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간 머물렀던 한국을 떠나며 : 한국에 왔다
[기고] 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이야기(1)
섀켈 아흐메드 샤킬(이주노조)  / 2008년08월27일 10시47분

서울경인 이주노조(MTU) 전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이주노동자 샤킬 씨가 16년 간의 한국생활을 마감하고 8월 26일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1992년에 한국에 들어와 숱하게 고생하다가 1998년에 산업재해를 입어 장기간 치료를 받았고 산재요양 이후 2006년에 근로복지공단에 직업훈련비용을 신청하였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외국인은 대상이 아니라면서 기각했다. 이에 그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가서 올해 3월에 소송이 기각되자 헌법소원까지 내 놓은 상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서 어렵게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전체 이주노동자의 처지에 대해 눈떴고 이주노동자운동에 참여하면서 점차 활동가가 된 샤킬 씨는 2005년 이주노조 설립 직후 초대 아느와르 위원장이 표적단속 되었을 때, 직무대행을 맡아 위원장 석방과 노조 사수 활동에 헌신했고 지금까지 이주노조 조합원이자 활동가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이주운동 진영에서 법무부 면담도 하고 각계 인사 탄원서도 수백 통을 보냈으나 법무부에서는 헌법소원 기간 동안의 체류를 보장하지 않겠다며 출국명령을 내렸고, 샤킬 씨는 고심 끝에 귀국 결정을 했다. 20대 청년이 40대 중년이 되어 돌아가는 마음을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이주노동자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활동가의 최소한의 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긴급히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글은 오늘(27일)부터 3일간 연속으로 실린다.


정리: 정영섭 (서울경인이주노조 사무차장)


1. 한국에 오기 전 : 방글라데시에서의 삶



▲  섀켈 아흐메드 샤킬 서울경인이주노조 전 위원장 직무대행/참세상 자료사진  

1963년 1월 1일에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육부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셨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위로는 형이 한 명, 누나가 두 명이 있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두 명, 남동생이 두 명 8남매였다. 그 당시에는 일반적인 자녀 숫자였다. 지금은 1-3명 정도 낳는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가족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인물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부모님은 의사가 되기를 바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들어가서 정치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집에서 반대했다. 결국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다카에 있는 국립 JAGANNATH UNIVERSITY를 다녔다.


대학에서는 무지하게 활동을 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71년에 독립하고 나서 74년도에 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정치활동도 중단되었다.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고, 정치활동 하다가 탄압당해서 많이 죽었다. 독재 하에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나 좌파 활동가들이 많이 죽었다. 대학 들어오기 전에도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 가족들도 하루 세끼 먹기 힘들었고 대부분의 가정이 마찬가지였다. 학비도 내기 어려운 가정도 많았고 우리 집도 그러했다. 당시 방글라데시의 어려운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아버지 힘들어하시는 것 옆에서 보았다. 차비를 아끼려고 세 시간을 걸어서 정부청사에 다니셨다. 물가가 엄청나게 폭등했다. 형도 대학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형이 벌면서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


대학 시절에 군사독재정권이 있었다. 82년도에 군사독재가 들어서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우리가 숨어서 조금씩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학생운동의 투쟁으로 9년 만에 군사독재 정권이 91년도에 무너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군사정권과 손을 잡았고 선거에도 나갔다. 다른 쪽에서는 투쟁을 계속했다. 정당 별로 학생조직들이 나뉘어 있었는데, 노력을 해서 학생단위들이 공동투쟁 단위를 꾸려서 투쟁했다. 학생들이 투쟁을 하고 노동자, 농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게 되어 결국 91년도에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내가 지지하던 당에서도 활동했다. BNP(BANGLADESH NATIONALIST PARTY) 학생조직의 한 지역조직 사무국장을 했다. 학생운동 끝나고 나서는 청년조직에서 수석 부위원장 역할을 했다.


