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인권위 ‘초강력 권고’의 딜레마
[뉴스메이커 2006-02-09 18:30]

인권옹호 절대적 가치 정치·흑백논리 공방 일쑤…NAP 발표 이후 논란 확대

인권위는 2001년 출범 후 지금까지 숱한 ‘사회적 아젠다’를 공급했다. 국가보안법과 사형제도에 대한 폐지 의견을 냈고 크레파스에서 인종차별을 유발할 수 있는 ‘살색’을 없앴다. 중·고생의 두발자유 문제를 거론하는가 하면 오랫동안 금기로 인식됐던 양심적 병역 거부의 인정과 대체 복무제의 도입을 권고하기도 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인권전담 국가기구로서 작년말까지 1만8000건에 이르는 국민의 진정을 다뤘다.

독립적 준사법기구이자 준국제기구

작년 인권위의 구체적 활동 역시 부산했다. ▲육군훈련소 인분취식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를 통해 단체기합금지 및 위반시 처벌 명문화, 인권보호관제도 운영을 포함한 군대인권 향상을 위한 제도개선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강제단속과 연행에 대한 법적 근거와 요건 명확화 ▲정신보건시설 수용자의 인권보호를 위해 ‘정신보건법’ 및 ‘정신보건법 시행령’ 개선 ▲구금시설 수용자들에게 휴무 토요일에도 실외운동과 접견을 실시 등을 권고하는 활동을 펼쳤다.

국군해외 파병에 대한 논란이 일었을 때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공식적으로 나타내 독립국가기구의 성격에 대한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고 최근에는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권위는 199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가한 민간단체들이 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한 뒤 2001년 ‘독립적 인권 전담기구’로 출범했다. 인권위는 그 업무의 특성상 독립기구, 종합적 인권전담 기구, 준사법기구, 준국제기구다.

입법, 사법, 행정 등 국가의 어떤 기관에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립기구이며 인권 보호 향상에 관한 모든 사항을 다룬다는 점에서 종합적 인권전담 기구다.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 조치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준사법기구이며 국제 인권 규범의 국내적 실행을 담당한다는 점에서는 준국제기구다.

위원회 상당수 독재정권 항거 경력

업무수행의 독자성은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는 인권위법 3조2항에 규정돼 있다. 인권위는 입법·사법·행정 등 3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국가기구로서 누구의 간섭이나 지휘도 받지 않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정해진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독립기구인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의 이러한 독립성은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견해도 있다. 업무, 조직 및 인사, 예산의 독립성이 확보되는 헌법기관으로 격상시켜야 완벽한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위가 헌법기관으로 격상돼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첩경은 국민적 신뢰를 확고히 구축하고 인권 옹호에의 열정을 시대의 소명으로까지 밀어 올리는 힘의 비축에 있다. 인권위는 전원위원회와 5개 위원회, 사무처(5국 1실 8과 7 담당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원위원회가 최고 의결기구를 맡고 있다. 인권침해여부나 정책권고 결정 등 모든 인권위의 입장표명은 전원위원회에서 투표로 결정된다.


전원위원회는 위원장과 상임위원 3명, 비상임위원 7명으로 대통령이 4명을 임명하고 국회에서 4명을 추천하며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한다. 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시민단체 활동의 경험이 있고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온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 조영황 위원장은 이들이 ‘인권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인권적 감성’이 풍부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 당시 출범한 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소위 ‘진보적’ 인사들로 구성돼 있고 종종 일부 언론과 보수 세력에 의해 하나의 거대한 ‘진보 시민단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실상 인권위 전원위원의 상당수는 오랜 군사독재정권 시절 인권 유린과 경직된 체제에 저항했던 인물들이다.

