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떼이고 얻어맞는 이주노동자, 30년전 우리의 모습”
[한겨레가 만난 사람]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한윤수 목사
한겨레 이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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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한윤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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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사내가 빚에 쫓겨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진짜 목사가 됐다. 예순의 나이에 얻은 목사 노릇 어떻게 해볼까 궁리하던 중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이 마음을 두드렸다. 30여년 전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던 이름 모를 어린 노동자들을 그들 속에서 ‘발견’했다. 아, 저거다. 내가 할 일이! 2007년 동남아 출신의 ‘오리지널’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집한 경기도 화성시 발안(향남읍)에 이 지역 최초의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열었다. 임금, 인권, 취업에 관한 상담소다. 떼인 돈 받아주고, 매 맞은 사람 치료받게 해주고, 열악한 직장 옮겨주기 등이 일이다. 목사는 상담을 받으면 본인이나 센터 직원이 동행해 사업장을 방문한다. 한국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국인 노동자에겐 천군만마다. 사장님에게 사정하고 읍소한다. 못 들은 척하면 법을 지키라고 따진다. 그래도 안 되면 소송을 건다. 소송은 때로 해를 넘기기도 한다.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면 법과 시간에 쫓긴 쪽이 두 손 든다. “외국놈 편만 드는 악질 목사”란 욕이 귓전에 부딪치지만, 그의 곁에는 하나님 말고도, 직무에 성실한 공무원, 무료 변론을 마다 않는 변호사, 통장도 없는 외국인을 위해 위법을 감수한 은행원, 사장님 쪽 해결사에 맞서 기꺼이 어깨 노릇을 맡아주는 해병전우회장, 좋은 일 한다며 사무실 임대료를 40% 내려준 건물주인 등 정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있다. 3년 전 “아니, 외국 노동자한테도 퇴직금 주나요?”라고 되묻던 이곳에서, 임금 떼먹고 퇴직금 안 주는 사업장은 거의 사라졌다. 어느날 “성격이 좀 모진” 목사 한 명이 나타난 뒤였다.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한윤수(62) 목사가 그 ‘악질 목사’다.

예순에 목사돼 동남아 노동자 많은 화성 정착
“출판사 사장 시절 만난 10대 노동자들 떠올라”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발안을 찾았다. 목사님, 왜죠? 환갑의 나이에 굳이 말도 안 통하고 보상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를 돕겠다고 같은 한국 사람들과 얼굴 붉히고 계신가요? 그의 답변은 훌쩍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76년 29살 때 출판사(청년사)를 차렸습니다. 주로 논픽션을 냈습니다. 멕시코 혁명가 <판초 비야>, 히틀러에 저항한 신학자 <본회퍼> 등. 그런데 진보적인 인류학자들이 녹음기를 들고 농민, 노동자, 빈민 속으로 들어가 이름없는 민중들의 생활을 채록하더군요. 내가 내야 할 책이 이거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펴낸 책이 인류학자 오스카 루이스의 저 유명한 <산체스네 아이들>이었다. 멕시코시티의 빈민 가족이 겪는 궁핍과 고난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실상을 극명하게 묘사해 전세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이다. 일본 제사공장 여공들의 퇴직 후 삶을 추적한 <여공 20년 후>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목사 자신도 녹음기를 들고 우이천변 판자촌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무명씨들의 생활기록에 대한 관심은 일생을 지배하는 키워드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엔 왜 <산체스네 아이들> 같은 게 나오지 못할까 아쉬워하고 있는데, 당시 안동 길산국민학교 교장이던 이오덕(1925~2003) 선생님이 농촌 아이들 글을 모아 왔어요. 15년간 안동, 상주, 김천, 경주 등지의 초등학교를 전전하며 모은 60~70년대 농촌 아이들의 생생한 생활기록이었습니다.” 이오덕이 엮고 요절한 판화가 오윤(1946~1986)이 표지를 맡은 시집 <일하는 아이들>과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가 이렇게 나왔다.

“막상 책을 내고 보니 이 아이들이 정말 농부가 될까 의문이 들더군요. 아이들의 시 가운데 이런 게 있었어요. ‘나는 서울을 갔으면 좋겠다/ 서울 가면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번다/ 그런 데 가면 사람도 약아질 게다….’ 산업화가 시작되던 그 무렵 아이들조차 농촌을 떠날 상상을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이 아이들이 서울 오면 서울 생활을 책으로 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불가능했죠. 그러던 차에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야학을 하던 대학생들이 10대 노동자들의 글을 모아 온 거죠. 20시간씩 타이밍 먹어가며 잔업하고, 화장실 자주 갈까봐 회사에서 국 없는 밥을 주고, 전기값 아낀다고 숙소 불을 꺼 가로등 밑에서 공부를 하던 그런 이야기들 말이죠.”