독재가 무너진 후 91년에 BNP가 집권을 했다. 국회의원도 많이 배출하고 국무총리도 나왔다. 활동 속에서 갈등들도 많았다. 반대 그룹들이 많았다. 정치깡패들, 폭력조직도 많았다.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지역에서 피신하게 되었다. 그 이유도 있고, 고향에 있을 때 집에서 건설자재 가게를 했는데 여러 문제로 가게가 잘 안되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국외로 좀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고, 유럽이나 일본으로 가려고 나왔다. 처음에 홍콩에서 한 달 넘게 있었는데 유럽이나 일본으로는 가기가 쉽지 않았다. 92년 3월 2일에 비즈니스 비자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2. 한국에 온 후 : 초기 생활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에 인천 부평에서 공중전화기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아침 8시 반부터 밤 9시까지 일하면서 30여 만원 정도 받았다. 탈의실에서 방글라데시 4명이 살았다. 그 당시 자진신고를 하면 6개월씩 체류를 연장해 주었다. 94년 5월 26일까지 그 공장에서 일했다. 이상공업사라는 이름이었다.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음식도 안 맞는데 계속 한국음식만 줘서 몇 개월 동안 고생했다. 물만 말아 먹었다. 나중에 겨우 의사소통을 조금씩 해서 나아지기는 했다. 공중전화기도 만들고 부스도 만들고 전화 기록하는 기계도 만들었는데 대부분 프레스 작업, 물건 운반 작업을 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야”, “이 자식아, **야” 등으로 불렀다. 내가 그때 29살, 30살이었는데 실습나온 10대 학생들조차 우리에게 욕하고 반말했다. 심지어 언제인가는 때리기까지 했다. 자기들 시키는 대로 잘 하라는 것이었다.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는 공장 식당에서 밥을 잘 못 먹으니까 밥을 밖에서 사먹어야 되는데 어디서 뭘 사먹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주변에 방글라 사람이 있어서 음식 재료를 사다가 요리를 해 먹었다. 월요일날 한국 직원들이 음식냄새 난다며 밥을 안먹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그 후에는 토요일 일요일에는 음식 못해먹게 주방문을 잠궈버렸다.


다 안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장이나 대리, 경비 등은 잘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그때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바뀌지 않았다.


그 때 인천출입국에서 6개월씩 연장을 해줬는데, 시 바깥으로, 예를 들어 서울로 놀러 나오려고 하면 신고도 해야 했다. 여권도 사장이 갖고 있었다. 비자기간이 만료되서 여권과 비행기표, 체불임금을 달라고 했더니 사장은 공항에 가서 주겠다고 했다. 결국 어쩔수 없어서 여권, 비행기표, 임금을 포기하고 다른 데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같이 일하던 방글라 사람 한 명 ‘알리’는 손가락이 절단당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것도 내가 일하던 바로 옆에서. 알리는 일을 빨리해서 사장에게 잘 보이려 했는데 그러다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절반 잘렸고 사장은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내가 가서 안정을 시켰고, 과장이 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더니 일해야 한다면서 못가게 했다. 9시에 일 끝나고 병원 갔더니 손가락을 붙이지 않고 그냥 절단되어 있었다. 내가 화가 나서 손가락은 어딨냐고 물었더니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왜 안붙였냐고 했더니, 사장이 붙이면 치료기간이 오래 가니까 그냥 자르라고 했다고 했다. 봉합수술을 하면 돈도 많이 들고 치료기간도 오래 걸리고 일도 못하니까 그런 것이었다.


병원 환자들도 심하다고 한마디씩 했다. 알리가 같이 있어달라고 해서, 나랑 다른 친구가 돌아가면서 있으려고 했는데 사장은 있을 필요가 없다며 못 있게 했다. 알리는 산재보상금을 본인 통장이 없어서 사장 통장으로 받았다. 사장은 그것도 공항에서 주겠다고 했다. 알리는 그걸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출국했다.


주변의 다른 방글라 사람들은 우리가 그래도 제일 좋은 공장에서 일하고 제일 좋은 곳에서 숙식한다고 말했다.


