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개입, 단속과 추방

이 땅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언제 불법이 될지 몰라 숨죽여 지내야 한다. 정부는 겉으로는 이주노동자가 질병의 근원지라거나 깡그리 범죄자 취급해가면서 사회 최하층으로 만들고 이주노동자들을 제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실컷 일 부려먹고 돈 떼먹기 쉬운 존재로 이주노동자들을 대상화해왔다. 어느 노동자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자신이 팔려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삶의 싸이클 때문에 이주노동자는 언제든지 고용주의 노예가 되어야만 했다. 3년간 단기 체류에다, 직업 선택의 자유조차 없는 것은 이주노동자가 극빈한 노동자의 현실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의 자기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이주노동자는 법의 굴레를 깨고 불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불법으로 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기본적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이기 때문에, 보호소에 갇혀 목숨을 잃는 것이든 자살을 하는 것이든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이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만이 아니었다.

10:90의 사회, 90이 10으로 인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세상

흔히 한국 사회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비율이 이제는 10:90이라고 하는데, 이 90은 언제든지 노동자로 혹은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일 것이다. 길거리에서 노점을 하고 있는 많은 영세한 상인들 역시 사회의 빈곤층이다. 고 이근재 열사 역시 노점을 하기 이전에는 가구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였다. 그러했던 그가 이번에는 ‘깨끗한 거리 만들기’라는 먹히지도 않는 목적으로 폭력적인 노점상 단속에 못 이겨 목숨을 끊었다. 이주노동자들이 불법화되고 단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자기 생존을 위해 노점상을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노점-그/녀들이 생존할 수단-이 강제적으로 짓이겨지고 있다. 실제 정부에서도 길거리의 모든 노점을 없앨 목적을 갖고 있다거나 모든 이주노동자를 내쫓을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정부가 노리고 있는 의도는, 이주노동자, 노점상, 그 밖의 매우 영세한 미조직 노동자들이나 빈곤층이 서로의 처지를 알고 연대하는 것을 깨기 위한 목적이다. 조직되지 못한 90이 조직화되고, 지배 계급에 ‘제대로’ 항거할 때 10은 그 힘을 잃게 된다. 하기에 90을 지배하는 10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정부로서는 용역 깡패들까지 동원해가면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들의 조직된 투쟁을 짓누르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단속해야 하는가?

고 이근재 열사가 목숨을 끊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정부에서는 뚜렷한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양시청은 고 이근재 열사가 정부 측의 단속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말만 남기고 더욱 더 악랄한 폭력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노점상 동지들이 단결해서 이뤄놓은 최소한의 권리조차 강제적으로 침탈하고 말 그대로 살 권리를 박탈하면서 ‘단속’하고 있다. 단속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통제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정부는 ‘단속’이라는 말 뒤로 더 많은 폭력과 불법 행위들을 저지르고 있다. 사실 누가 누구를 단속해야 하는가? 답은 너무도 자명하다.

흔들림 없는 투쟁으로, 생존권을 쟁취하자!

현재 수도권 지역 건설노동자들이 총력 파업 투쟁에 돌입하였다. 화물연대와의 공동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철도노조 역시 11월 총파업을 결의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부터 파업투쟁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이랜드-뉴코아 동지들은 고공에서 매우 외로운 시위를 전개하고 있다. 매우 기본적인 권리가 너무도 간절한 요구였던 고 정해진 열사, 파업을 파괴하기 위한 사측의 회유 공작으로 분신한 서울우유 조합원 동지를 생각하자. 현재 조직되고 있는 부문별 총파업이 말 그대로 ‘진짜 부문별 파업’이라든지, 한번 외치는 말로써 끝날 수 있는 파업이 아니어야 한다. 열사가 품었던 한에 대하여, 모든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투쟁으로 상승/확산되기 위하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이번 투쟁이 미조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조직할 수 있는 투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이주노조 역시 최선을 다해 현장을 조직하고, 투쟁할 것이다. 투쟁!