 떠올리면 방글라데시의 사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방글라데시 가족에게 돈을 부쳐주면서 형편이 나아지는 것을 본 바샬은 불법체류라는 두려움을 안고 한국행을 택했다. 2006년 7월, 찢어질 듯 가난한 방글라데시의 가족들을 위해 바샬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몇 년만 고생하면 된다”라는 굳은 결심과 함께.

◈ 이어지는 '고된 육체 노동'…결국 '해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샬은 공단이 많은 창원으로 향했다. 한국에 먼저 와 있던 고향 친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 도착한지 한 달여 만에 우산 부품을 만드는 사출 공장에 입사했다. 물론 비정규직에 단순노동이었다.

뭐든 시키면 시키는대로 앞장서서 일을 했다. 손바닥에 돋은 굳은 살이 몇 번이고 떨어져 나가도록 열심히 일했다. 월급은 100만 원. 한국의 비싼 물가에 비하면 많지 않은 돈이지만 아끼고 아껴 80만원은 고향집으로 보냈다.

비싼 방값을 아끼기 위해 사글세방을 하나 구해 친구 3명과 부데끼며 같이 생활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언젠가는 가족들과 함께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져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티었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찾아온 지난해 겨울, 바샬은 청천벽력 같은 해고통보를 받게 된다. 일감이 줄어든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비정규직에다가 불법체류자인 바샬을 가장 먼저 내보냈다. 한국인 직원들에게 “도와 달라”고 애원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장 일감이 없으니깐 사장님이 그냥 아무말도 없이 잘랐어요. 1년 넘게 일했는데 출근해 보니 아침에 그냥 나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회사에서 내쫓긴 바샬은 8개월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 소개로, 일이 있을 때마다 잠깐씩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고향집에 돈을 부치기는 커녕 끼니 해결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다 지난 8월 창원의 한 자동차부품 회사에 일자리가 생겼다. 단순 노동일이지만 한 달 월급이 120만 원이나 됐다. 다시 가족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이번에도 월급 120만원 중 100만원은 집으로 보냈다.

먹는 걸 줄이고 아무리 아껴써도 20만원은 금새 금새 동이 났지만, 그래도 가족이 100만 원을 받고 행복할 것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공휴일도 없이 매일 일했어요. 한 주를 주간으로 일하면, 다음 주는 야간으로 힘들게 일했어요. 그래도 가족에게 100만 원 씩 보내주니깐 맘이 든든해요. 100만 원은 정말 우리 고향에서는 큰 돈이거든요.”

그러나 최근의 경기불황은 또 다시 바샬의 직장을 빼앗아 갔다. 국내 자동차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하청업체인 부품공장들도 조업을 줄이거나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지난 달 초, 바샬은 창원 자동차 부품단지에서 일하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쫓겨났다.

그때부터 바샬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도저히 구해지지가 않는다. 고향에 보내기 위해 남겨뒀던 100만 원으로 버티고 있지만, 이마저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아는 형한테 전화해서 일자리가 없냐고 펑펑 울면서 전화했어요. 일자리 좀 구해달라고 전화했어요. 가족들한테는 걱정할까봐 전화도 못해요.”




◈ 한국 여성과 결혼, 국적 얻고 정규직인데도 회사에선 "나가라"

지난 99년 방글라데시에서 3년짜리 연수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건너온 라자(40·가명·방글라데시)씨는 지금 어엿한 한국인이다. 동갑내기 직장동료에게 1년 넘게 끈질기게 구애해 결혼에 성공하면서, 국적도 함께 따라왔다.

“처갓집에서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인사성도 좋고 해서 나중엔 후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한국 국적까지 취득하게 되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국적까지 취득한 라자는 2006년 봄, 창원에서 알아주는 중견 자동차 부품공장에 정규직으로 당당하게 입사했다. 그동안 작은 공장을 전전하며 열심히 기술을 갈고 닦은 탓에 라자는 150톤짜리 사출기계를 직접 가동시킬 수 있는 전문 엔지니어가 돼 있었다.