그 때는 공장 기숙사에도 잘 못들어가게 했다. 다행히 다른 공장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조건이 있었다. 다른 한국 사람들이 보기 전에 6시 30분까지 화장실 사용이나 씻는 것을 마치고, 저녁 8시 반까지 방에만 있으라는 것이었다. 소변도 방에서 보라는 것이었다.


한 보름 정도 거기에 있다가 금정에 있는 도금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다른 데는 여권이 없다고 하면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 회사 사장을 만났더니, 임금은 나중에 정하겠고 일 할 수 있는지 우선 보고 정하겠다고 했다. 도금이 뭔지도 몰랐다. 철 도금이었는데 엄청 무거운 제품들이었다. 하나에 130kg 정도 했다. 이것을 하루 종일 운반했다. 그래서 3개월도 못 채우고 못하겠다고 했다.


기숙사는 공장 안에 있는 방이었는데, 2층 침대에서 네 명이 생활했다. 들어가기 전에 얘기해서 그런지, 욕 같은 건 없었다. 돼지고기도 주지 않았다. 식사는 잘 해주는 편이었다. 임금은 55만원 정도였다. 한국사람은 180만원 받았다. 거기서 그만두고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갈 데가 없어서 주변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서 낮에 자고 밤에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일자리를 찾으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자동차 부품업체 들어갔다. 94년 말에서 95년 초 즈음이었다. 안산 구반월 사사동에 있는 업체였다. 사전에 가서 봤는데 많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하니 많이 힘들었다. 남자는 두 세 명이고 나머지는 나이 많은 여성들이 7-8명 있었다. 물건 들어오면 다 내리고, 공장 내에서 옮기고, 제품이 나오면 다시 싣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기도 했다. 공장장이 욕도 많이 하고 화도 내고 때리려 하기도 했다. 사장이랑 그 사촌인 과장한테 얘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가 98년 2월 25일에 허리를 크게 다치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허리가 너무 약해져서 공장장한테 계속 얘기해서 무리한 작업을 하지 않도록 요청했는데 처음에는 병원 다니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고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었다. 그걸 사장한테 줬다. 내가 회사에서 정밀도를 요구하는 중요한 파트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장 얘기는 내가 없으면 어려우니 기계만 다루면서 점심시간에 병원 다니라는 것이었다. 병원비는 주지 않았다. 내가 허리 아프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기계를 옮기는데, 2월 25일도 그런 날이었다. 내가 허리아파서 못 들겠다고 했는데 같이 들면 괜찮다면서 공장장이 화까지 냈다. 그걸 옮기다가 다쳤다. 다리가 뻣뻣해져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일 끝나고 2분 거리의 숙소에 30분이 걸려서 도착했다. 밤에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아는 친구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 아침에 병원에 가야 하는데 꼼짝도 못했고 택시도 오지 않았다. 결국 물건 납품하는 직원이 트럭을 끌고 와서 병원에 갔다. 다니던 병원에서는 치료하기 힘들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앰뷸런스 불러서 부천 가서 MRI를 찍었다. 심한 디스크였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회사 가서 얘기했더니, 니가 어디가서 돌아다니면서 다쳤는데 어떻게 아냐면서 비행기 티켓 사서 빨리 집에 가라고 했다. 약까지 사주면서.


수원에 있는 엠마우스 이주노동자 상담소 연락처를 갖고 있어서 거기에 연락했더니 와서 상담받으라고 했다. 걷기조차 힘들어 가기 힘들다고 했더니 그래도 오라고 했다.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수원으로 갔다. 택시에서 내려서 사무실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이 부축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렇게 심한지 몰랐다면서 회사와 얘기하겠다고 했다. 엠마우스에서 회사에 전화했고, 안산 갈릴레아 상담소에 연결했다. 거기서 테레사 누나랑 신부님이 방에 왔다. 그분들이랑 사장을 만났더니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다음 날 공장장이 찾아와서는 도대체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허리 아프다고 MRI 사진 보여줬더니 뭘 아는지 보면서 괜찮다고 했다. 좀 있다 다시 오더니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을 거라고 했다. 그동안 들어간 치료비는 어떡하냐고 했더니 그건 니가 내라고 했다.