그렇게 해서 엮은 책이 1980년에 나온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이었다.(이 책을 복사해 돌려가며 읽고 당시 한국의 노동현실에 눈뜬 대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노동의 ‘노’ 자도 꺼내기 힘든 계엄령하였다. “감방 가고 출판사는 망할 게 뻔하니 고민이 컸죠. 하지만 이 책 못 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그는 인생을 바꾸는 결정을 했다. 계엄당국 몰래 무려 2만부나 찍어서 200여곳의 교회 청년회를 통해 뿌렸다. 책은 판금됐고, 청년 사장 한윤수는 도망자가 됐다. 책의 배포를 맡았던 대학생들도 이른바 잠수함을 탔는데, 수금한 돈은 그대로 도피자금이 됐다. 그해 가을 무렵 세상이 잠잠해지자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쓸어모아 글을 쓴 노동자들에게 인세를 지급했다. 그리고 함께 북한산 등반을 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26년이 흘러서 그때 그 아이들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안산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는데 상담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서 그 옛날 어린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야기 중간중간 눈자위가 붉게 물들기도 하면서 이어진 지난 ‘역사’는, 그가 늦은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화성에 정착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것은 물론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2007년 6월5일 화성시 향남읍(발안) 평리 발안지구대 부근 건물 3층에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가 문을 열었다. 화성 지역은 중국동포를 제외한 순수 외국인 노동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합법 노동자만 2만4000명이 넘는다. 센터 대표로서, 목사로서 그의 주된 사역은 “장시간 노동과 인권침해, 산재보상도 못 받고 항상 잡혀갈까봐 불안에 떠는 노동자들에게 떼인 돈 받아주고, 폭행을 피해 직장을 옮겨주고, 비자 연장해주고, 다치면 치료받게 해주는 일”이 되었다. 지난 16일 찾아간 그의 ‘센터’는 지난 3년 동안의 상담일지로 가득 했다. 상담은 평일에 20건, 일요일에 40건 등 한 주에 60건 정도 이뤄진다. 1년에 3000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이곳 문을 두드린 셈이다. 한 목사는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을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심리를 가장 잘 알 것 같은 그에게 그들이 가장 못 견뎌 하는 일이 뭐냐고 물었다. ‘멸시’였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죠. 한국말 못하고 무지하다고 속임을 당하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몇년 전 안산에 있을 때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의 사무장이란 사람이 ‘저것들 다 지 나라로 보내야 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 동네가 먹고사는 줄 모르는 저 친구야말로 무식하다 싶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라고 가볍게 속이려다 큰코다친 사례도 있다. “어느 지방 공장에서 일하던 베트남 청년이 사장이 퇴직금을 안 준다고 찾아왔습니다. 사업주는 퇴직금을 안 주려고 식대정산서에 사인을 강요했답니다. 그런데 그가 뭐라고 사인하고 온 줄 아세요? 베트남어로 ‘또이 콩 비엣’(Toi Khong Biet)이라고 써주고 왔답니다. 한국말로 하면 ‘나는 모른다’입니다. 그게 이름인 줄 알았던 사장이 오히려 된통 당하게 됐죠. 한국말 못한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똑똑한 친구들 많습니다.”

‘한국 이미지 훼손’ 소수 악덕사업주 엄벌해야
“고용기간 연장 허용하면 근무환경 더 나빠져”

2009년 9월 현재 외국인 노동자가 50만명을 넘었다.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많은 한국인들이 애써 외면하지만, 3D 업종 사장님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다. 한 목사가 방문한 어느 덕트공장 인사담당자는 외국인을 선호하는 이유를 ‘돈 말 결’ 석 자로 요약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은 돈 더 달라고 하고, 말이 많고, 결근이 잦은데, 외국인은 그런 게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해고까지 쉬우니 한 목사는 ‘3D돈말결해’로 정리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더 고용하기 위해 회사를 여러 개로 쪼개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4명에 외국인 노동자 5명을 고용한 회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국인을 10명 고용하나 1명 고용하나 외국인은 5명까지밖에 못 씁니다. 그러니 회사를 한국인 1명이 있는 회사 4개로 쪼개면 외국인을 최고 20명까지 고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최저임금만 줘도 되는 노동자를 다수 확보하니 인건비가 얼마나 절감됩니까? 그런데 귀한 줄 모르고 돈 떼먹고 폭행하고 산재보상 안 해주면 곤란합니다. 임금은 적게 줘도 최소한 억울한 일은 없어야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사장들이 다 나쁜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영세 중소사업장에 가보셨으니 아시겠지요, 요새 얼마나 어려운지.