지난해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조영황 위원장은 법조인 출신으로 직전에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냈다(인터뷰 기사 참조). 또 다른 대통령몫 위원으로는 한국여성단체연합 노동위원장을 지냈던 정강자 상임 위원,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을 지냈던 이해학 비상임위원, 부산 지역 시민운동의 대부로 평가받고 있는 원형은 비상임위원 등이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을 지냈던 최영애 상임위원과 가톨릭대학교 아태지역연구원 교수인 김만흠 비상임위원이 각각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추천으로 활동 중이다. 한나라당 추천으로 인권위 전원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사는 언론계 출신인 김호준 상임위원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신혜수 비상임위원이다. 이화여대 법과대학 교수인 최금숙,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인 정인섭,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인 나천수 비상임위원은 대법원장 지명으로 인권위에 입성했다.

인권위의 실무를 총괄하는 곽노현 사무총장은 2000년 6월 삼성에버랜드 편법 증여와 관련해 이건희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 ‘반 삼성’ 운동에 나섰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51개대 법학 교수들과 함께 각하 의견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기도 했다. 인권위의 힘은 ‘권고’와 ‘의견 표명’에서 나온다. 비록 법률적 강제성은 없지만 인권위 정책 권고의 정부 수용률은 80%에 육박한다. 검토 중이거나 입법 과정에 있는 사안 때문에 정확한 통계자료는 제시하기 힘들지만 인권위의 권고는 상당 부분이 정책으로 실현돼 국민의 인권, 일상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정책 권고 정부 수용률 80% 육박

국가인권위가 2001년 출범 후 2005년 11월 말 현재까지 법령 및 정책과 관련해 국가기관 등에 권고한 것은 모두 100건이다. 이 가운데 현재 권고를 받은 기관이 검토 중인 사안은 21건이고, 수용 여부를 국가인권위에 통보한 사안은 79건이다. 국가인권위가 통보를 받은 79건 중 수용된 것은 63건, 불수용 16건으로 나타났다. 통보를 받은 사안 중 정부 수용률은 79.7%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인권위 전문위원 박병수 씨(인권정책 총괄본부 인권연구팀)는 권고의 힘을 이렇게 표현한다.

“국가인권위 권고가 강제력이 없다는 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지만,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문화를 우리 사회에서 실현하려는 새로운 실험이기도 하다. 실행은 법에 의하되, 판단은 법과 더불어 양심도 중요시되는 인권의 특수성은 강제력이 아닌 자기성찰에 의해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권고의 힘은 그러한 ‘사회적 자기성찰’에서 나온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하면, 국가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해당 부처나 당사자는 권고를 수행하지 않는 사유를 문서로 제출해야 한다. 또한 국가인권위는 이 문서를 언론에 공개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권고의 미수용 사례가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개될 수 있다는 것은 권고의 실효성 확보를 위한 유력한 수단이다. 인권위의 권고는 정당한 사유 없이 수용하지 않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고민과 딜레마도 커진다. 인권위의 가장 큰 고민은 인권의 옹호라는 절대적 가치가 늘 정치공방의 테마로 떠오르고 ‘진보와 보수’라는 흑백 논리로 재단되기 십상이라는 점에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곤혹스러운 처지의 ‘국가인권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분단된 국가에서 상대편의 인권문제를 평가하는 문제는 오직 대한민국의 국가인권위원회만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다. 인권위의 어떠한 의견 표명도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남북문제의 진정한 해결에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익명을 요구한 인권위의 한 관계자는 “보편적인 인권의 옹호가 더 치명적인 정치적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할 수 있고 그것이 인권위가 직면한 비극”이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이 발표된 올 초부터 인권위의 이런 딜레마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노사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적 인권 이슈를 포괄하고 있는 ‘인권 NAP’는 재계의 즉각적인 반격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인권위는 노사문제에 개입해 시장경제를 교란하고 병역 거부를 용인하고 공무원 정치 참여 허용을 통해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재계의 시각에 의하면 인권위는 공공의 적,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재계와 인권위의 대충돌은 이미 예견돼온 시나리오다. 제2기 인권위는 출범 초부터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권적 기본권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조영황 현 인권위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사회권 분야의 인권개선, 정책·교육기능 강화를 통한 인권예방 시스템 구축”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노동자·빈민 등 사회 취약계층의 인권을 최우선으로 보호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노사문제로 재계와 사사건건 마찰