그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났더니 그 의사도 자기 병원에서는 힘드니 중앙 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공장장이랑 같이 침도 맞으러 갔다. 그 의사는 치료 받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입원해야 하는데 보호자가 없었다. 공장장이 사장이랑 얘기하더니 다음 날 안산 중앙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 때가 98년 3월 6일이었다. 중앙병원에서 수술받고, 이대 동대문 병원에서 2차 수술을 받고, 3차 수술도 거기서 받았다. 입원하고 나서 산재신청을 했다. 그래도 산재보험이 적용안되는 비보험 항목이 있어서 2천만 원 가까이 들어갔다. 휴업급여 받는 거랑, 친구들한테서 빌린 거랑 장애등급 받아서 보상금 받은 게 들어갔다.


산재요양 기간은 200년 7월 30일에 1차가 끝났고, 재요양 신청을 해서 2001년 3월 23일에 재요양 허락을 받았고 2002년 10월 4일에 끝났다. 그 뒤에는 후유증상진료카드를 2년 씩 두 차례 받아서 통원치료를 했다. 그 때에도 특진비나 약값이 많이 들었다. 2006년 10월 3일에 그것도 끝났다. (다음에서 계속)


3. 이주노동자운동에 나서다.


고민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 들어와서 억압도 많이 받았고 회사에서도 무시당하고 맞고 욕 먹고 임금도 제대로 못받고 했다. 니네 나라 집이 있냐 밥이 있냐, 재워주고 먹여주는데 임금이 뭐가 필요해... 너무 상황이 충격적이어서 1주일이나 한 달 뒤에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버스타고 가다가 태우기 싫다고 내리라는 기사도 있었고, 지하철 타면 냄새난다며 옆에 앉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에 방글라 음식이나 가게가 이태원에 있었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 갔다. 거기에 방글라나 파키스탄 사람들이 모인다. 거기서 보니까, 손가락 없고 손목 없고 팔 없는 사람도 있고, 산재나 보상도 못 받았다. 쉬지도 못하고 너무 힘든데 한국 동료직원들에게 담배빵 당한 사람도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던 초창기였고,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임금 18만 원 정도에 새벽 1-2시까지 일했다. 광명 성애병원에 한 번 갔더니 환자 중에 이주노동자들이 30%가 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센터 통해서 참여했다. 외노협 집회에도 참여했다. 95년도에 네팔, 방글라 사람들이 명동성당에서 쇠사슬 농성했을때, 농성장에 방문하기도 했다.


평등노조 이주지부를 준비하기 전에 활동가들과 알게 되었다. 그 때 어떤 방글라 노동자가 손가락이 잘렸는데 회사에서 가정의학과를 보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연락을 했고, 상담하러 샬롬의 집에 같이 가서 소냐를 만났다. 그리고 의정부에 있는 상담소에 갔고 치료를 받고 산재를 신청하게 되었다. 의정부 근로복지공단에서 담당자가 처리를 잘 해줘서 산재를 받을 수 있었다. 외노협과는 다른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소냐한테 들었고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할 수 있는 부분은 같이 하겠다고 했다.


그 이후 이주지부가 결성되고 이윤주 지부장, 마야, 소냐 등과 통화도 많이 했다. 가입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는데 가입하지 않고 지역에서 활동하겠다고 했다. 그 때 안양에 있었는데 조직을 시작했고 안산에 와서도 준비를 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 들어갈 때도 농성 같이하자고 제안 받았는데, 몸이 안좋고 날이 추워서 허리가 도질 수 있어서 같이는 못하고 가끔 가서 방문을 했고, 집회에 주로 결합했다. 우즈베키스탄 동지 한 명이 잡혔을 때 집회도 많이 했고 그 동지가 몸도 안좋아서 풀려날 수 있었다.