“물론이죠. 사장님들 90%는 좋은 분들입니다. 정 많고요, 법 잘 지킵니다. 10%가 문제인데 5% 정도는 대화로 풀립니다. 나머지 5%가 이른바 악덕 기업주들이에요. 이들은 엄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동남아 가면 한국 사람한테 엄청 적개심을 보이는 친구들을 가끔 보는데 다 이런 5% 때문이죠.” 그러면서 한 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등산애호가가 히말라야에 갔는데, 셰르파가 손가락이 하나 없더래요. 이유를 물었더니 하는 말이 ‘한국 공장에서 잘렸다. 한국놈만 보면 다 죽이고 싶다.’ 등산가가 당황해서 외면하자 그의 얼굴에 대고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너를 죽였어.’” 아마도 그는 안전시설이 불비한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하다 다치고 산재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쫓기듯 한국을 떠났을지 모른다.

우리가 마치 과거의 우리 자신에게 따귀를 맞는 것 같은 이런 기분은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일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이주 외국인 노동자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이다.

“2004년 이후 실시되고 있는 현행 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생제도에 비해 진일보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전히 고용주의 허가 없이 자유롭게 직장을 선택할 권리가 없기는 하지만, 고용계약 기간을 최대 1년으로 제한하여 체류기간 3년 동안 3번의 직장 이동 기회를 제공하는 현행 제도는 현실적으로 노사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이런 제도마저 오히려 퇴보하는 쪽으로 가게 됐다고 한 목사는 개탄한다. 정부는 4월12일부터 외국인 노동자 고용기간을 근로자와의 합의를 전제로 현행 최대 1년에서 2년, 3년으로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한 목사는 이 점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근로자와 합의라뇨? 사장님이 사인하라면 거부하기 어려운 게 외국인의 현실인데 어떻게 자발적 의사를 확인할 수 있나요? 제도를 이렇게 고치면 많은 고용자들은 근무조건과 환경 개선을 게을리할 것입니다. 직장 이전이 어려워진 외국인들의 직장이탈과 불법체류가 증가할 것입니다. 그 피해는 부메랑이 되어 다시 사업주에게 돌아갈 겁니다. 한국 정부는 졸지에 외국인 노동자 인권 탄압국으로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소수의 사업자 말고는 아무에게도 이익이 안 되는 아주 나쁜 방식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입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데가 있다고 하는데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국격이란 것이 자동차 많이 팔고 올림픽 금메달 많이 딴다고 되는 것입니까? G20 정상회의 한다는데 부끄럽지 않겠어요? 이건 악법입니다. 막아야 합니다.”

이 대목은 이명박 대통령이 꼭 새겨들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내친김에 외국인 노동자 정책 전반에 대한 현장체험자의 제언을 부탁했다. 인터뷰의 마무리이기도 했다.

“현행 고용허가제가 당분간 유지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전제로 외국인 노동자 정책에 관한 한 품격 높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는 반드시 고치도록 합시다. 첫째, 외교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한국에 오는 송출비리를 근절시켜야 합니다. 둘째, 불법체류 외국인 보호소에 노동부 감독관을 상주시켜 이들의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하는 제도를 실시합시다. 비록 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밀린 임금이나 산재보상금 등 법적으로 지급해야 할 돈은 반드시 손에 쥐여서 자기 나라로 돌려보냅시다. 셋째, 현행 외국인 지원 제도를 양보다는 질 위주로 바꿔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행정을 합시다. 큰 기관들이 전시행사나 전화상담으로 실적 쌓는 일에 매달리니 실질적인 문제는 조그만 지역센터로 넘어옵니다. 오죽하면 해당국 대사관에서 찾아와 소송 대리를 부탁하는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작지만, 끝까지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주는 지역센터에 정부의 관심을 당부드립니다.”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는 정부의 보조금(직원 임금)과 후원자들의 성금, 그리고 한 목사 개인 돈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 목사는 센터 운영 3년 만에 집을 팔고 임대아파트에 산다. 지난해 그의 공식 수입은 원고료 15만원이 전부였다. 생활대책을 물었더니 “이제 거의 바닥이니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며 웃는다. 그나마 그에게는 후원자들이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 회보에 실린 후원회 명단을 보니 후원회장인 홍성우 변호사를 비롯해 정치인, 교수, 언론인 등 기자도 알 만한 이름이 여럿 눈에 띄었다. “기왕 매스컴 타는 덕분에”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의 진짜 주인공들이다. “그때 노동자들 중 한 명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겁니다. 지난 30여년 그들은 또 어떻게 살았을까요? 만나면 우리 센터에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방식과 경험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사람들이 있습디다. 저는 그들과 강한 연대감을 느낍니다. 그들도 저에게 같은 연대감을 느낄 겁니다. 혼자서는 잘 안되잖아요?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일이.”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