월급을 아끼고 아껴 2천만 원짜리 전셋집도 마련했고, 아들도 낳았다. 한국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현실은 믿기지 않는 기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라자가 다니던 회사도 올해 불어 닥친 자동차 회사의 불황을 비켜갈 순 없었다. 지난 12월 5일 적자를 거듭한 회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대규모 감원 폭풍으로 이어졌다. 700명 종업원 가운데 비정규직 500명을 자르고, 정규직은 기한도 없는 휴가를 강제로 시행했다.

“아침에 회사 출근을 해보니 식당에 사람들 모아놓고 휴가원을 쓰라고 하는 거예요. 동료들 은 잘린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더라구요. 마냥 기다릴수도 없고 일은 해야 하는데......”

“집사람은 그냥 제가 한 두어 달 휴가 받은 줄 알아요. 그런데 이렇게 사정이 안 좋은데 복직이 될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아무리 국적을 얻었고 정규직이지만 다른 한국인들보다 (복직이) 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고, 아기도 커 가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 결국 빈털터리로 고국행 비행기에 몸실어

뚜이치브(40·가명·우즈베키스탄)는 지난 2005년 6월 우즈베키스탄에서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창원의 한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뚜이치브는 지난 6월에 만기가 됐다.

뚜이치브가 연수기간이 다 돼 고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회사는 뚜이치브를 붙잡았다.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도 빠르게 습득하는 뚜이치브가 필요해서 였다. “월급도 올려주겠다”며 재입국을 적극 권유했다.

회사 말을 믿은 뚜이치브는 고국에 돌아간 지 사흘만에 다시 연수생 신분으로 재입국했다.

그러나 한국에 다시 돌아온 지 한 달 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 7월, 그토록 같이 일하자며 재입국을 권했던 회사가 뚜이치브에게 “그만 나가라”는 통보를 했다. 회사 자금사정이 악화되면서, 외국인 연수생인 뚜이치브를 가장 먼저 해고한 것이다.

한달 넘게 방황하던 뚜이치브는 유리 공장에 취업을 했지만, 이곳에서도 3개월 만에 인원 감축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 둬야 했다.

고국 우즈베키스탄에 3명의 자녀를 둔 뚜이치브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했다. 경남외국인상담소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안가본데가 없다. 서울, 원주, 부산...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무조건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가보면 요즘 회사가 어려워 인원을 줄인다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까지 다 써 한푼도 없게 된 뚜이치브는 친구들에게 비행기 삯을 빌려 지난 12일 고향으로 돌아갔다.

뚜이치브의 친구들은 “회사에서 월급 올려준다며 한국에서 계속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뚜이치브가 정말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날때는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 사용자들의 횡포 갈수록 심해져…여전히 '이방인' 시선


지난 1월 연수생 신분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온 트라크로(39·가명·우즈베키스탄)씨는 지금 그야말로 빈털터리다. 지난 11일 밤부터는 돈이 없어 굶고 있다. 잠도 여객버스 터미널에서 노숙을 한다.

기와 공장에서 일했던 트라크로는 쉬는 날도 없이 꼬박 꼬박 일해 번 돈으로 고향집에 돈을 부치며 성실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건설 경기가 최악을 치닫자 기와 공장 일감도 줄어 알리 는 지난 8월 회사에서 퇴출됐다.

일자리를 찾던 트라크로는 고국에서 온 2명의 동료와 함께 함안에 있는 자동차부품 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나 취업을 하면 회사에서 고용 신고를 해줘야 하는데 사장은 해주지 않았다. 업주가 노동청에 고용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연수생이라도 두달 뒤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고 만다.

“고용 신고 했냐고 사장한테 물어보면 맨날 내일, 다음에, 다음주에... 자꾸 거짓말만 하고 기다리라고만 말하면서 미루는 거예요. 사장은 욕까지 하면서 거짓말만 계속했어요.”

그러다 한 달이 지난 후 사장은 트라크로와 친구 2명을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내 보냈다.

이제 트라크로는 구직등록기간인 내년 1월 안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든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남든지, 선택해야 한다. 다른 동료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짐벡(32·가명·우즈베키스탄)도 연수생 신분으로 왔지만, 지난 달 회사에서 쫓겨 나온 뒤 나오고 나서 지금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달 15일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결국 한국을 떠나야 한다.


아짐벡은 “불법체류신분도 아닌 합법적 신분인데도 일자리가 잘 나지를 않아요.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몰라도 전에 다녔던 한 회사는 퇴직금을 주기 싫어서 딱 11개월만 일 시키고 회사에서 내 보냈어요”라고 말했다.