농성하면서 이주노조 논의를 시작했고, 남부 - 안산, 안양, 수원, 오산 등-, 북부, 서울, 인천 네 지역으로 나눠서 기획단을 꾸렸고 내가 남부 기획단 대표를 맡았다.


처음에 이주지부에 대해서 약간 거부감이 있었다. 함께하는 비조합원들이 집회나 투쟁에는 같이 했는데, 이주지부 내부 갈등이 심해서 가입하길 꺼려했다. 특히 한국 동지들이 회의 할 때 주로 얘기하고 의견 대립하고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주노조가 생기면 이주동지들이 주체가 되고, 스스로 활동하게 될 수 있으니 가입해야겠다고 맘을 먹었고 많은 동지들이 그러했다. 노조 만들 때 위원장에 출마하라고 많은 권유가 있었다. 김혁 동지, 아느와르 동지 등이 찾아와서 계속 얘기하기도 했다. 이주지부 활동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농성에 깊게 결합한 것도 아니어서 하기 어렵다고 했고, 아느와르 동지가 하면 다른 직책을 맡을 수도 있다고 했다.


2004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집에 돌아갈 준비도 했는데, 농성단에서 봉고차 두 대를 타고 동지들이 와서 가지 말라고 했다. 결국 위원장에 출마하지 않고 수석부위원장에 출마하라고 제안 받아서 그렇게 하게 되었다.


아느와르 동지가 잡혀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 전에 샤말 동지도 잡혀갔고 많은 동지들이 눈 앞에서 잡혀갔기 때문에. 그래도 그렇게 빨리 잡아갈 줄은 몰랐다. 직무대행을 맡아야 했을 때는 너무 부담이 되었다.


창립총회를 했지만, 사실 지역체계가 하나도 없어서 조직 사업을 많이 해야 했다. 지역 동지들도 많이 잡혀갔다. 아느와르가 잡혀가고 나서 사람들이 연락도 잘 안받았다. 그 당시 서울본부 강당 등에서 생활했다. 뭘 해야 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너무 고민이 많이 되었다. 누가 좀 힘을 실어줘야 되는데 많이 없었다. 이상훈 조직차장이 힘을 많이 실어줬다. 2005년 5월부터 맡아서 2006년 6월 2일 총회 때까지 직무대행을 맡았다. 그 총회에서 아느와르 위원장, 까지만 수석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이 선출되었다. 2007년 2월에 다시 총회를 해서 까지만 위원장, 토르너 수석부위원장, 라주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이 선출되었다.


직무대행 시절에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아느와르 석방투쟁도 해야 했고, 고용허가제 반대투쟁도 해야 했고, 지부, 분회 조직화 사업도 해야 했다. 지역을 많이 다니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뭔지 많이 고민했다. 조합원들이 무서워서 잘 안나오니까 첫 출발로 명동성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지역에서 지지방문하자고 했다. 한 달 좀 넘게 했고 그 성과를 모아 집회를 했다.


아느와르 동지 잡혀간 이후 명동성당에서 첫 집회를 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강제추방 중단,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아느와르 위원장 석방을 위한 투쟁을 진행하면서 외부 집회도 하고 지역 순회도 많이 했다. 서울, 중부, 남부, 북부 지부를 건설했다. 분회 건설도 시작했다. 안산, 안양, 오산, 의정부, 동대문, 성수 등. 어느 정도 조직체계를 갖추고 거리에 나선 것이다.


고용허가제 1년 집회를 국회 앞에서 하기도 했다. 국가인원위에서 아느와르 연행을 합법이라고 판정하고 조사 끝날 때까지 출국 금지하라고 했는데, 이를 규탄하고 장기구금에 반대하며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국가인권위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고 이후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2005년 12월 5일에 점거농성을 시작했고 2006년 1월 20일 쯤에 농성을 풀었다. 인권위가 이주노동자 문제를 더 고민하게 만드는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직무대행이 끝나고 나서는 안산 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계속 했다.