인권위와 재계의 충돌이 그 전조를 드러낸 것은 지난해 4월 경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표명’이었다. 당시는 노·사·정이 비정규직 관련 법안 처리를 위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와중이었기에 인권위의 의견표명은 파장이 매우 컸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인권위를 향해 “잘 모르면 용감하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인권위의 의견표명은 재계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노·사·정 협상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동계가 인권위 의견인 ▲‘동일노동에 동일임금’ 규정 도입 ▲기간제 근로 사용시 사유 제한 규정 도입 등을 최저선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올해 인권위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소외계층의 인권문제에 더욱 힘을 쏟겠다는 복안을 밝혔다. 재계와 마찰을 빚을 것이 분명한 사회권 분야의 인권 옹호 활동도 작년보다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양극화의 해소 방안으로 “일자리 창출과 직업 안전망 구축을 통해 사회 복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하는 ‘적극적 복지’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위의 노동권 옹호가 약자를 보호하는 동시에 경제의 새로운 활력을 창출하는 ‘능동적 기제’로 작용할지 지켜볼 일이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어떻게 만들어졌나

인권NAP는 대한민국 중장기 인권정책의 청사진이자 범국가적인 인권정책의 종합계획이라 할 수 있다. 2003년 10월부터 입안된 이 계획은 2005년 말에 인권위의 권고안으로 완성됐다. 장장 2년 2개월에 걸친 연구와 검토 끝에 이뤄진 인권 NAP 권고안은 인권위 출범 4년을 중간 결산하는 야심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정부는 인권위 권고안에 기초하여 인권NAP를 수립, 2007년부터 향후 5년간 집행에 들어간다. 인권NAP는 1993년 오스트리아 빈의 UN 세계인권회의에서 결의된 ‘빈 선언과 실행계획(Vienna Declaration and Programme of Action)’에서 비롯됐다. 1993년 비엔나 선언은 각국에 인권 NAP 수립을 권고했으며 2001년 5월 UN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2006년 6월까지 인권NAP 수립을 권고한 바 있다.

인권NAP권고안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인권NAP의 개요가 주요 내용이고 제2부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인권보호를 위해 향후 5년간 집중할 분야, 제3부는 인권증진을 위한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제도 개선 및 보완을 필요로 하는 분야 등이 기술돼 있다. 인권NAP 권고안의 제2부에 포함된 주요 정책과제는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성적 소수자, 새터민(탈북자) 등의 인권 보호 프로그램이 담겨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성전환 관련 수술의 국민건강보험의 단계적 적용 검토 등이 논란의 대상이다.

권고안의 3부는 더욱 파격적인 인권 보호 정책을 포괄하고 있다. 반인도적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배제,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 일정범위 확대,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적절한 대체복무제 도입 등이 그것이다. 사회권과 관련해서는 쟁의행위에 대한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한 직권중재 폐지 또는 필수공익사업장 범위 축소, 근로기준법 적용범위 대상 확대, 최저임금 결정방식 개선 및 적용대상 확대 등이 포함돼 있다.

인권위는 권고안 작성을 위해 NAP추진기획단과 인권정책관계자협의회를 구성, 운영했다. 학계·전문가(9명), 인권단체 대표(7인) 등으로 구성된 NAP추진기획단은 총 14차 회의를 통해 인권NAP권고안 작성의 추진방향을 설정하고 핵심추진과제를 선정했다. 권고안의 실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부 부처의 고위직 간부로 구성된 인권정책관계자협의회와 정책협의를 진행했다. 2005년 8월부터는 인권위원 5명으로 ‘인권NAP권고안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특위는 16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권고안의 세부 사안을 다듬었고 인권위원 11명 전원이 참여하는 인권위원워크숍도 3차례 개최, 최종안을 만들었다.

한기홍〈객원기자〉 glutton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