카리로브(32·가명·우즈베키스탄)는 “보통 우리같은 연수생들은 회사에서 필요할 때 잠깐 일을 시키고 내 보내요. 불법체류자들은 월급을 적게 줘도 어쩔수 없이 일을 하니깐 그사람들을 데려와 일을 시켜요”라고 거들었다.

자주 밥을 굶고, 밖에서 잠을 자던 이들은,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는 동료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다.

싸리예브(32·가명·우즈베키스탄)가 이들을 찾아와 돈을 빌려줬다. 현금지급기에서 30만 원을 빼내 아짐벡과 트라크로, 그리고 카리로브에게 10만 원씩 빌려줬다.

싸리예브는 “밥도 못 먹고 다니는 동료를 보면 마음이 아파서 돈을 빌려주기로 했어요. 한국에 돈 벌러 온거지 이런 구박 받으러 한국에 온 거 아니잖아요.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거짓말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만 대해줘도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 한국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보였다.



isaac0421@cbs.co.kr


불법체류 이주민 노리는 지능범죄
경남도민일보  
보도날짜 2008-12-08  
기자명    

지난달 12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마석 성생가구공단에서는 '난리'가 났다. 경찰과 법무부 출입국 단속반 300여 명이 들이닥쳤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110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단속반에게 붙잡혔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는 이날 단속을 이주 노동자 역사 20년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했다.

법무부는 올해 초 22만 명 수준인 미등록 이주 노동자를 20만 명까지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최근까지 전국적으로 2만 명 이상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가 추방됐다. 단속이 심해지자 미등록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는 업체가 줄었다.

얼마 전 창원에서 일어난 미등록 이주 노동자 대상 범죄는 현재 미등록 이주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10월 창원 서부경찰서는 20대 후반의 중국인 남성 3명을 붙잡았다. 이들은 미등록 이주 노동자인 중국인 여성을 협박해 돈을 빼앗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에 따르면 이 중국인 남성들은 원래 미등록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통장을 만들거나 송금을 대신 해주는 일을 했었다고 한다. 수입도 좋았다. 이렇게 하는 대가로 매달 10만 원 정도를 받았다. 가만히 있어도 매달 200만~300만 원의 수익이 생기는 거다.

그러다 올해 들어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심해지자 이들의 수입도 끊겼다. 일자리를 잃은 이주 노동자 등록자가 많아서다. 갑자기 돈이 궁해지자 이들은 통장을 만들어 준 이들을 대상으로 돈을 빼앗기로 했다. 자신들이 관리하던 이들이라 집 주소며 계좌 비밀번호까지 다 알고 있던 터였다.

정부가 지금처럼 이주 노동자 정책을 벌인다면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인정하든 안 하든, 또 불법이든 합법이든 이주 노동자는 이제 우리 사회에 정착해버렸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단기 순환 위주의 이주 노동정책으로 이들 이주 노동자가 우리 사회에 안주하는 것을 막고 있다. 현 고용허가제에서는 이주 노동자에게 3년까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재고용이 가능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외환 위기 이후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올려야 하는 주주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에 적용되면서 기업들은 인건비와 생산단가를 낮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았고 이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장기 체류를 가능하게 했다. 처음엔 죽어라 일만 하던 이주 노동자들은 차차 우리 사회에 적응하면서 더욱 나은 환경을 좇아 업체를 옮겨다니고, 그러는 사이 한국인과 결혼해 정착하는 이도 늘었다. 이제는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는 이주 노동자도 많다.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 이철승 소장은 이제 우리 사회도 이주인력정책을 장기 정주화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이주 노동자가 많은 선진국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우선 이주 노동자를 단기 노동정책으로 묶어 두면 불법 노동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우리 사회가 이주 노동자들에게 여긴 너희 나라가 아니라는 의식을 강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이주 노동자가 사회 구성원으로 책임감을 품지 못하고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거다.

이철승 소장은 "근본적으로 저임금 일자리와 농촌 미혼 급증 등 우리 사회가 필요해서 이주민을 들여놓고 이들을 우리 사회에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는 게 문제"라며 "이들 이주민이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 일원으로 주인의식을 품도록 정책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