4.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에 대하여


92년도에 내가 들어왔는데 그 이후 내가 보기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정책은 없었다. 6개월씩 비자 연장, 해외투자기업연수생제도, 산업연수생제도, 고용허가제 밖에 없는데, 모든 제도가 고용주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이주노동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산업연수생제도나, 해외투자기업연수생제도가 사업장 변경의 자유가 없었고 어떤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는데 고용허가제도 똑같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고 모든 권한을 고용주가 갖고 있어서 1년 마다 계약 연장을 하고 3년간 일을 할 수 있는데, 고용주가 이주노동자를 고용하겠다는 결정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어서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하고 주는 대로 돈을 받아야 한다.


이제까지 고용허가제나 연수생 상담을 하면서 느낀 것은, 대다수 사업장이 근로기준법조차 지키지 않고, 최저임금 수준으로만 돈을 준다. 1년이 지나든, 2년이 지나든 최저임금을 받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기술에 따라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수당도 대부분 못받는다. 상여금도 없고 연차도 없다. 연장수당을 주지만 야간을 하게 되면 야간수당 줘야 하는데 잘 안준다. 사람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용주한테 따질 수 있는 것이다.


고용허가제에서는 3년 일하고 한 달 나갔다 오면 2년 더 일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고용주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하고 싶다고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밤 11시 12시까지 죽어라 일한다. 몸이 아파도 쉬지 못하고 토요일 일요일에 쉬지 못하고 노예처럼 일한다. 이런 건 제도적인 문제로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 들어오는 노동자들은 의사소통 잘 안되고 기계 잘 몰라서 산업재해 많이 당한다. 한국 들어와서 8일만에 왼팔이 절단된 사람도 봤고, 3개월 만에 오른다리 허벅지가 절단된 사람도 봤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많이 다치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노동환경이나 생활이 좋아져야 되는데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한쪽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쫓아내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올 해에만도 13만 2천명이나 고용허가제 인력을 들여오겠다고 한다. 정부는 이주노동자가 한국 노동자 일자리를 뺏기 때문에 단속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이 새로 들여오나?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것이다.


93년부터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잡혀갔다. 2003년 11월부터 합동단속이 시작됐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단속은 많았다. 아직 23만 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단속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단속 때문에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단속을 피하려다 다치거나 목숨을 잃거나 보호소에서 불이나 죽는다. 그래서 국내, 국제적으로 비판이 거세고 한국 이미지만 나빠진다.


단속추방은 이주노동자 정책이 아니다. 바꿔야 한다. 많은 문제가 있는 고용허가제도 빠른 시일 안에 고쳐야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 인정받고 인간답게 일하고 살 수 있다.


정권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고 이주노동자 역사가 20년이나 됐는데 제대로 된 정책이 없어서 너무 안타깝다.


5.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하여


2002년, 2003년과 비교하면 이주노동자 운동이 상태가 점점 안좋아지고 있다. 노동운동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는 거의 없다.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자기가 받는 억압과 고통에 따라 스스로 운동하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외노협이나 이주인권연대 등등 단체들이 이주운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운동을 시작했지만, 요즘에 보면 사람들이 많이 잡혀가고 죽어가고 다치는 등 이주노동자 인권이 제로 상태인데 이러한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아쉽다. 노동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이주노동자 정책 개선이나 단속추방 저지에 대해 제대로 사업하는 거 거의 없다. 민주노총은 조금이라도 움직이지만 한국노총은 그렇지도 않다.


안산에서 행사할 때 한 번 갔는데,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노동절’이었다. 국회의원들도 오고, 지역 인사들도 많이 왔는데 정작 이주노동자들을 거의 못봤다. 상도 많이 나눠 줬는데 이주노동자들이 상을 받지는 않았다. 100만 명 넘는 이주민들이 한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이제라도 진심으로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생활, 세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이주노동자들이 와서 과거처럼 그대로 당하고 억압받고 탄압받고 가슴 아프게 본국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내가 이주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을 할 때 많은 단체들이 함께 하면서 힘을 많이 실어줬다. 그런데 많은 단위들이 이주운동에서 빠져나가거나 이름만 걸어놓고 있다. 이런 게 이주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에서 안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주노조가 해야 할 일이 많고, 이주노조가 목소리를 내고 제대로 움직여야 그런 단체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주노조가 활동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만난 이주동지들이 그런 것은 잘 모르고 고민 잘 안한다. 예를 들어 한국 운동내의 좌, 우, 중도 등 정파 그런 거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이런 정치적인 차이를 떠나 이주민 활동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협력하고 고민하는데, 한국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억지로 이주동지들을 자기 단체로 조직하게 되면 피해는 이주노동자들이 받는다. 그런 것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하고 지금은 우선 이주노동자 투쟁에 열심히 함께 해야 한다.


6. 이주동지들에게


이주동지들이 이주운동 하기 쉽지 않다. 자기 생계비, 가족들을 위해 돈 벌려고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사실이다. 상담을 해보면, 들어오기 전과 들어온 이후는 완전히 다르다. 고향에서 올 때는 많은 꿈을 갖고 들어오는데 들어오고 나서는 거주나 노동이나 환경이 너무 안좋다고 한다. 임금문제나 차별문제, 욕설, 폭행 등이 계속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주운동에 많은 단체들이 관심이 적어지면 이런 문제들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해야 하고 치료받아야 한다. 이주노동자들도 체불임금문제, 회사 내의 탄압과 억압 등을 해결하려면 스스로 나서서 투쟁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알리고 시민들에게 말해야 한다. 가만히 시키는 대로 일하고 숙이고 사는 것보다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제라도 나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일하면서도 시간을 내서 자기권리 찾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법원 판결에서는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등법원에서 이주노조를 인정했는데 대법원에서 이를 뒤집지 않을 것이다. 미등록, 등록을 떠나 모든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자이고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가 있다. 법에서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라서 노조활동은 안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가 계속 요구해온 것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다. 미등록 상태에서 일하고 활동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에서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 활동가나 중앙 활동가들이 많이 잡혀가고 남아 있는 활동가들이 많지 않지만, 활동가들이 이주노조를 아끼고 사랑하고, 노조를 확대시키기 위해 제대로 나서서 활동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이주동지들이 한국말이 잘 안되서 간담회나 기자회견, 집회 등에서 한국동지들이 많이 얘기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가서 얘기할 때 이주동지들이 직접 얘기하는 거랑 한국 동지가 얘기하는 거랑 차이가 많이 난다.


다른 단체들이랑 간담회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반드시 이주동지들이 결합해서 다른 운동단체들에게 함께하자고 해야 한다.


요즘 기자회견이나 집회 등에서 이주동지들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안좋은 것이다.


내가 직무대행 할 때 G1비자를 갖고 있었지만 6개월 넘게 비자연장 안해줘서 비자 없을 때가 있었다. 그 때에도 안 다닌데 없고 안 한 것 없다. 미등록 상태라서 나서기 어려울 수 있지만 계속 안나서면 이주노동자들의 미래를 찾을 수 없다.


한국 단체들의 연대와 지원이 필요하겠지만, 이주노동자들이 나설 때 사회를 바꿀 수 있다.


7. 이후 계획


워낙 갑작스럽게 결정을 하게 되어서 별로 고민을 못했다. 계획이 있으려면 재정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한데 지금은 없다. 나라 가서 뭘 해야할 지 솔직히 깜깜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출국해야 하는 것도 너무 억울하다. 출국 하더라도 2-3개월의 준비기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만나고 친해지고 많이 도와준 사람들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가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방글라 상황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서 분위기 좀 파악하고 오랫동안 못 본 가족들, 친구들 만나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 의견도 들어보면서 뭘 할 것인지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떠나서 어디에 있든 지구의 어디에 있든 노동자, 농민, 밑바닥 계층 사람들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